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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한강의 서른한 개 다리 가운데 가장 투신자가 많아 한때 '자살대교'라고 불리기도 했던 마포대교 위, 누가 봐도 저 사람 저러다 투신자살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한 남자가 있다. 나이는 쉰 살이 넘어 보였으나 막 산골에서 걸어 내려온 소년 같은 인상의 한 남자. 그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었다. 투명인간이라니? 그는 어떻게 투명인간이 된 걸까? 이 작품은 김만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큰 머리에 비해 가느다란 몸통에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를 가지고 태어나 유독 몸이 허약했던 만수는 말도 늦고 매사에 이해가 더디지만 마냥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다. 재미있는 것은 숱하게 화자가 바뀌면서 여러 명의 등장 인물들이 등장해 만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만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입으로만 들려지는 한 인간의 삶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퍼즐처럼 한 조각씩 맞춰진다. 그의 가족을 비롯해 친구, 동료 등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김만수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챕터가 따로 나뉘어 진 것도 아니고, 인물 별로 화자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처음에는 스토리를 따라잡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만수야, 나는 점쟁이들을 믿지 않고 관상을 보지도 못한다만 그래도 네 얼굴이 유난히 크고 훤해서 멀리서도 잘 보이기는 한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 너는 웃어라. 소문만복해라, 웃는 집에 만복이 들어오고 일소일소 일노일로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느니라.
타고난 영특함으로 집안의 희망이었던 큰형 백수,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던 둘째 만수, 영리하고 악착같았던 셋째 석수, 큰누나 금희, 여동생 명희, 막내 옥희까지 육남매이다. 농사꾼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어머니와 누이들, 늘 만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동생.. 만수의 가족들은 어려웠던 그 시절 사람 냄새 나는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텔레비전도 전기도 없던 시절의 스토리는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도 낯선 시절이지만, 성석제 작가 특유의 입담은 마치 영상을 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이야기 속으로 이끌어준다.
명석함으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자상한 큰형은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로 인해 목숨을 잃고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면서부터 어려운 일들이 이들 가족에게 시련이 닥친다. 변두리 단칸방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누이들, 연탄가스 중독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에다 상경 이후 무능력한 술꾼으로 전락한 아버지를 대신해 만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만수는 관리직으로는 특이하게 생산직들하고 사이가 좋았다. 나도 인상 좋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만수 역시 늘 웃는 얼굴인 게 사람 좋은 하회탈을 연상케 했다. 그런 점 때문에 노무부 창립 멤버가 되면서 사년제 대졸 직원보다 빨리 승진해 과장대리가 되었을 것이다. 승진을 하고도 전처럼 여전히 생산직 사원들하고 형, 동생하며 지냈다. 구내식당에서 생산직들하고 섞여서 같이 밥을 먹고 식사 뒤에 족구도 같이 했다. 공장장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만수는 뭐든지 한가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 빛을 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에 빠져 사장마저 공장을 버려도 마지막까지 공장을 지키려 하고, 답답해 보일 만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사장대신 떠안게 된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끝없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매몰찬 외면뿐이었다.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 좋던 그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끝없이 희생했던 그가, 하루에 스무 시간 가까이 일하며 잠은 십 년 동안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본 날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그가,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하는 경우는 일년에 몇 차례가 될까 말까 한 그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까.
가끔 살다 보면 팍팍한 세상살이에 투명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경우가 생긴다. 보통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을 투명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저 끔직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사라져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극중에서 만수는 입고 있는 옷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카락 등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므로 그것에 과학적인 근거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 수도 있다. 죽는 게 낫겠다, 혹은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을 때, 혹은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을 때 투명인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는 게 아무리 끔찍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죽는 것 또한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생을 포기하지는 말자. 만수의 마지막 말,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 한 적이 없어요."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한번만 더 가보자. 한번만 더 만나고 한번만 더 맛보고 한번만 더 듣고 한번만 더 안아보자
그렇게 한번만 더 생각해보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