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사서 쌓아두고만 있는 책이 많은데 읽을 것이 없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가 명리학과 주역을 공부해 관련 논문을 쓴 정신과 의사 양창순 님의 '명리심리학'을 골랐다. 지리멸렬한 내 독서 상황을 반영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

 

물론 작년 가을 책을 샀을 때는 분명 생각이 있었다. 단지 무료해서 책을 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명리학과 주역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고 썼다. 맞다. 흐지부지 상태인 내 주역 공부에 활로를 만들어내려는 뜻에서 책을 산 것이었다.

 

책 내용 중 이런 구절이 있어 옮긴다. 우울해서 병원을 찾아와 놓고 우울증 진단이 내려지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힘들어 하는 내담자들이 있다는 내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마음과 세상사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오늘 2021년의 첫 서평 책으로 선택해 게시한 '글쓰기의 모험'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모든 글에는 그 글의 외부가 있으며 쓰기 역시 행위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글 바깥의 요소 즉 글 쓰는 이를 둘러싼 삶과 사회적 맥락을 포괄한다. 글쓰기가 단지 글 내부만을 향할 때 더 이상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 어렵고 글은 블랙홀처럼 죽음을 향한다."(148, 149 페이지)

 

요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이진경 교수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새해의 두번 째 날로 벌써 빠른 시간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곧 본격 스타트를 할 생각이다. 요즘 내가 잘 하는 것은 오래 오래 밥을 씹어 먹는 것이니 이런 호조(好調)도 분명 본격 스타트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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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모험 -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
황산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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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글쓰기의 모험’은 파스칼, 니체, 블랑쇼, 바르트, 사르트르, 벤야민, 들뢰즈, 데리다 등 여덟 명의 철학 거장들에게서 건져올린 글쓰기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여덟 철학자는 현대 철학의 거장들이다. 이 철학자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현대적 글쓰기를 배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황산의 이 책은 글쓰기의 요령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고 현대적 글쓰기의 기본이 되는, 파스칼에게서 비롯된 논리적이고 명료하고 간결한 글을 먼저 염두에 둘 것을 주문하는 책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파스칼에게서 비롯된 근대적 글쓰기 방식을 익히되 그것을 넘어서는 글을 써야 한다. 저자도 언급한 바이지만 자신이 호명한 여덟 철학자는 대부분 프랑스 철학자(파스칼, 블랑쇼, 바르트, 사르트르, 들뢰즈, 데리다)이거나 프랑스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 철학자(니체, 벤야민)들이다.

 

니체는 완성품으로서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예술의 특성 때문에 천재 신화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43 페이지) 니체는 천재성이나 위대한 작품은 수공업적 성실성의 결과라 보았다.(44 페이지) 니체는 자기의 체험이 반영된 진짜 자기 글을 쓸 것을 주문했다. 니체는 규정적인 질서나 체계에 묶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과 고유한 차이를 지녀야 하고 두려움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늘 새롭게 발견할 때 새로운 자신만의 방식의 글을 쓸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말한 초인을 글쓰기로 말하자면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경계를 넘어서며 언제나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감행하는 자라 할 수 있다.(54 페이지)

 

블랑쇼는 글쓰기는 글 쓰는 이로부터 펜을 앗아가는 절망 속에서만 그 근원을 갖는다는 말을 했다. 물론 저자는 지독한 불행이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식으로 블랑쇼를 오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혹한 시련이나 칠흑 같은 밤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겸허하게 출발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77 페이지)

 

‘사랑의 단상’의 저자인 롤랑 바르트에게 글쓰기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랑의 주체는 불안정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우 순박한 텍스트를 쓴다.(92, 93 페이지)

 

사르트르는 작가란 세계의 실상을 드러내고 그 드러냄을 통하여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고 보았다.(105 페이지) 사르트르에게 작가는 창조자 즉 신과 같은 존재다. 사르트르에게 창조적 과정은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는 자기 구원의 경험이자 성스러운 행위였다. 일상 가운데 행해지는 구도 행위이자 종교적 의례 같은 것이었다.(108 페이지)

 

사르트르 글쓰기론의 또 다른 특징은 타자를 위한 글쓰기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란 작가의 자유와 독자의 자유가 만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조물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작가가 독자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는 신중함과 존중의 태도다.(116, 117 페이지)

 

벤야민은 아이들 세계의 규범들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은 벤야민의 예술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메시스 개념과 연결된다. 인간 특유의 미메시스 능력으로서 유사성 관계가 조성되는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현상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다.(127, 128 페이지)

 

벤야민은 비평의 기능은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순수예술의 가면을 벗겨내고 예술의 중립적인 터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131 페이지) 비평은 환기시키는 힘이자 살리는 힘이다.(132 페이지) 벤야민은 서평을 비평의 중요한 영역으로 생각했다. 저자는 서평가들이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책들만 다루게 되면 정작 다루어야 할 작품들이나 글들은 배제되어 버린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게 작품에 대해 비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나 다루어야 할 중요한 작품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비판은 해야 하는 과제는 언제든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비평은 텍스트 너머의 콘텍스트 전체를 비평하는 것이라 말했다.(134 페이지)

