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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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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날그날 겪는 모든 일에는 현재의 불확실성이 그 흔적을 남긴다. 그 시절 마르가레트는 길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혹여나 부아야발과 마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보스망스는 정작 자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와 경멸에 가득 차 그를 쫓아다니며 그가 혹 거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는대도 서슴없이 그의 주머니를 뒤질 그 심란한 커플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사라진다.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깨끗한 음악을 못 듣게 방해하던 전파 잡음이 사라지듯. 그렇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꿈속과 꼭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 켠에 걸려 있는 기억이 있다. 유치원이 끝날 시간쯤 당시에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항상 서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무섭고 싫어 집에 바로 가지 못하고 동네를 빙빙 둘러서 다니곤 했었다.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가 그때 뭔가 해코지를 하거나, 괴롭히거나 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같이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남자아이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고, 공포스럽기만 했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일이라 그래서 결국 그 아이와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그걸 극복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는지는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당시의 그 일은 그저 이미지로 남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제일 먼저 기억나는 사건 같은 게 되어 버렸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그게 대단히 괴로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 친구나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혼자 끙끙댔었다. 누군가에게 말해버리면 이야기를 듣게 된 누군가에게 그 아이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하고 추억처럼 이야기 할 때가 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잘못된 만남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요."

모디아노는 말한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사라지는 것들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보스망스의 어머니는 턱을 공격적으로 쳐들고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 돈을 요구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을러대는 듯한 위압이 담긴 목소리로. 함께 온 갈색 머리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가만히 서서,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 보스망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그 두 사람이 자신에게 왜 그런 경멸감을 표출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를 뒤져 돈을 내민다. 빨간 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한 호적상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에게, 마치 집주인이 오랫동안 집세가 밀린 세입자를 상대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르가레트에게 말한다. "다행히 집을 옮겼으니까, 그 둘은 이제 내게서 돈을 뜯어내지 못해요."

마르가레트는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두려워하는 남자가 있다. 몇 달 전부터 자신을 찾아 다니는 남자, 부아야발을 피해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종종 보스망스에게 회사 앞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말하고,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며 불안해한다.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남자가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구애를 하는 것뿐이지 않냐며, 이제 뭐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녀는 직장에서도 한참 먼 곳에 있는 오퇴유에 집을 구한다. 눈이 내린 어느 날 밤 보스망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는 지금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산속에, 앙가딘 어디쯤에 들어와 있다고. " 그제야 두 사람의 마음은 편안히 누그러지고, 그들은 그 모든 잘못된 만남을 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십 대 초반의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시위대가 운집해 있고, 경찰 기동대가 대로를 따라 인간 사슬을 형성하고 있던 어수선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자는 기동대와 몰려든 군중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벽으로 떼밀리다 상처를 입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약국으로 데려간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가족은커녕 도움을 청할 곳도 전혀 없었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영문도 모르게 적개심에 가득 차 자신을 쫓아다니며 돈을 요구하는 남녀도, 그녀를 두렵게 하는 부아야발도 다 별것 아니라고. 조만간 그들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집을 나서면 그는 다시 카페로 들어가 이번에는 타자 원고를 수정했다. 긴 밤이 온전하게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보스망스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지만, 남들 앞에서 소설가라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림이 있다. 그의 얼굴,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앉는 방식에서도 불안이 묻어났다. 그는 언제나 의자나 소파 가장자리에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마치 거기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곧 달아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키도 크고 몸무게도 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오버랩된다. 그는 언제나 미안해하는 사람의 느낌을 풍겼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미안해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인 채로. 그는 가끔 홀로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미안해? ? 살아 있다는 것이?

마르가레트는 언제나 남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과 격이 맞지 않을 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격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가끔 그립고, 어머니가 결혼한 자동차 정비사가 싫어 그녀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보석과 시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체육관 구내 식당에서 일하고, 찻집과 서점에서의 일을 거쳐 두 아이를 돌보는 보모 자리를 얻는다.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그녀의 삶은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하며 떠돌아 다닌다.  

"한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며 보스망스 앞을 걸어가는데 뒷모습이 마르가레트와 똑같다."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이 지난 뒤, 거리에서 그녀와 닮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꽃처럼 짧고 강렬했던 사랑이 예고 없이 끝나버린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보스망스는 파리 곳곳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의 자취를 찾아 다닌다. 이 작품은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을 끌어 모아 과거를 돌아보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짧은 만남들, 어긋난 약속들, 잃어버린 편지들, 오래 전 수첩 속에 적혀 있었지만 이제는 잊힌 이름과 전화번호들, 그리고 의식도 못한 채 마주쳤던 여자들과 남자들."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잃어버리곤 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마치 꿈결처럼 읽힌다.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타인과의 모든 첫만남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는 마르가레트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바로 그곳, 그 지하철 입구에서, 서로 맞부딪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파리 지도를 보며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하고 떠올려본다.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이게도, 다소 모호하게도 읽히는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에서도 빛난다. 파리의 곳곳을 마치 여행하듯이 누비는 기분으로 거리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스망스는 어떤 거리의 한쪽에서는 그가 젊었을 적 만난 사람들을 과거의 나이와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상상한다. 그곳에서 시간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 살고 있을 거라고.

어쩌면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끊임없는 희망이 지평을 넘어 그들에게 도달할지 말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의 통로들을 서로 겹치고, 얽히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나가고, 먼 훗날 기억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것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가끔은 나도 그처럼 기억 속에서 길을 잃어보고 싶다고 생각이 될 만큼,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어딘가에서 보스망스가 몰스킨 수첩 맨 뒤에 실린 작은 파리 지도를 들여다보며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길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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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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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2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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