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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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일컬어 '가가 형사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고 스스로 칭했다고 한다. 그 동안 이 시리즈를 모두 읽으며 가가 형사를 보아왔던 독자들이라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이 시리즈도 벌써 아홉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캐릭터를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걸 감안하자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윗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아랫사람들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할 일은 사실을 하나하나 밝히는 거야.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만 골라내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지."

"사건의 이면에 의외의 진실이 있다는 말인가요?"

 

니혼바시 다리에서 중년의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경찰에게 발견된다. 칼에 찔린 남자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그 다리까지 걸어와 다리 중간쯤에 잇는 두 마리의 기린 조각상으로 장식된 기둥까지 가서 기도하는 자세로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내 사망하고, 곧이어 현장 근처 공원에서 한 청년이 경찰의 불심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이 된다. 그의 소지품에서 사망한 중년 남자의 운전면허증과 지갑 등이 발견되고, 자연스레 경찰은 청년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다. 청년이 너무도 쉽게 범인이 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피해자의 회사에서 계약직 현장 근로자로 일하다 사고로 다쳤지만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하고 계약 연장이 되지 않은 채 해고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혐의는 알리바이부터 증거까지 뭐 하나 들어맞지가 않고, 여론은 산재 은폐 기업에 대한 보도를 해대며, 회사는 그 모든 책임을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에게로 떠넘기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여덟 번째인 <신참자>에서부터 가가 형사의 비중이 많이 높아졌는데, 이 작품 역시 전작인 <신참자>와 마찬가지로 옛 도쿄의 정취가 어린 니혼바시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다 그 확장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흡사하다. 니혼바시 일대가 워낙 서정적이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풍경인데다, 가가 형사가 발로 뛰는 끈질긴 탐문 수사를 통해 그 일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피해자의 행적과 동기에 대해 파헤치는 모습이라 더욱 인간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살인사건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피해자의 알 수 없는 행적을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그의 가족에게 충격적인 파장을 던져주고, 살인사건의 동기와 범인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자식들과 소원했던 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신사를 돌며 해왔던 속죄와 구원의 기도,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감춰진 비밀, 어른이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벌어진 비극,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메세지까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는 매우 뭉클하게 다가온다.

"가가 씨가 본 것은 시체지 살아 있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 왔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죠. 자존심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마주하게 돼요. 그런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가가 씨는 그 의무를 소홀히 했어요."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손에서 태어나, 그의 작가 인생과 함께 20년이 넘는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의 신작이다. 특히나 시리즈물을 주로 쓰는 작가가 아니라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더욱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이기도 할 것이다. 천재적인 수사 실력이나 뛰어난 직감 등을 가지고 있는 형사 캐릭터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만나왔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따뜻한 캐릭터라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가 형사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졸업>에서 형사가 아니라 교사를 꿈꾸던 대학생으로 처음 등장했다. 형사였던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는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만, 친구들의 연이음 죽음을 접하며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시리즈가 계속 진행되면서 가가는 교사를 사직하고 경찰이 되고, 현재까지 총 아홉 편의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가 여타의 추리소설 시리즈물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이야기의 중심에 주인공이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리즈물일 경우, 그 인물의 개인사부터 시작해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메인 플롯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시리즈 캐릭터를 필요 최저한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의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외 다수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살인사건이라는 메인 플롯보다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방식이랄까. 그래서 읽는 동안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모자이크 조각들이 모여 만드는 드라마가 매번 뭉클하고 따뜻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하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속도감과 평범한 인물들이 벌어지는 사건에 어떻게 엮여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감동이 먼저 떠오르는 작가이다. 취향에 따라 특별히 좋았던 작품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건 정말 별로다, 수준이 떨어지거나 재미가 없다라고 느낄만한 작품은 없는, 매번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그것도 다작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말이다. 밑줄 긋고 싶은 멋들어진 문장을 쓰지도 않고,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지만, 항상 인간에 포인트를 주고 그려내는 드라마라 감동을 만들어내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야말로 정말 믿고 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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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7-02-21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만 조명받는 작품은 확실히 시들시들한 구석이 있죠. 근데 이 작가는 확실하게 캐릭터마다 잘 살리더군요! 그래서 몰입도가 좋은편인듯 해요^^

피오나 2017-02-21 14:13   좋아요 1 | URL
맞아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에 등장하는 작은 역할의 인물들에게도 세세하게 신경쓰는 작가인 것 같더라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