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없는 새벽,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린다. 요양원에 계신 아빠는 또 할아버지를 찾으신다. 할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렇게 아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서 찾곤 하신다.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지내신 지 어느덧 2년이 지나가고 있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나이라 체력적으로도 노쇠해지셨지만, 가끔은 기억이 왔다 갔다 하시기도 한다. 치매란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씩 사라지는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시곤 해서 가족들을 안타깝게 하시곤 한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어머니를 챙기거나, 존중하거나, 아꼈던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시면서 부쩍 어머니를 찾으신다. 그렇게 삶은 마치 농담처럼 아버지의 오랜 기억들을 옅어지게 만들어 두 분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그 어떤 애정도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외면하시지 못한다. 어쩌면 그런 게 40년차 부부의 정이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요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지금 당장이든, 혹은 내일이든, 아니면 수십 년 후라도. 시기만 다를 뿐이지 태어난 이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느라, 우리가 잠시 잊어 버리고 살 뿐, 죽음은 그렇게 우리 곁에 함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여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는 자각이 서서히 들고 있다.

 

 이유의 <소각의 여왕>에서 해미는 재수학원을 다닌 지 석 달 만에,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빠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엄마도 병을 앓다가 떠나 버린 뒤 그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고물상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빠가 몰래 하던 유품정리 일을 시작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유품 정리사로 살아가게 된다. 해미라는 캐릭터가 워낙 밝고, 엉뚱하기에 그렇겠지만, 그녀는 죽음을 꽤나 무심하게, 덤덤하게 여기며 말한다. "자연사를 했든, 자살이든 살인이든, 죄다 똑같아. 부패가 되고 가스로 복부가 부풀어오르고 복부에 든 가스가 새어나오면서 부패액이 흘러나와. 인간이라는 형태가 무너져 내리는 거지...." 유품 정리사 업무를 장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도, 죽음도 모두 그저 티비 속에 나오는 만져지지 않는 형태의 무엇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짐작하던 '죽음'과 실제의 '죽음'은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 서글퍼지기도 했고 말이다. 엄마의 죽음에 방관 혹은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 속에서 죽은 자들의 유품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해미의 이야기는 끔찍한 일에 무심하고, 무거운 일엔 활기차게 진행되다 어느 순간 스스로 소멸하게 된다. 이 험난하고 서글픈 세상 살면서 그저 그런대로 괜찮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지도 모르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에서는 더 험난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 등장한다. 1917 10 15일 파리, 검은 실크 스타킹과 실크 레이스로 장식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여우 털로 소매와 옷깃을 장식한 발까지 늘어지는 긴 모피 코트를 입고, 펠트 모자와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착용한 한 여인이 감방을 나와 처형 부대가 대기하는 장소로 향한다. 열두 명의 병사들이 몸을 곧추세우고 총을 어깨에 바짝 붙이는 순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여전히 태연했고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자신이고자 했던 당당한 여인, 마타 하리.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마타 하리의 삶을 재구성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 인생은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되어 있노라고, 태어나 공부하고 남편감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가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남자일지라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늙어가고, 거리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너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어'라고 말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것'이라는 문구가 내내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삶도 저렇게 정해져 버린 게 아닐까, 하다가도 어떻게 여자들의 생을 이렇게 서글프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사실 대부분 여자들의 삶이 그렇지 않던가 싶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한번도 결혼을 꿈꾼 적이 없다. 지나가다 보이는 그 어떤 아기에게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말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내 인생의 목표는 언제나 사회적 이름을 갖는 거였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오롯하게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으며,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집안일에 매진하기 시작한 지 벌써 이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하루 종일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저녁이면 퇴근해 돌아온 남편을 챙기고, 쓰러지듯 잠을 자고 다시 아침이 되는 식의 일상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내가 꿈꾸던 삶과는 정반대의 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꿈꾸었던 대로 살 수는 없는 게 세상이라지만, 나는 지금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건지 자꾸만 의문이 든다. 남성 중심 시대에서 여성의 권리를 표명했던, 20세기 첫 페미니스트였던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 마타 하리처럼 삶의 어느 순간에도 진정한 나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시간 거의 전부를 내어 주고 있다. 물론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잔잔한 일상의 기쁨 또한 매우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는 생기지 않는 아이를 위해 몇 년씩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고, 또 누군가는 연인이 없어서 쓸쓸한 겨울을 보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다 만난 <황석영의 밥도둑>은 읽는 내내 따뜻한 집밥을 먹는 것 같은 푸근한 위로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음식의 위대함과 기쁨을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 또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아니, 밥 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리 거창한 비유를 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에 쫓겨 대충 배만 채우거나, 단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만 목적을 두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인생을 되돌아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한 음식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석영 작가가 펼쳐내는 음식 이야기는 작가의 전 생애를 거치며 바로 삶 그 자체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무궁무진하다. 나라의 경제가 신통치 않았던 육십 년대에 보낸 군 시절의 음식들, 유년시절 전쟁 직후의 음식들과 미군부대의 퓨전 요리들, 구치소와 감옥에서 보낸 다섯 해 동안의 음식들이며 첫사랑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과 김일성 주석과 함께 먹었던 특별한 음식 등등 너무도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추억이 펼쳐진다.

코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향, 치익 소리를 내는 밥솥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 혀끝에 맴도는 익숙한 감칠맛까지. 그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부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는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따뜻하고 푸근한 한끼 식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가 없을 것이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이 내 시린 마음마저 만져준다면, 그저 그런 생각만으로도 한 끼 식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해서,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은 매일같이 마주하는 식사로 결론이 나고 말아버린 이상한 이 글은, 그럼에도 내가 같은 일을 여전히 반복하며 아이와 씨름하고, 남편과 투닥이며 견뎌내야 할 일상에 대한 일종의 자기 위안이다. 언젠가는 항상 꿈꿔왔던 인생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로, 이렇게 쌓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이 결국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는 믿음으로, 가족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그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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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2-1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혀 이상하지 않은 글인데요, 피오나님. 잘 읽었습니다.
읽다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이 났어요. 혹시 그 책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책 속에서 남자는 곰스크로 떠나고 싶어하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떠나기보다는 정착하게 돼요. 그때, 마을의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서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피오나님 글을 읽는데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이 났어요. 피오나님, 좋은 글이에요.

피오나 2016-12-14 10:01   좋아요 0 | URL
ㅎㅎ 그 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네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문구가 와닿네요. 그렇죠. 뭐든 억지로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선택한 거죠. 잊고 있었던 뭔가를 깨달은 느낌입니다. 제가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요. 아직도 배워야 할게 많네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