 

벤야민은 최고의 읽기를 필사(筆寫)로 보았다. 벤야민에 의하면 필사는 도보여행, 단순한 읽기는 비행기 여행이다. 벤야민은 좋은 비평은 비평적 주석과 인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인용 역시 아무런 창조성의 개념이 없는 편집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의 어떤 부분을 발췌하는 데에도 발췌자의 관점과 시선이 담겨 있으며 인용문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에도 인용자의 관점과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인용 본문의 선택 자체가 창조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 자체가 비평이다.(138 페이지) 일상 가운데 소소한 것들을 모아 쉼 없는 작업을 거쳐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는 일, 이것이 글쓰기다.(144 페이지)

 

질 들뢰즈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오직 하나의 꿈만 추구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글쓰기와 삶을 구분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이는 자신의 삶에 주목해야 하고 삶의 경험 속에서 글을 길어올려야 한다.(151 페이지) 들뢰즈는 배치를 다르게 하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문학의 새로운 배치를 고안하고 실험하라고 요청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저자는 주어진 배치 안에서만 글을 쓴다. 작가는 새로운 배치를 고안하고 새로운 배치 관계로 들어가 다양한 것들과 공명하며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이다.(152, 153 페이지) 창조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들뢰즈편에서 논의되었다. 창조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65 페이지) 들뢰즈는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 나 자신을 차이 나는 새로운 나로 만들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168 페이지)

 

데리다는 글을 쓰는 것이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작가의 부재를 강조했다. 작가의 부재란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가 사라진다는 말이다.(180 페이지)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작가 자신에게 귀착하는 글쓰기를 지양하라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바는 글을 통해 어떤 의미나 사상을 전달하려 하기보다 그냥 흔적을 남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쓰고 독자가 작품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냥 문지기로 남기로 마음 먹으면 편하다는 것이다.(186 페이지) 데리다는 유령(幽靈)론의 발원지이다. 유령이란 사본(寫本)의 세계를 말한다.(저자는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은 칸트의 숭고, 벤야민의 아우라, 라캉의 실재, 들뢰즈의 ‘정동; 情動; affect‘과 유사한 것이라 말한다..정동이란 말보다 ’감응; 感應’이 어떨지?)

 

데리다는 이 세계를 본질, 근원, 기원이 없고 차이만이 드러나는 사본의 세계로 보았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자기답게 쓰는 것, 자기답게 사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만의 글을 쓰는 것이다.(196 페이지) 삶과 글쓰기가 하나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저자는 글쓰기란 사랑하는 일이라 말한다.(214 페이지)

 

‘글쓰기의 모험’은 글쓰기의 기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글쓰기의 의미, 본질 등을 제시한 책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 여덟 철학자의 사상을 잘 정리해 지침과 연결시킨 책이다.

 

자기 글을 쓰고 매일 쓰고 사람의 삶이 담긴 따뜻한 글을 쓰라는 말 등이다. 책 전편을 통틀어 내게 가장 시사적인 말을 만났다. 그것은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재료의 구성이 새로운 것이다.”란 파스칼의 말이다.

 

이 말에 내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에 따라 다른 사람의 글을 재배치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란 말이다. 인용 본문의 선택 자체가 창조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 자체가 비평이라는 벤야민의 생각도 내게는 크게 반가운 지침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중요한 말은 삶(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가는 것)은 글쓰기와 같다는 말이다. 그 두 영역(삶과 글쓰기)이 잘 조응하도록 애쓰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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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에 힘들었지만 해설과 글쓰기 등과 관련해서는 가장 좋은 해였던 2020년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천자문에 나오는 미단숙영(微旦孰營)이란 구절이다. ()은 주()나라의 주공(周公) 단을 지칭하고 미()는 작을 미로 많이 쓰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아니라면이란 의미로 쓰였다. ()은 누가라는 의미다.

 

그러니 미단숙영이란 주공 단이 아니라면 누가 경영하겠는가?란 말이 된다. 경영이란 개인 차원이든 단체 차원이든 어려운 일이다. 계획은 내실(內實) 있지 못했고 실천은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 내 2020년이었다. 올해는 다를 것이다. 장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에 신경을 쓰는 정도가 지난 해보다 다르기에 희망적인 2021년의 벽두(劈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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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해 동안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글자는 무엇일까? 2음절 이상은 생각나는 것이 없고 1음절 단어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평(平)이란 글자다.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지난 11월 고석정(孤石亭), 마당바위, 송대소(松臺沼), 직탕폭포(直湯瀑布) 등 철원의 지질공원 코스에서 평화(平和)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나름으로는 잘 대처했다고 자평하며 말한 바를 소개하면 송대소의 적벽(赤壁)에서 “적(赤)이란 글자가 있지만 한자에는 이 글자 외에 붉음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더 있지요. 단(丹), 주(朱), 홍(紅), 자(紫) 등이지요.. 공자(孔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붉은 색(‘주; 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했지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평화란 섞였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서 배제해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일방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요. 이 이야기가 오늘 제가 평화를 주제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지요. 조화를 지향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란 말을 한 것이다.

