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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이 열린 책들과 창비에서 각각 다른 번역자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눈먼 올빼미>가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으로 나란히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니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의사였던 작가 불가꼬프가 과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낸 기발한 작품이다.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니, 어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작품의 시작부터 너무도 독특하고 기발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극중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는 뇌하수체의 적응성에 대한 문제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유기체를 젊어지게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뇌하수체과 고환을 연결해 이식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주인 없는 개를 데려다, 부랑자의 시신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뇌하수체로 교체를 하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이마와 몸통 옆구리에서 털이 현저하게 빠지고, 개 짓는 소리가 멍멍 소리 대신에 아-오 음절로 바뀌고, 대단한 식욕을 보이더니 몸무게가 늘어나고, 웃고, 단어를 짖어 대는 지경에 이른다. 개가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개 샤리크가 아닌 인간 샤리꼬프가 된 것이다. 뇌하수체의 이식이 개를 젊어지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개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놀라운 대발견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커다란 사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은 하지만, 인간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욕을 하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인간처럼 먹고, 옷을 입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인간' 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그저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인간답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
그는 흥분하여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셨구먼! 동물을 잡아다가 칼로 머리를 길게 썰어 줄무늬를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싫어하고 경멸하신다 이거지. 나는 나를 수술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위로 치켜 뜨고, 마치 모종의 법률적 문구라도 회상해 내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내 친족들의 동의도 없었다고. 나는 민사상의 손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불가꼬프는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인간형을 풍자하고 사회주의의 허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물론 우리는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혹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을 이미 본 적이 있다.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 그리고 영화 <웨이백>, 조금 멀리 영화 <타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란 국가가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최초의 인간 실험장이었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 아파트에 거주하며 개인적인 생활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감시를 당하고, 불순분자로 찍히면 바로 노동수용소행이다. 따라서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고, 자연스레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 ‘속삭이며’ 살아야 했으니, 과연 사회주의 유토피아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불가꼬프는 개를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비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수술을 볼셰비끼의 파괴적인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마치 혁명의 부당함을 알리듯이 주인공 쁘레오브라젠스끼를 통해 전한다. 1925년에 쓰인 이 작품은 1988년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대체 인간처럼 변한 개는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영화 속의 '개 샤리크' 와 인간 '샤리꼬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소설에선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를 중심으로 수술을 하고, 관찰을 하면서 그의 심경 변화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인 부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산계급의 혁명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혁명의 목소리, 모두 방을 나눠가져야 하는데 박사 혼자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며 쳐들어온 이웃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이 사람의 형상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서류에 이름도 올리고 싶고 어쩌고 하면서 슬슬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교수는 창조가 아닌 또 다른 변형물인 개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중대한 실수였음을 직시하고..샤리꼬프(개인간)을 다시 샤릭(개)로 환원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마치 작가 자신이 당시에 저질러지고 있던 혁명의 소용돌이를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람 다울 때, 개는 개 다울 때가 가장 자신다울 수 있다. 각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를 거역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스러운 법칙과 순리가 있거늘, 국가에서 강제로 통제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평등은 부자연스럽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기발한 발상으로 풀어가는 한 편의 소동 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해보면 슬프고 무서운 작품이다.
소설을 읽고 내용 파악이 잘 안되거나, 이미지가 와 닿지 않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영화로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