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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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키나리의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버클리,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마르크스,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제임스, 듀이, 로티 등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지(知)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덕은 옳은 것이다. 그러니 옳은 것은 옳은 지식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나쁜 것임을 알고 행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다이모니온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다이모니온은 내면의 신 즉 마음속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이야기하는 영적 존재다. 철학의 역할은 지금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당연한 현실에 사고의 칼날을 들이대고, 때로는 상식을 초월한 논리를 가져와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33 페이지)

 

플라톤은 변화하는 현상과 변하지 않는 원리라는 두 입장을 모두 아우른 사람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다. 즉 가지적(可知的)인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삼각형을 손으로 그릴 수는 없어도 이성적인 능력으로 완전한 삼각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마음,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상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완전한, 영원한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사랑을 에로스라 한다.(38 페이지)

 

이데아가 영화 필름이라면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해당한다. 영혼은 이데아의 지식을 가지고 지금의 육체에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가 없어져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영혼에게 육체는 빌려 입은 옷과 같아서 임시로 잠시 머무는 숙소에 지나지 않는다.(39 페이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다. 그는 이데아는 개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체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상의 형태에 해당하는 것은 형상, 재료는 질료, 제작자는 작용, 완성된 동상은 목적(目的)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신은 선이고 궁극의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을 목표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 들면 이야기에 두서가 없어지고 비판이 늘어나고 부끄러움에 무뎌지고...“ 나는 어떤가? 두서가 없지 않다. ‘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체계를 갖추어 말하려 한다. 비판은 원래 많았다. 부끄러움에 무뎌진다는 것은 어떤가? 조금 그런 면이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에 민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리스도교의 틀을 통해 해석해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커다란 존재를 믿음으로써, 희망함으로써, 사랑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한다. 좁은 범위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교 교의를 이성의 힘으로 논증하고 체계화하는 대대적 과정에서 탄생했다.(73 페이지)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목표로 했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뛰어난 상대에게 다가가고 그 모습을 배우면서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편에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면 우리는 뜨겁다고 느끼지만 실은 차가운 것이라는. 우리는 속기 쉬운 존재다. 방법적 회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성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입장을 합리론이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래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흐름을 이었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기 거론되던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물체의 속성은 연장(延長), 정신의 속성은 사유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90 페이지) 데카르트는 정신의 속성인 사유의 자발성과 자유를 인정했지만 물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러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한 기계론과 결정론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은 연장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동할 힘을 갖지 않는다. 가령 당구대 위에 당구공이 있다고 해도 움직임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움직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처음에 공을 치는 힘이 필요하다. 데카르트는 이 역할을 신에게 부여했다.(96 페이지) 신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기에 물체 역시 항상성(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한 번 움직임이 시작되면 나머지는 영구히 운동한다. 데카르트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리스도교의 목적론에 입각한 철학과 다른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결정적 결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과 물체가 전혀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과 달리 둘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다양한 문제를 모조리 거부했다. 데카르트 이후에 남겨진 정신과 물체(물질), 기계론과 자유, 기하학적 정신과 종교적 정신 등의 분열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직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실체가 다양하게 표현된 결과다. 그러므로 세계는 얼핏 별개로 보이지만 실은 각자 어딘가는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바다라는 하나의 원리가 다양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과 우리 세계와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에 해당하며 신과 우리는 이어져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고 하나의 물체가 지닌 두 측면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과 육체는 항상 연동한다.(109 페이지)

 

그에 의하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우연은 없다. 이를 결정론이라 한다. 그러면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코나투스)가 있어서 수동성을 탈피하여 능동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인간을 성장시키는 신을 향해 이끌린다. 불행하다는 수동적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부터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至福)이 찾아온다.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백지 상태(tabula rasa) 같다고 설명했다. 로크는 우리의 마음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고 여기에 관념을 부여하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을 중시하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야말로 확실한 것이라는 견해를 인식론이라 한다.

