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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ㅣ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평점 :
토마스 아키나리의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버클리,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마르크스,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제임스, 듀이, 로티 등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지(知)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덕은 옳은 것이다. 그러니 옳은 것은 옳은 지식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나쁜 것임을 알고 행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다이모니온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다이모니온은 내면의 신 즉 마음속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이야기하는 영적 존재다. 철학의 역할은 지금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당연한 현실에 사고의 칼날을 들이대고, 때로는 상식을 초월한 논리를 가져와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33 페이지)
플라톤은 변화하는 현상과 변하지 않는 원리라는 두 입장을 모두 아우른 사람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다. 즉 가지적(可知的)인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삼각형을 손으로 그릴 수는 없어도 이성적인 능력으로 완전한 삼각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마음,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상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완전한, 영원한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사랑을 에로스라 한다.(38 페이지)
이데아가 영화 필름이라면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해당한다. 영혼은 이데아의 지식을 가지고 지금의 육체에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가 없어져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영혼에게 육체는 빌려 입은 옷과 같아서 임시로 잠시 머무는 숙소에 지나지 않는다.(39 페이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다. 그는 이데아는 개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체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상의 형태에 해당하는 것은 형상, 재료는 질료, 제작자는 작용, 완성된 동상은 목적(目的)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신은 선이고 궁극의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을 목표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 들면 이야기에 두서가 없어지고 비판이 늘어나고 부끄러움에 무뎌지고...“ 나는 어떤가? 두서가 없지 않다. ‘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체계를 갖추어 말하려 한다. 비판은 원래 많았다. 부끄러움에 무뎌진다는 것은 어떤가? 조금 그런 면이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에 민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리스도교의 틀을 통해 해석해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커다란 존재를 믿음으로써, 희망함으로써, 사랑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한다. 좁은 범위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교 교의를 이성의 힘으로 논증하고 체계화하는 대대적 과정에서 탄생했다.(73 페이지)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목표로 했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뛰어난 상대에게 다가가고 그 모습을 배우면서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편에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면 우리는 뜨겁다고 느끼지만 실은 차가운 것이라는. 우리는 속기 쉬운 존재다. 방법적 회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성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입장을 합리론이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래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흐름을 이었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기 거론되던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물체의 속성은 연장(延長), 정신의 속성은 사유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90 페이지) 데카르트는 정신의 속성인 사유의 자발성과 자유를 인정했지만 물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러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한 기계론과 결정론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은 연장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동할 힘을 갖지 않는다. 가령 당구대 위에 당구공이 있다고 해도 움직임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움직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처음에 공을 치는 힘이 필요하다. 데카르트는 이 역할을 신에게 부여했다.(96 페이지) 신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기에 물체 역시 항상성(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한 번 움직임이 시작되면 나머지는 영구히 운동한다. 데카르트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리스도교의 목적론에 입각한 철학과 다른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결정적 결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과 물체가 전혀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과 달리 둘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다양한 문제를 모조리 거부했다. 데카르트 이후에 남겨진 정신과 물체(물질), 기계론과 자유, 기하학적 정신과 종교적 정신 등의 분열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직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실체가 다양하게 표현된 결과다. 그러므로 세계는 얼핏 별개로 보이지만 실은 각자 어딘가는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바다라는 하나의 원리가 다양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과 우리 세계와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에 해당하며 신과 우리는 이어져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고 하나의 물체가 지닌 두 측면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과 육체는 항상 연동한다.(109 페이지)
그에 의하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우연은 없다. 이를 결정론이라 한다. 그러면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코나투스)가 있어서 수동성을 탈피하여 능동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인간을 성장시키는 신을 향해 이끌린다. 불행하다는 수동적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부터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至福)이 찾아온다.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백지 상태(tabula rasa) 같다고 설명했다. 로크는 우리의 마음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고 여기에 관념을 부여하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을 중시하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야말로 확실한 것이라는 견해를 인식론이라 한다.