 

이제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에 대해 이야기 하자. 2019년의 일이니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이유로 말하려는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2019년 9월 2일이 내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일이다. 하지만 이 날은 그저 자격증을 받았을 뿐이니 정식 데뷔일이 아니다. 내가 지질로 첫 해설을 한 것은 2020년 1월 3일이다.

 

2019년 9월에서 1년이 넘은 2020년 11월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만날 오리산과 680미터 고지가 있는 평강(平康)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지질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느냐?” 물론 이는 나를 겨냥해 나온 말이 아니었다.

 

시위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원뜻과, 이에서 나아가 방법만을 가르치고 스스로 핵심을 터득하게 함을 이른다는 수사(修辭)로 쓰이는 것까지 두루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란 말이 있지만 전기한 분은 그 지침을 그르친 것이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내가 시연한 좌상바위 지질 해설을 주의깊게 들은 분이었다.

 

그랬으니 내가 아우라지 베개용암, 백의리층, 재인폭포 등을 50만년전에서 10만년전 사이에 오리산 등에서 분출해 흘러온 용암으로 만들어진 명소들이라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불가피하게 언급했지만 짧게 필요한 부분만을 다룬 것임을 알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평강에 대해 잘 모른다. 수십만년전 화산 분출로 연천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북한 강원도 평강군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지질학자들과 해설사들, 그리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아우르는 당사자들이다. 이제 같은 평(平)자가 들어 있는 평양의 한 궁궐에 대해 이야기 하자.

 

평강처럼 공교롭게 같은 평(平)이란 글자를 쓰는 이 도시는 당연히 평양(平壤)이다. 평양에는 풍경궁(豊慶宮)이란 궁궐이 있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경복궁을 확장해 짓기까지 한 고종은 평양에 360칸이나 되는 풍경궁이란 행궁(行宮;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특진관 김규홍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 아뢰자 고종은 짐은 벌써부터 이에 대하여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중신(重臣)이 상소를 올려 논하였으니 이제 평양에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백성들이 시의적절하지도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토목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뜻으로 신문고를 치자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아 생긴 현상이라 답한 임금이었다. 그에게 평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종에게 평양은 관서(關西)의 요충지이기에 방비를 강화해야 하므로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경운궁 즉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우측에 전각이 있었으나 1904년 원수부 폐지 이후 건물이 헐렸음)로 하여금 평양 친위대를 재편하라고 명한 곳이었다.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평양에 지은 행궁인 풍경궁은 자혜의원으로 전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멸실(滅失)된 뒤 현재는 그 터에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 평강의 오리산과 평양의 풍경궁(터)...두 곳 모두 갈 수 없는 가운데 평강은 일반인들(예컨대 소이산에 오르는 분들)에게 익숙한 반면 풍경궁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남한 지역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원수부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교과서에 실렸는가 여부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시설이든 인물이든 사건이든 무슨 맥락에서 알게 되는지가 관건이다. 망국 군주(무능함과 무책임함, 반민중적 등)로서의 고종이 주제가 아니니 짧게 말하자면 오늘 주제로 이야기 한 풍경궁은 고종의 어이 없는 허식(虛飾)을 말하는데 필요한 시설이다.

 

연천에는 장수왕(5세기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임금)의 평양 천도가 계기가 되어 축성된 호로고루가 있다. 우리는 연천이 한국전쟁 이전 북한 지역이었다가 수복된 곳이라는 데에 안도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 북한 지역이 아니기에 호로고루를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감사하게 된다.

 

평(平)은 의미 있는 뜻들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 고르게 하다, 가지런하게 되다, 편안하다, 무사하다, 이루어지다, 바르다, 갖추어지다, 사사로움이 없다, 화목하다 등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단어는 올해가 아닌 내년에 더 필요한 단어다. 평화(平和)란 입('구; 口')에 밥(’화; 禾‘)이 고루(’평; 平’) 들어가는 것이라 파자(破字)해 말하곤 하지만 2021년의 나에게 평화(平和)의 시작은 음식을 평탄하게, 그리고 울체(鬱滯)되지 않게 먹는 것이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나는 올해보다 더 좋은 내년을 염원하며 마음이 평온한 와이제너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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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암석(巖石)인 맨틀, 액체인 외핵, 고체인 내핵 등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맨틀은 망토(cloak)라는 말에서 비롯된 말로 바깥 부분을 뜻한다. 한글 자판으로 설정하고 cloak을 입력하니 ‘치ㅐ마’라는 글자가 된다. 재미 있는 글자다.

 

ㅐ에 해당하는 o를 빼고 한글로 설정한 뒤 clak를 입력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관련 단어가 결과로 도출되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clak(으)로 검색하시겠습니까?란 문구가 떴을 뿐이다. cloak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로 프랑스어에서 온 manteau가 있다.

 

어원학은 모르지만 맨틀과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단어를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그것은 아니고 정리를 위해 수고를 감수한 것일 뿐이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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