 

버클리는 경험론의 두 번째 존재다. 흄은 경험론의 으뜸 권위자다. 칸트는 비판철학자다. 칸트는 처음에 합리론자였다가 흄의 회의론을 접하고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은, 선험적인 판단도 있다고 설명했다.(134 페이지)

 

칸트적 맥락에서 객관(서류)은 주관의 기능(정리 선반)에 의해 구성된다. 감성에 의해 대상이 부여되고 대상은 오성(悟性)에 의해 사유된다. 이를 이성이 크게 아우른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에게 이성, 신, 영혼, 자유, 우주의 끝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물자체(物自體; 인식되기 이전에 모습을 나타내는 본체; 147 페이지)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 능력이 경험 불가능한 것을 굳이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성을 비판했다. 칸트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이때만큼은 정확하게 지켜오던 일과인 산책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칸트가 ’에밀‘에 감동한 것은 그 책에 인간의 자율 정신, 자신을 제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자신의 이해나 욕망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명령에 걸맞은 행위를 했을 때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세계에도 법칙을 세웠다. 칸트는 그것을 도덕법칙이라 불렀다.(141 페이지) 저자는 헤겔 철학을 설명하며 세계는 착각의 총체로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한다.(149 페이지)

 

저자는 헤겔은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범신론자라고 말한다. 헤겔 철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란 스스로를 확산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셸링이 주장한 실존이란 개념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다. 그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인생은 이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의 문제에서 가장 최고의 경지를 종교에 두었다. 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연관시키는 것처럼 시간과 영원, 가능성과 필연성, 신체와 영혼 등 같이 있을 수 없는 모순된 존재들이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 단계의 실존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170 페이지)

 

니체는 진리란 그것 없이는 어느 특정한 종(種)의 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오류라고 말했다.(174 페이지)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주장한 철학자다. 이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생성의 원리를 말한다. 니체는 가치가 전도된 사상의 근원을 르상티망으로 보았다. 르상티망이란 증오나 복수심을 말한다.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플라톤주의도, 그리스도교도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를 전제로 성립된 것이므로 무(無)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매우 괴로운 삶을 보낸 사람이다. 대학 교수 지위에서 쫓겨난 데 이어 사랑에 좌절하였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친구도 잃었으며 만성적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니체의 삶 만큼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괴로움을 다시 한 번’이라는 의미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데카르트 철학 이후로 인간이라는 긍지는 그 이성적인 정신에 있었다. 이성은 사유의 정신이고 이는 곧 마음이므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이해할 수 있고 뭐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 역시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이에 상반되는 전제로 시작된 사상이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철학이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4 페이지)

 

후설은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소박한 태도에서 출발했다. 후설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를 괄호 안에 넣고 판단중지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를 세계의 스위치를 끄는 것(off)으로 표현했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있는 컵이 의식세계의 컵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순수하게 기술하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209 페이지)

 

후설은 모든 인식이 궁극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다양한 사실에서 유사성을 띤 하나의 본질이 간파된다. 본질 직관은 형상적 환원에 의해 추출할 수 있다. 후설은 자아로부터 타자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자는 자기로부터 유추된 제2의 타자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각각 독자적인 방법으로 타자에 관한 문제에 접근했다.

 

인식 작용을 노에시스, 인식 대상을 노에마라 한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노에시스), 사물(노에마)을 인식한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은 물체에 에워싸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상학적 환원 후에는 사물의 의미에 에워싸여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우리는 눈 앞의 컵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환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컵이 환각인지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한다. 거꾸로 어떻게 컵이 실재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는 것인지를 열거해나간다. 우리 각각은 자신이 의미부여하는 단계가 있고 나머지는 타자와의 공통된 이해를 얻으면 된다. 현상학은 상식적인 세계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의식이라는 무대에 무엇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현상학은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에 이르러 크게 성숙해간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도 현상학 분야에서 나름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했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환원의 생활(세계)에 대한 작용을 주장하는 후설의 후기 사상에서 출발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한 현상학적 환원의 목적은 주관과 객관의 도식을 폐지하고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며 타인의 경험까지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233 페이지)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동이라는 행위에서도 자유롭기 힘들다고 말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동물의 행동과 인간의 활동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하며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한다.(270 페이지) 맑스는 노동을 인간에 의한 물질적 생산 행위라고 인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노동력까지 상품화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하고 있다.(273 페이지)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rupture)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개념은 알튀세르가 바슐라르로부터 채용한 말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청년 맑스는 소외론에 가까운 문제 구성을 취하고 있었지만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는 그것을 방기했다고 한다. 사회가 관계의 총체라는 관점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등의 과학적 개념이 출현했다고 한다.(280 페이지) 알튀세르는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독립한 구조(중층 결정되는 존재)로 보았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에서 채택한 중층 결정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그때까지의 맑스주의에 반성을 촉구했다. 하나의 사건은 단일한 모순(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이질적인 모순(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경제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최종심급이고 정치나 문화 등의 상부구조에도 자율적인 시스템이 있어 그 자체 에너지에 의해 역사를 추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에 있는 복잡한 리비도가 분출해 의식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구조라 보았다.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적 측면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역사를 구조주의적으로 재인식했다. 알튀세르는 맑스 철학을 구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재구축했다.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애드립보다 대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파롤 즉 대화언어를 우위에 놓고 문자언어인 에크리튀르를 열등한 위치에 두었다고 설명하며 에크리튀르의 우위를 주장했다. 파롤은 타인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단순히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서구의 파롤 우선주의가 형이상학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책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나란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을 완성시킨 필자로서의 나일 뿐 자신의 방에서 끙끙거리면서 원고를 쓰는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을 쓰는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나라는 고정적 존재가 아니라 문자언어를 통해 증폭된, 시간적인 차이(원고지와 씨름하고 있을 때의 나와 완성된 책의 필자로서의 나 사이의 차이)를 살아가는 나라는 것이다.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29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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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에 자리한 라이너노트라는 음악 책 전문 서점을 티브이로 보았지요.(라이너노트; 음반 해설지) 대표는 박미리새라는 시크한 이름을 가진 여자 분이지요. 미리내(은하수)를 배경으로 해 새가 날아가는 태몽에서 비롯된 실재 이름이라네요.

