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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아마도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을 대하는 내 심정의 많은 부분은 내 인생의 그 시절과, 나쁜 습관도 모자라 멍청한 이론을 믿었으며 그나마 가끔 있었던 생산적인 침묵의 순간을 통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비로소 조금씩 알기 시작한 막 등장한 작가에 대한 평범한 향수에 젖는 것인 듯싶다. 젊은 친구들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결국 변화하리라는 것, 완성된 인물의 스틸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화, 움직이는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핀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작가라서 개인적으로 궁금했는데,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그의 작품은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길고 복잡한 문장과 지나치게 함축적인 단어들은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를 상당히 더디게 만들어주었다. 초기에 쓴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 작품을 쓴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4년에 출간한 것이라고 하며, 데뷔 장편이 나온 이듬해에 발표된 「은밀한 통합」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핀천이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들이라고 하니 거장의 풋풋한(?) 초기 작을 만나는 기쁨도 느껴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작가 서문이 무려 삼십 페이지 가까이 될 정도로 굉장히 긴데, 아무래도 습작 생 혹은 신인작가 시절에 쓴 수십 년 전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여야 하는 작가의 부담감 때문인 것 같다. 스스로는 그의 초기 단편들이 결합투성이에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처럼 밝히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들이 가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우며 무분별해 보이더라도 그 모든 결함이 있는 그대로 여전히 쓸모가 있었으면 하는" 그의 소박한 바램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충분히 그럴듯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긴 작가 서문에서는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나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가급적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작가 서문을 읽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작은 첨언'이라 칭하는 작가 서문은 작품 만큼이나 토머스 핀천이라는 작가의 성격과 작품 색깔에 대해 알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니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리조가 공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래, 향수병이라도 걸린 거야?" 러바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내 말은 폐쇄회로 같다는 거야. 모든 사람의 주파수는 다 똑같아. 그래서 잠시 뒤 나머지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잊게 되고 이것만이 중요하고 실재하는 유일한 주파수라고 믿기 시작해. 반면에 바깥에서는 대지의 위아래로 기가 막힌 색깔과 엑스선, 자외선들이 펼쳐지고 있어."
<이슬비> 중에서
이번 작품집에 담긴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는 "죽음, 고갈,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을 폐쇄회로, "쓰레기 폐기장, 엔트로피, 미국 교외, 묵시록적 종말" 등의 메타포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슬비>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청춘의 이야기인데, 러바인은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와 반복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 안주하려는 인물이다. 핀천은 그의 삶을 폐쇄회로와 같은 고립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로우랜드>의 플랜지 역시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벗어나려 하며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인물이다. 즉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거나, 혹은 별 의미 없이 반복적이고 단절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인물들인 셈이다. <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후 핀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다섯 편의 작품 중에 가장 난해(?)하다.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는 칼리스토와 아래층에 살며 친구들과 며칠째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멀리건의 모습이 번갈아 보여진다. 파티가 상징하는 무질서와 혼란, 온실이 상징하는 질서, 규칙 등의 갈등이 대비되는 이야기이다.
"새가 죽어가." 자기만의 세계를 물 흐르듯 거니느라 넋이 나가 있던 소녀는 온실을 가로질러 가서 칼리스토의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둘은 그렇게 가만히 일분, 그리고 이분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새의 심장박동은 끝까지 우아함을 유지하며 점점 약해지다 마침내 정적에 이르렀다. 칼리스토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계속 안고 있었어." 그 믿을 수 없는 일에 무력감을 느끼며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의 온기를 나눠주려고 말이야. 생명을, 혹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새에게 전달해주려 했어.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열 전달이 중단되기라도 했나? 더 이상..."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엔트로피> 중에서
소설집 제목인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여기 실린 다섯 편의 단편과는 상관없이 붙여졌는데, 작가로서 정점에 이른 중년의 소설가가 젊은 시절에 쓴 치기 어린 작품들을 되돌아보며 과거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물론 기나긴 작가 서문에서의 자기 고백이 정확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겸손인지는 이 작품집을 읽는 독자 각각의 몫일 것이다. 핀천이 대학 시절에 쓴 앞의 네 편과 달리 마지막에 실린 <은밀한 통합>은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뒤의 작품이라 그런지 읽기에 조금 수월한 느낌이다. 하지만 앞의 네 편도 핀천의 독특한 색깔을 맛보기에는 무리가 없지 싶다. 단, 끝까지 읽어내려면 조금의 인내가 필요하지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