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즈음에 - 우리 시대 인문학자 김열규의 마지막 사색
김열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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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즈음에>의 출간소식에 김열규교수님께서 지난해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곁들여져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아흔 즈음에>가 유고집이 된 셈입니다. 노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 <메멘토 모리; http://blog.joins.com/yang412/4271393>, <노년의 즐거움; http://blog.joins.com/yang412/12373810> 등을 통하여 그를 만나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남는 것 같습니다. ‘더 오래 사셔서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어야 하는데’ 하는...

 

유고집이 되고 말았지만, 저자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는 와중에도 나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농익는 목숨 기운’이라는 제목의 여는글에 “새벽녘 해돋이에 맞겨룰 저녁노을 같은 마무리로 아흔이 내일모레인 여든 넘은 나이를 가다듬고 싶다. 아니, 싶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13쪽)”라는 희망을 담으셨던 것이겠지요. 이렇게 시작한 글은 ‘나이가 든다는 것’을 시작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글쓰기에 기대어’, ‘그리운 시절’, ‘함께 산다는 것’, ‘자연의 품에서’로 이어지면서 아흔을 목표로 한 인생살이를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정리해내신 것 같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나이 든 사람들 누구나 인생살이에 유종의 미를 꽃피우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13쪽)”라고 여는글을 마무리하신 것을 보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묵직한 무엇을 남겨주시려고 말입니다. 그것도 타계하시기 하루 전까지도 말입니다. 어쩌면 타계하시기 하루 전에는 “내일, 모레, 글피쯤이면 아흔이 될 이 나이에 마음만은 어김없이 나무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소슬하되 다소곳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225쪽)”라고 마무리하신 닫는글을 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유족들이 고인의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원고가 바로 이 유고집이라고 합니다. 생전에는 미처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선친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글들을 묶어 <소운집(嘯雲集)>이라는 제목으로 488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소운은 선친께서 쓰시던 호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자식이 넷이나 되다보니 걱정하실 일이 끊임없이 생기곤 한 삶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남기신 글들은 대부분 평소에 자식들이 바른 생각과 행동을 가지도록 당부하시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제가 술을 많이 줄였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점은 인정을 하시면서도 술을 이기지 못하는 저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49재를 지내는 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금주하면서 선친께서 남기신 유고를 정리하였고, 49재를 올리는 날에는 유고집을 영전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일찍 별도로 써두셨던 것으로 보이는 사세(辭世)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당신께서 살아오신 날들을 정리하시면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1. 우리 가문(家門)에 대한 긍지(矜持)를 가져라, 2. 근면역행(勤勉力行)하여 질소검약(質素儉約)하게 살아달라, 3. 부모에 효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4. 제가제일주의(齊家第一主義)로 하라, 등입니다. 이 리뷰를 쓰면서 다시 읽어보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기에 조만간 따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열규교수님의 영애께서는 추모의 글에서 병중에 계신 어머니의 병구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는 냉정하다고 느껴온 선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었습니다. “엄마에게 헌신하고 몸을 낮추는 아버지는 내게는 작은 경이감의 대상이 되었다. (…) 여든이 넘은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엄마 수발을 드셨다.(235쪽)” 김열규교수님의 모습과 제 선친 모습이 꼭 겹쳐 보이는 것을  보면 옛날 분들은 마음속에는 뜨거운 사랑을 품고 계시면서도 정작 밖으로는 내보이는 것을 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선친께서도 어머니를 당부하시는 대목을 이렇게 남기셨습니다. “애비 기세(棄世) 후에 홀로 남을 너희 모친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온다. 어떠한 전생의 인연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나 (…) 오늘날 이만큼 우리 가정이 성장한 것도 너희들 어머니의 피나는 내조의 공이라 생각한다. (…)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은 마음 편하고 복되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더 써 달라.”

 