 

오늘 조류학자(ornithologist)의 심정으로 사실상 첫 탐조(探鳥)길에 오르는, 그리고 서울 해설 코스를 구상하는 제게 영감으로 다가오는 동네고 서점이고 이름이네요. 어제 박씨 성을 가진 영민한 여자 영어 강사 분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꿈 작업에 속하는 응축과 치환을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오늘 아침 같은 박씨 성을 가진 세련되고 이지적인 분을 보게 되어 행복하네요. 참고로 피곤 탓인지 어제 저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꾸었는데 새가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꿈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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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급등 사유 없음 - 세력의 주가급등 패턴을 찾는 공시 매뉴얼
장지웅 지음 / (주)이상미디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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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급등 사유 없음’은 아주 전문적인 책이다. 저자 장지웅은 인수합병 분야의 전문가다. 저자는 이 책을 단순화시켜 접근한 책으로 소개한다. 어려운 용어를 알려거나 가르치려 하지 말고 어려운 용어들이 대략 어떤 의미인지 알면 족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한 요소만 따라가는 투자는 단기적인 운에 편승한 위험한 습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그리고 주가의 상승 이유는 찾기 쉽지만 주가가 왜 저점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머무는지, 어느 시점에 어떠한 이유로 저점에서 벗어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가 상승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식적인 근거를 나열하거나, 검증이 어려워 모호한 영역인 세력이라는 용어를 아무 종목에나 갖다 붙이는 경우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주식과 투자를 대하는 요령을 귀띔한다. 비유도 적절히 한다. 밀푀유나베, 사랑 등등...어떤가? 저자의 말은 가슴 아프기도 할 것이다. 가령 차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나만큼은 잃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은 결국 쓰디쓴 투자 실패로 되돌아온다는 말...

 

주식도 심리에 좌우되고 더구나 맹목적이기 쉽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냉정해야 한다. 세력 이야기도 하자. 세력들은 사전 작업을 위해 1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 입장(43 페이지)하고 세력주는 폭락장도 버틴다(48 페이지)는 말. 세력에게 있어 시너지나 경영은 아무 의미도 없고 누가 하든 상관 없고 오직 M&A를 수단으로 자본 차익을 챙기는 것이 목적이다.(69 페이지)

 

개인 투자자만 주가의 등락에 마음 졸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기는 길은 분명 있다.(71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과도한 망상과 자신감에 사로잡혀 복용법을 어기고 남용할 거라면 당장 이 책을 덮으라고. 그런 분은 평생 주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다른 용어는 모르더라도 메자닌 채권이란 말은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메자닌 채권이란 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메자닌)을 가진 채권이다. 메자닌이란 원래 이탈리아어로 건물 1층과 2층 사이의 라운지를 말한다.

