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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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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백민석의 이번 소설집에는 신작 두 편과 십 년 전 이미 발표했던 작품을 다시 고쳐 쓴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우선 "10년 만에 돌아온"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자면, 신작 두 편에 대해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혀끝의 남자'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두 편이 신작인데, 전자는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후자에는 그가 글을 멈추게 된 과거의 정황에 대해 드러나있다.

 

나는 백 년도 더 전의 한 남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백 년도 더 전의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갔다고 했다. 장바닥의 구경꾼들은 그에게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으므로,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냐고.

우리를 두려워하냐고.

그런데 신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어제 누군가 신을 죽였다면 오늘 누군가 새 신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겐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신이 일억이나 된다.

-혀끝의 남자 중에서-

 

 

'혀끝의 남자'는 인도 여행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15년 전에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는데, 10년의 공백을 여는 작품으로 인도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도란 여타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순례라는 의미로 더욱 많이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아그라, 바라나시, 보드가야 등에서 뉴델리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은 일종의 개인적인 순례기로 보인다. 작년 한해 하루키를 시작으로 출판계에 마치 '순례' 열풍이라도 분 것처럼  많이 출간이 되었었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기 위해서 16년 만에 헤어졌던 네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한 순례를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레이첼 조이스의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에서는 20년 전 회사 동료의 편지 한 통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에선 주인공 리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속죄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김정남의 <여행의 기술>에선 아들과 함께 죽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두 색깔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과정이 어찌되었든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순례'란 보통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혀끝의 남자'에서의 나도 결국은 순례를 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도 여행을 거쳐서 다시 돌아온, 2013년의 서울 사당동에서 머리에 불을 붙인 채 혀 끝을 걷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신이 없는 삶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의 존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스스로 만들어낸 신일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혀끝이 종교의 발상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문장은 그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신작 두 편 외에 기존 발표 작들도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지금 여기의 시점으로 모두 고쳐 쓰여졌다고 한다. '신데렐라의 게임을 아세요?' '재채기' 정도만 술술 잘 읽혔지만, 사실 나머지 작품들은 한 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두어 번을 읽어야 했다. 여전히 어렵고, 통렬하고, 직설적인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작품은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문장의 맛이 더 살아나곤 한다.

 

그날 나는 벤치에 ' . ' 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이 감정을 띤 형태의 것은 아니었다. 딱히 슬픈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기본형 ' . ' 는 표정 없음이다. 정서적 반응이 없으니 표정도 없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중에서-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10년 전 그가 절필을 했던 상황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어조는 가볍지만,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도 나는 어딘지 ' . ' 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문장이 작가의 진짜 얼굴과 오버랩 되면서 자꾸만 웃음이 비져 나오고 말았다. 어쩜 이리 절묘한 표현이 있다는 말인가. 이모티 콘을 나도 문자든, 웹에서든 자주 사용하는 세대이지만, 사람의 표정과 그의 감정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구나 싶어 이모티 콘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그렇게 절필을 선언하게 된 그 무렵 그의 몸무게는 거의 백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해 있었고, 거의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한다. 기본형 ' . ' 에서 입까지 사라진 '  ' 가 되었다고.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여서, 그의 나머지를 살게 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시 글을 쓰기 위해서 10년 이라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와중에도, 책은 계속 읽었다. 왜냐하면 그는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도서관 소년이었고,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또 하나의 자신인 도서관 소년은 살아 남아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 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자신을 위해서도 더 이상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바래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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