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굳이 나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진심을 얘기했다. 당신이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고 있기, 또는 살았기 때문이라고. 어떤 시제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
그러자 그의 입에서 나를 경악케 만든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한때 알고 지냈던 삐딱한 깡패 작가, 쫓기는 게릴라 전사, 책임감 있는 정치인, 잡지의 <연예란>에 애정 생활 관련 기사가 실리는 유명인>, 도무지 일관성 있게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이 상반된 이미지들은 하나의 인물이다. 바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있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이다. 저자는 실존 인물인 리모노프의 삶을 추적해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스토리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문학적 다큐멘터리>, <기록 문학> 등으로 일컬어지는 카레르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쓰여져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작가 자신의 인생과 리모노프의 삶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인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삶을 글로 쓰려고 하는 과정과 이유, 그리고 실제 그의 삶이 같이 보여지는 소설인 셈이다. 워낙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탓에 러시아 현대사에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라면 여러 번 길을 잃고 갈팡질팡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읽는 다른 책들에 비해 그렇게 많이 두껍다고 볼 수 없는 분량이었는데도, 읽는데 한참 걸렸으니 말이다. 1989년 이후 소련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점에서는 아주 큰 도움이 될만한 소설이긴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의 인내 또한 필요하다.
오만함도 잠시, 방 한가운데서, 관심의 한가운데서,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이놈은 어딜 가나 한가운데지, 바로 루돌프 누레예프를 발견하자 에두아르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참 운도 없지. 무표정하고 거무스름하고 잔인한,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곧 이 고상하게 문명화된 인간들의 무미건조함이 까발려지겠구나, 하며 몽골의 정복자를 자처하는 순간, 살토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궁벽한 두메산골 바시키르, 그 질척질척한 오지에서 태어나 이토록 높이까지 올라온 상태, 사람의 탈을 쓴 야만의 유혹으로 광채를 발하는 악마 같은 누레예프와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정치 관련 뉴스에서 아직도 심심치 않게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작가이자 정치인의 삶이란,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너무도 많은 일들이 파도처럼 벌어지는 인생이었다. 인생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때 천천히 낮은 곳을 달리다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클라이막스에 정점을 찍는 것이 보통 일 텐데, 어쩐지 리모노프에겐 계속 극과 극을 달리는, 그러니까 시동을 걸 필요도 없이 높은 곳을 내리 달리는 롤러코스터 같다고나 할까.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 작가의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모노프의 행동과 신념은 1898년 이후 소련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혼란, 분노, 절망, ‘거친 서구’식 자본주의, 올리가르히들의 경제 침탈, 보통 사람의 바닥난 저축, 매일매일 이어오던 일상의 상실 같은 것들….” 누군가의 인생이 한 시대를 보여준다면, 그렇다면 그의 삶은 충분히 소설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삶을 소설로 쓴 이유가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소련 해체 후 혼란에 휩싸인 러시아를 통과해가는 영웅의 목소리를 읽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으로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인물은 좀처럼 보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거기다 읽는 이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만드는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하다가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안쓰럽게 보이기도 하고, 이처럼 극과 극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인물은 단연코 리모노프 외에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