 

이제 다시 세력 이야기를 하자. 세력이 종목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가총액의 규모다. 기준은 2천억이다.(89 페이지) CB(Convertible Bond; 전환사채)와 BW(Bond with Warrant;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한다고 해서 전부 세력주는 아니다. 핵심은 흐름 속에서 기회비용에 집착하는 세력의 통일성이 드러나는가에 있다.(103 페이지)

 

구체적인 예를 보자. 주당 1,000원에 거래되는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주가가 폭락해 담보가치가 떨어지니 채권자가 반대매매로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채권자가 회수도 안 하고 느긋하면 십중팔구 꿍꿍이가 있는 세력주다.(119, 120 페이지)

 

일반적인 자금 출처는 회사 유보금, 증자, 담보대출, CB나 BW, 주주출자 등 다섯 가지인데 세력은 어떤 방식을 택할까? 예상과 다르게 세력은 다소 생소하게 신사업은 보통 주식교환이나 교환사채를 발행해 추진하고 신규투자는 보유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133 페이지) 저자는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먼저 소개한 뒤 독자들의 주식 투자에 대한 다양한 이해도를 고려하여 세력의 작전 시나리오를 큰 그림에서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모두(冒頭)에서 전문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단순화시켜 접근했다는 말처럼 설명을 쉽고 상세하게 해준 덕분에 스토리텔링을 대하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는 설명한 이야기를 큰 무리 없이 잘 따라오고 있다면 다시 탄탄한 스토리로 머릿속에 정리해보자고, 가치투자나 보수적인 투자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주의하고 피해야 할 패턴을 확실히 숙지하는 기회로 삼길 권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세력들은 금감원 앞에서도 당당할 만큼 진화한다.(195 페이지) 안심스럽게도(?) 저자는 세력이 실패하는 여섯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전부 옮기기보다 두 가지를 든다면 그 하나는 기존 대표이사나 최대주주가 실권을 내놓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대표이사와 최대주주가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 있을 때다.(202 페이지)

 

책 제목처럼 저자는 ‘아무도 모른다. “주가 급등 사유 없음”’이란 말을 한다. 테마나 재료가 붙어서 주가가 급등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밖에서 바라보는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다. 중요한 말을 보자. “주식시장이란 테마와 명분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 가격이라는 숫자로 바로 환원되는 신기한 곳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처음 주식을 접했을 때 대표이사나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으면 욕심 없고 착한 사람이고, 그런 리더가 이끄는 회사라면 분명 직원들이 신바람 나게 일하도록 해줄 것이고, 실수해도 눈감아주는 가족 같은 회사일 것 같았고, 당연히 충성스러운 직원들도 많아 실적 역시 아주 좋으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주식시장 무서운 줄 몰랐던 시절이라고 말한다.(223 페이지)

 

주식과 관련된 소문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식에 발을 담근 이라면 구구절절 사연이 많을 것이다. 주식 이야기 중 세력과 작전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 흥미로운 소재다. 영화 같은 배신 이야기를 사람들은 특히 재밌어 한다.(235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세력이란 부정적이고 불법적인 의미의 세력도 있지만 주로 합법적인 M&A 판을 만드는 세력이다.(236 페이지)

 

종결부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주식 관련 책을 몇 권 읽지 않은 가운데 ‘주가급등 사유 없음’은 가장 인상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잘못된 상식에 함몰되어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준다는 의미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영화 이야기를 한다. ‘아수라‘, 절박하고 비루한 인간들의 삶이 모여들어 끝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스토리의 영화다.

 

“세력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아수라의 한복판으로 말려 들어간다.”(293 페이지) “M&A와 세력에게 있어 개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시세차익을 만드는 건 번외편일 뿐이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거래 담당자 등 수많은 관계에서의 수 싸움이 본편에 가깝다. 결국 세력도 별 수 없는 비루한 인간이기에 각개 전투로 몸부림치고,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혈투를 벌이며 살아간다.”(295 페이지)

 

참으로 드라마틱한 말이다. ’세력보다 지저분한 마귀라는 존재’라는 챕터를 보자. 세력은 최대한 자본시장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며 시장의 규칙을 따른다. 마귀는 법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대신 책임을 뒤집어씌울 바지사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귀가 조직폭력배 부류는 아니다. 마귀 중에는 사채업자가 많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마귀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마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실형을 받지 않도록 세팅을 해놓았다거나 형을 살더라도 그 이후를 책임져줄 만큼 큰 금액을 제시하는 등의 약속이다.