평소 따님께 “우리 각자 열심히 일하자”라는 교수님 말씀은 릴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로댕이 비서로 일하는 릴케에게 “언제나 오직 일하라!”고 당부했다는 부분을 읽고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체코출신인 릴케가 로댕을 만난 것은 27세 때였고, 당시 로댕은 62세로 명성의 절정에 올라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릴케는 프라하에서 전시 중이던 로댕의 제안으로 1905년 9월15일부터 1906년 5월12일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했다고 하는데, 당시 릴케는 영감이 떠올라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자신과는 달리 로댕은 작업을 통하여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릴케는 로뎅을 통하여 “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화가나 조각가처럼 자연 앞에서 일하며 대상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미술평론가 유경희님은 전하고 있습니다.(경향신문 2013년 9월 16일자 기사, ‘[유경희의 아트살롱] 릴케와 로댕의 섬세한 인연’) 그리고 보면 저 역시 잡문 한 줄을 쓸 때도 머리 속에 무언가 퍼뜩 떠오를 때까지 뭉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생각을 구슬려 가다듬다보면 좋은 글이 써진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자가 남긴 말씀들을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즈음이야 주변에서 예순 넘은 분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저자는 “예로부터 예순 살 이상은 특별한 나이로 쳐왔다. 살 만큼 산, 아니 그러기를 넘어선 나이로 치부해왔다.(21쪽)”라고 적어 예순 나이를 특별하다고 하였습니다. 금년에 예순을 맞는 제 입장에서는 저자의 말씀대로 특별한 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그 이유는 팔순을 갓 넘긴 저자가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친 이유가 “마침내 하늘을 찌르는 태산준령의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이다. 아흔, 곧 구순을 당당하세 들먹일 수 있는 나이에 다다랐다. 으쓱대고 싶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다. 우쭐대고 싶기도 하다.(17쪽)”고 적은 것처럼 예순을 넘어야 칠순, 팔순, 그리고 구순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이들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순이 넘으면 그동안 해오던 일을 정리하고 한 걸음 물러서 여생이나 즐기라는 은근한 강요가 느껴지는 나이입니다만, 여생(餘生)이 마치 쓰다 말고 남은 생애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완전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 <노트북; http://blog.joins.com/yang412/3857206>은 시작부분에서 아름다운 황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강 위로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석양과 붉게 물든 저녁놀을 향해 말없이 노 젓는 남자. 미끄러지듯이 좌우로 갈라지는 물결. 소용돌이를 지는 잔물결을 밀어내는 노.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머리 위를 비상하듯 날갯짓하며 따르는 하얀 백조. 이 배가 도착하는 곳은 강변에 우뚝 서있는 새하얀 집. 그 집의 창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백발의 할머니..... 어둠이 내리는 황혼을 향하여 나아가는 보트는, 치매환자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할아버지의 심정을 그리는 것으로 보인다.” 여생을 굳이 여광(餘光)과 비교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생각처럼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제일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여유가 있는 여생이 더 아름답고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일에서 물러나게 되면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만, 바로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하겠습니다.

 