버클리는 경험론의 두 번째 존재다. 흄은 경험론의 으뜸 권위자다. 칸트는 비판철학자다. 칸트는 처음에 합리론자였다가 흄의 회의론을 접하고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은, 선험적인 판단도 있다고 설명했다.(134 페이지)
칸트적 맥락에서 객관(서류)은 주관의 기능(정리 선반)에 의해 구성된다. 감성에 의해 대상이 부여되고 대상은 오성(悟性)에 의해 사유된다. 이를 이성이 크게 아우른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에게 이성, 신, 영혼, 자유, 우주의 끝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물자체(物自體; 인식되기 이전에 모습을 나타내는 본체; 147 페이지)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 능력이 경험 불가능한 것을 굳이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성을 비판했다. 칸트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이때만큼은 정확하게 지켜오던 일과인 산책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칸트가 ’에밀‘에 감동한 것은 그 책에 인간의 자율 정신, 자신을 제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자신의 이해나 욕망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명령에 걸맞은 행위를 했을 때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세계에도 법칙을 세웠다. 칸트는 그것을 도덕법칙이라 불렀다.(141 페이지) 저자는 헤겔 철학을 설명하며 세계는 착각의 총체로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한다.(149 페이지)
저자는 헤겔은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범신론자라고 말한다. 헤겔 철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란 스스로를 확산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셸링이 주장한 실존이란 개념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다. 그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인생은 이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의 문제에서 가장 최고의 경지를 종교에 두었다. 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연관시키는 것처럼 시간과 영원, 가능성과 필연성, 신체와 영혼 등 같이 있을 수 없는 모순된 존재들이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 단계의 실존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170 페이지)
니체는 진리란 그것 없이는 어느 특정한 종(種)의 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오류라고 말했다.(174 페이지)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주장한 철학자다. 이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생성의 원리를 말한다. 니체는 가치가 전도된 사상의 근원을 르상티망으로 보았다. 르상티망이란 증오나 복수심을 말한다.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플라톤주의도, 그리스도교도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를 전제로 성립된 것이므로 무(無)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매우 괴로운 삶을 보낸 사람이다. 대학 교수 지위에서 쫓겨난 데 이어 사랑에 좌절하였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친구도 잃었으며 만성적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니체의 삶 만큼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괴로움을 다시 한 번’이라는 의미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데카르트 철학 이후로 인간이라는 긍지는 그 이성적인 정신에 있었다. 이성은 사유의 정신이고 이는 곧 마음이므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이해할 수 있고 뭐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 역시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이에 상반되는 전제로 시작된 사상이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철학이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4 페이지)
후설은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소박한 태도에서 출발했다. 후설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를 괄호 안에 넣고 판단중지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를 세계의 스위치를 끄는 것(off)으로 표현했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있는 컵이 의식세계의 컵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순수하게 기술하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209 페이지)
후설은 모든 인식이 궁극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다양한 사실에서 유사성을 띤 하나의 본질이 간파된다. 본질 직관은 형상적 환원에 의해 추출할 수 있다. 후설은 자아로부터 타자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자는 자기로부터 유추된 제2의 타자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각각 독자적인 방법으로 타자에 관한 문제에 접근했다.
인식 작용을 노에시스, 인식 대상을 노에마라 한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노에시스), 사물(노에마)을 인식한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은 물체에 에워싸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상학적 환원 후에는 사물의 의미에 에워싸여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우리는 눈 앞의 컵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환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컵이 환각인지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한다. 거꾸로 어떻게 컵이 실재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는 것인지를 열거해나간다. 우리 각각은 자신이 의미부여하는 단계가 있고 나머지는 타자와의 공통된 이해를 얻으면 된다. 현상학은 상식적인 세계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의식이라는 무대에 무엇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현상학은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에 이르러 크게 성숙해간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도 현상학 분야에서 나름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했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환원의 생활(세계)에 대한 작용을 주장하는 후설의 후기 사상에서 출발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한 현상학적 환원의 목적은 주관과 객관의 도식을 폐지하고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며 타인의 경험까지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233 페이지)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동이라는 행위에서도 자유롭기 힘들다고 말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동물의 행동과 인간의 활동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하며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한다.(270 페이지) 맑스는 노동을 인간에 의한 물질적 생산 행위라고 인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노동력까지 상품화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하고 있다.(273 페이지)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rupture)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개념은 알튀세르가 바슐라르로부터 채용한 말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청년 맑스는 소외론에 가까운 문제 구성을 취하고 있었지만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는 그것을 방기했다고 한다. 사회가 관계의 총체라는 관점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등의 과학적 개념이 출현했다고 한다.(280 페이지) 알튀세르는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독립한 구조(중층 결정되는 존재)로 보았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에서 채택한 중층 결정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그때까지의 맑스주의에 반성을 촉구했다. 하나의 사건은 단일한 모순(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이질적인 모순(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경제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최종심급이고 정치나 문화 등의 상부구조에도 자율적인 시스템이 있어 그 자체 에너지에 의해 역사를 추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에 있는 복잡한 리비도가 분출해 의식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구조라 보았다.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적 측면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역사를 구조주의적으로 재인식했다. 알튀세르는 맑스 철학을 구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재구축했다.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애드립보다 대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파롤 즉 대화언어를 우위에 놓고 문자언어인 에크리튀르를 열등한 위치에 두었다고 설명하며 에크리튀르의 우위를 주장했다. 파롤은 타인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단순히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서구의 파롤 우선주의가 형이상학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책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나란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을 완성시킨 필자로서의 나일 뿐 자신의 방에서 끙끙거리면서 원고를 쓰는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을 쓰는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나라는 고정적 존재가 아니라 문자언어를 통해 증폭된, 시간적인 차이(원고지와 씨름하고 있을 때의 나와 완성된 책의 필자로서의 나 사이의 차이)를 살아가는 나라는 것이다.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29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