 

“검찰이 구형의 기준으로 삼는 자본시장법은 애매한 부분이 정말 많다. 그래서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도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미공개정보이용, 시세조종, 주가조작, 시장질서 교란, 자금유용, 횡령, 배임 등 자본시장법 관련 위반 사례가 현실에서 뚜렷하게 입증되는 경우는 드물다.(318 페이지)

 

저자는 다시 시작이니 모든 시장참여자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며 이제부터는 세력에 당하지 말고 당신이 돈을 위해 세력을 고용하는 투자자로 건승하길 응원한다고 말한다.(331 페이지) 참 독특한 책이고 교훈적인 책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차근한 마음으로 다시 읽어야겠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주식 관련 전문가가 결코 아니지만 저자의 내공을 보니 나도 도 한 번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어림 없는 일이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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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길상사(吉祥寺), 종로 대각사(大覺寺), 파주 보광사(普光寺), 경주 불국사(佛國寺), 화성 용주사(龍珠寺), 영월 법흥사(法興寺)...지금껏 해설한 여섯 사찰이다. 종로 청룡사(靑龍寺)를 해보고 싶다. 허경(虛鏡) 스님이 수행하다 82세로 입적한 동망산 자락의 사찰이다. 시누이의 시댁(해주 정씨의 남양주 진전읍)에 묻힌 비운의 인물이다.

 

조카(시누이의 아들) 정미수(鄭眉壽)의 간청을 받아 그를 시양자(侍養子)로 삼은 것이 그나마 아름답고 마음 훈훈하게 다가온다. 허경 스님이 시누이의 시댁의 선산에 묻힌 것 역시 정미수의 덕이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이 분이 궁에서 나올 때 따라나온 여인들 모두 스님이 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세력편에 서지 않고 연산군편에 섰다는 이유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씨가 연산군의 비였기에 쫓겨난 고모 폐비 신씨를 친정에서 만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지난 번 영월 시간에는 청룡사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정순왕후가 궁에서 나올 때 따라나온 후궁 권씨는 허경(努鏡)이라는 법명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努’가 허로도 읽히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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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엔 산사에 간다 - 막힌 일상을 확 풀어줄, 자연주의 도심 산사 20곳
여태동 글.사진 / 크리에디트(Creedit)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몇년째 서울 (중심의) 문화 해설을 하다 보니 몇 가지 예기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해설 포스트의 대부분은 종로구의 장소들이고 나머지는 중구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산사(山寺)라는 말에 걸맞게 대부분 산에 있는 사찰은 해설 포스트로 삼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성북을 하며 길상사를 포함시킨 적이 있고, 종로를 하며 대각사(大覺寺)를 포함시킨 적이 있다. 지방의 경우 파주 시간에 보광사를, 경주 시간에 불국사를, 화성 시간에 용주사를, 영월 시간에 법흥사를, 철원 시간에 도피안사를 포함시켰을 뿐이었다.

 

여태동 저자의 ’점심시간엔 산사에 간다‘는 내게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이동 도선사에서 홍은동 옥천암까지 모두 서울의 사찰, 그 가운데서도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란 점이다. 책에서 다루어진 사찰은 모두 20곳으로 내 고충과 달리 종로나 중구 외의 곳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찰 한 곳만을 해설할 수도 있지만 대개 두 시간을 하는 문화 해설에서 사찰 특집이 아닌 이상 책에서 소개된 사찰만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해당 사찰 주변의 문화 유산이나 유적지를 시간을 고려해 포함시켜야 한다. 물론 현대적인 건축물을 할 수도 있고 서울 미래유산을 포함시킬 수 있다.

 

스무 곳의 사찰 가운데 한 번이라도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은 견지동 조계사, 성북동 길상사, 정릉동 봉국사 등 세곳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알게 된 이래 사숙(私淑)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런 염(念)으로 존경했던 일지(一指) 스님이 지난 2004년 45세의 세수(歲首)로 입적(入寂)하신 갈현동 수국사는 특별히 관심이 간다.

 

책의 특징은 각 사찰의 시작 부분에 사찰의 개략적 정보와 길 안내가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점심 시간엔 산사에 간다‘는 출간된 지 13년이 넘었는데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은 저자가 종로 우정국로에 소재한 전법회관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던 불교신문 기자로 있을 때 나온 말이니 종로 중심가에서 점심 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고 관건은 ’전철 또는 지하철에서 어디’라는 말이다.

 

강북구 우이동을 주소지로 한 도선사(道詵寺)는 북한산의 남쪽 지역에 자리한 사찰이다.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어서 도선사다. 의아한 것은 삼각산 도선사라는 현판이 있음에도 북한산 도선사라 소개한 것이다.

 

두 번째 사찰은 견지동 조계사(曹溪寺)다. 너무 유명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우정국과 수송공원이 있다. 수송공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정국 건물 구석에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 있다.

 

세 번째 사찰은 상도동 사자암(獅子庵)이다. 이 사찰은 광화문 양편에 불을 잡는 해태를 세우고 숭례문을 지어 불기운을 막고자 한 것처럼 비슷한 목적으로 지은 사찰로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기운을 누르고자 사자 형상을 한 곳에 세웠다. 이를 비보(裨補)사찰이라 한다.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것만이 아니라 강한 기운을 제하는 것도 비보다.

 

네 번째 사찰은 수유동 화계사(華溪寺)다. 숭산 스님이 주석했던 인연으로 외국인들이 찾아와 수행하는 국제적 선원이다. 화계사 앞에 한신대학원이 있다.

 

다섯 번째 사찰은 갈현동 수국사다.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수국사(守國寺)다. 세조가 일찍 죽은 아들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를 위해 지은 사찰로 정인사(正因寺)라 불리다가 경종이 아버지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明陵)의 사찰 이름을 가져와 수국사라 했다.(경종 1년) 본문에 내가 이야기한 일지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이 반승(半僧), 반속(半俗)의 모습으로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섯 번째 사찰은 진관외동 진관사(津寬寺)다. 비구니 스님들의 주석처다. 일곱 번째 사찰은 진관외동 삼천사(三千寺)다. 조선시대에 3000명이 수행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삼천사란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했다. 임진전쟁 당시에는 스님들의 집결지였다. 서울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여덟 번째 사찰은 정릉동 심곡암(深谷庵)이다. 저자는 자신이 심곡암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지 스님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했듯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큰 복이다.

 

아홉 번째 사찰은 정릉동 경국사(慶國寺)다. 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암사(靑巖寺)라 불리다가 조선 명종 5년 문정왕후가 나라에 경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로 개명했다. 임진전쟁 당시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가 머물며 승병을 지휘한 사찰이다. “경국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초록 요새다. 그래서 절에 들어서면 안온하다. 어지간한 구중심처보다 더 깊은 맛을 자아내는 사찰이다.”(125 페이지)

 

열 번째 사찰은 구기동 승가사(僧伽寺)다. 구기동(舊基洞)은 종로구에 속한 동이다. 구기동 이북 5도청이 있는 버스 종점에서 내려 아래로 10여미터를 내려오면 승가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열한 번째 사찰은 성북동 길상사(吉祥寺)다. 책에 소개된 사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김영한(자야, 길상화 보살) 신도와 백석 시인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법정 스님 사연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소유를 덜어내는 궤적으로 설명한다.(149 페이지) 경내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최종태씨가 화강암으로 만들어 봉안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열두 번째 사찰은 신촌 봉원사(奉元寺)다. 전통 불교 의식인 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靈山齋)를 보존하고 있는 근본 도량이다. 신라말 도선 국사가 반야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고 고려말 태고 보우가 중창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삼존불을 조성하였다.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고 봉원사라는 현판도 내렸다. 사람들은 이후 봉원사를 새 절이라 불렀다. 신촌(新村)이란 이름도 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열세 번째 사찰은 구기동 금선사(金仙寺)다. 승가사에 이어 다시 만나는 구기동의 사찰이다. 고려말 또는 조선초 무학대사가 지었다고 알려졌다. 이 절은 정조와 수빈 박씨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순조를 낳은 분이 수빈 박씨다. 농산 스님이 순조로 환생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스님을 핍박하던 폐단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이 일로 매년 음력 6월 18일 순조의 탄신제가 열린다. 목정굴에서 정진하던 농산 스님이 앉은 채 열반에 들었고 굴 안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았다. 저자는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맞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본문에는 세옹지마라 나온다.)

 

의빈 성씨가 사망한 후 수빈 박씨가 후궁이 되었는데 이는 홍수 때문이었다. 화평옹주(사도세자의 친 여동생)의 남편이자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박명원(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은 못생기고 철없는 자기 딸 대신 홍수 때문에 집을 잃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먼 친척 박생원의 딸을 후궁 간택에 내보낸 것이다.(수빈 박씨; 순조 어머니. 의빈 성씨; 문효세자 어머니.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

 

열네 번째 사찰은 삼성동 봉은사(奉恩寺)다. 봉은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판전(板殿)이 있다. 저자는 판전을 보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가 한승원 작가의 소설 ‘추사’를 읽고 자세를 달리 했다고 말한다. “봉은사에 가면 꼭 봐야 할 나무가 있다.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부도전 옆 경사면에 서 있는 산사나무다. 수령만해도 200년이 훨씬 넘은 이 나무는 가을이면 엄지 구슬만한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한자로는 산사목(山査木)이다.”(191 페이지)

 

열다섯 번째 사찰은 흑석동 달마사(達磨寺)다. 서달산의 사찰로 돌이 많아 서덜서덜 다녔다고 해서 서덜산이라 불리기도 했다.(서덜: 냇가나 강가 따위의 돌이 많은 곳, 생선의 살을 발라내고 난 나머지 부분. 뼈, 대가리, 껍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열여섯 번째 사찰은 구의동 영화사(永華寺)다.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절이다.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해 화양사(華陽寺)라 불렀다. 아차산에는 이름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온달과 관련한 것이 하나, 조선 명종 때 홍계관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다.

 

열일곱 번째 사찰은 정릉동 봉국사(奉國寺)다.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후 무학대사가 비보사찰을 세웠다. 현종(숙종 아버지)이 태조의 두 번째 비 신덕왕후의 묘를 능묘로 정한 후 명복을 비는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하고 나라를 받는다는 의미의 봉국사라 불렀다.

 

사찰 중심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영락전(靈樂殿)이 있다. 봉국사의 중심 건물은 만월보전(滿月寶殿)으로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어머니 품 같은 산사 분위기를 전해주는 건물은 광응전(光膺殿)이다.

 

열여덟 번째 사찰은 숭인동 청룡사(靑龍寺)다. 종로구 숭인동 17 - 1 번지에 자리한 사찰이다. 단종과 비(妃) 정순왕후 송씨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사찰이다.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곧바로 난 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청룡사가 나온다. 청룡사 한켠에 정업원구기가 있고 앞에 동망봉이 보인다.

 

청룡사를 끼고 왼쪽으로 오르면 원각사가 나온다. 그 옆 복원된 초가 뒤뜰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왕대비에서 대역죄인이 된 정순왕후는 더는 수강궁에 머물 수 없어 삼각산 청룡사로 향했다. 정업원(淨業院)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죄업을 참회했던 정순왕후는 궁 밖으로 나서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정업원은 처음에는 내불당(內佛堂)이라 불렸으나 유생들이 항의를 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정업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궁을 나선 정순왕후는 청룡사에 머물렀다. 청룡사에 하룻밤을 보낸 단종은 다음날 정순왕후와 헤어져 한맺힌 유배길을 갔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을 다리까지 배웅했다. 이 다리는 후세에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 불렸다. 정순왕후는 청룡사 지진 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정순왕후에게 영빈전이란 작은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허경 스님은 끝내 거부하고 청룡사에서 기거하며 82세까지 살았다.

 

정순왕후는 입적 후 단종의 누나인 경혜 공주의 시댁인 정씨 집안의 묘역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사능리에 묻혔다.(‘사릉; 思陵‘)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정순왕후가 동망봉(東望峯)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며 동정하는 곡을 했다.

 

열아홉 번째 사찰은 삼성암(三聖庵)이다. 150년 정도된 사찰이다.

 

스무 번째(마지막) 사찰은 홍은동 옥천암(玉川庵)이다. 자하문(紫霞門) 지나 세검정(洗劍亭) 지나 흰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이다. 1990년대만 해도 생활 폐수로 검은 물이 흘렀고 연희동으로 빠지는 홍제천(弘濟川)은 먼 옛날 옥처럼 맑은 물이 흘러 옥천이라 했다. 이 계곡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옥천암에는 하얀 관세음보살이 마애불(磨崖佛)로 새겨져 있다. 조선 태조도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했다고 한다.(25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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