두 번째 화두는 ‘죽음’입니다. 저자는 이미 <메멘토 모리>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을 “사람의 목숨 그 자체에 관련되어서 직설적으로 쓰이는 죽음이란 낱말은 기피하면서도,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직접적으로는 없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련되어서는 은유법 도는 과장법의 테두리 속에서 죽음이란 낱말을 심하게 과용하고 또 남용하고 있음을 위의 보기 등을 통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목숨에 관련된 죽음의 낱말이 극단적으로 기피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데 대한 역설적인 사례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김열규지음, 메멘토 모리, 72쪽, 궁리, 2001년)”라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아흔 즈음에>에서는 “죽음이 마지막 결의이고 도전이게 해야 한다. 머지않아 구순을 내다보는 나로서는 더한층 그래야 할 것이다.(79쪽)”라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화두는 글쓰기입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고 하면 흔히 책읽기도 어려운데 글쓰기까지 해야 하느냐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그것을 ‘일’, 즉 ‘노동’으로 생각하면 괴로운 법입니다. 세상만사를 ‘일’이 아닌 ‘재미’로 하게 되면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자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까지도 글을 쓰셨던 것처럼 글쓰기를 ‘괴로운 일’이 아니라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기셨다고 합니다. “글쓰기와 짓기는 잘만 되면 창작이 될 것이다. 잘만 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 남다른 생각을 비로소 지어내는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85쪽)”라고 적었습니다. 책을 읽고 느낀 무엇을 그냥 나열하다보면 생각이 생기고 그렇게 생긴 생각을 정리해가다 보면 글짓기가 점점 쉬워진다는 느낌이 생길 것입니다. 요즈음 나이 드신 남자 분들이 아내의 치맛자락에 껌처럼 붙어 다니려고 해서 눈칫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아내가 외출할 때는 쿨하게 다녀오라 하십시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혹은 영화를 보고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하다보면 벌써 아내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는 어떻게 했느냐는 조금은 미안함이 배어있는 인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따로 또 같이 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함께 산다는 것’에서는 작가께서 터득하신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고유의 정(情)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1959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로 가수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의 2절의 마지막 대목, ‘유정 천리 꽃이 피네, 무정 천리 눈이 오네’를 인용하여 “유정도 그렇고 무정도 그렇듯이, 우리의 정은 끝이 없을 것이다. 캐고 또 캐고 풀고 또 풀어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157~8쪽)”고 적었습니다. 노래 <유정천리>는 그때 당시에 학교도 다니지 않는 꼬맹이였던 제가 배워 회식자리에서 부르실 노래가 마땅치 않으시다는 선친께 가르쳐드렸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묘한 것은 미운정도 정이라고 하는데, 요즈음은 황혼에 이르러 그 정을 단칼에 잘라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들 합니다. 저자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쌓는 정에 더하여 나이가 들수록 이웃이 소중해지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남들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람다워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사람됨이 제대로 갖추어지는 것(168쪽)”임을 깨닫게 합니다.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과 극한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른 요즈음 세태에 꼭 새겨들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화두는 ‘자연’을 꼽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과의 관계를 넘어 자연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자는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되살펴 본 셈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함께 성장해온 저자가 은퇴하고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살아내셨다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하여 “바다며 산, 자연을 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보다 더한 삶의 축복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188쪽)”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바닷가를 거닐고, 또 다른 하루는 산길을 걸을 수 있는 저자의 고향은 천혜의 고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물로 멱을 감고 그리고 산에서는 바람에 멱을 감을 수 있으니 구순에 드실 수 있었을 터인데 혈액암이라고 하는 병마에 붙잡히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이신 곽진석교수님께서도 추모의 글에 적은 것처럼 아직도 받아야 할 가르침이 남아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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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버그 - 공정한 판단을 방해하는 내 안의 숨겨진 편향들
앤서니 G. 그린월드 & 마자린 R. 바나지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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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이 한참일 때의 고민 가운데는 저의 생각이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반대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논리적으로 검토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습니다. 이런 경향을 인지적 편견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런 경향은 1. 착각하는 자아, 2. 억측에 가까운 예측, 3. 어설픈 경험, 4. 허점투성이 논리, 5. 관성화된 습관 등 다양한 심리적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 http://blog.joins.com/yang412/12899785>을 통하여 공부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편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인드버그>는 이러한 인식의 편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사회적 맥락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해온 앤서니 G 그린월드와 마자린 R 바나지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태도를 측정할 수 있는 IAT (Implicit Association Test, 내재적 연관검사)를 개발하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편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Blindspot(맹점)입니다. 눈의 망막에 흩어져 있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들로부터 나온 신경다발이 뇌로 향하기 위하여 망막에서 빠져나가는 장소를 이르는데, 이곳에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도달하는 빛은 뇌의 시각영역에서 인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좋은 사람들의 숨은 편향’입니다. 저자들은 이러한 편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숨은 편향이란) 사회 집단에 대한 ‘지식 조각들’이다. 이 지식 조각들은 뇌에 저장된다. (…) 숨은 편향은 일단 정신 속에 자리 잡으면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을 향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영향을 전혀 모른다.(15쪽)” 저자들은 우리말 제목 <마인드버그>는 “뿌리 깊이 박힌 사고 습관이 사물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추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일으킨다는 의미(24쪽)”를 담은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인드버그는 인류가 환경적 압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사회적 선택의 기제로 발전시켜온 것이라는 진화론적 설명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마인드버그’의 정체와 작동원리, 마인드 버그가 개인에 미치는 영향, 마인드 버그 찾기와 다루기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마인드버그가 이성적 사고의 해안선을 침식하고 더 나아가 정당하고 생산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침식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적 정신과 회적 행동에 격차가 발생하는 근원에 자리 잡은 마인드버그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46쪽)”인 것입니다. 제3장에서는 내 안에 숨겨진 마인드버그를 찾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이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는 IAT입니다. 처음 제시되는 문제는 곤충과 꽃 그리고 기분 좋은 단어와 기분 나쁜 단어들을 각각 두 그룹으로 묶어서 표시하는데 처음에는 곤충과 기분 좋은 단어 그리고 꽃과 기분 나쁜 단어로 각각 같이 묶어서 표기하고, 이어서는 조합을 바꾸어서 곤충과 기분 나쁜 단어 그리고 꽃과 기분 좋은 단어를 각각 같이 묶어서 표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의 테스트를 시행하면서 소요되는 시간을 초 단위로 재서 비교해보면 두 번의 테스트가 유의하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검사에 응하는 사람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편향적 사고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검사에는 기억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기억은 저마다 질감을 갖고 있고, 우리는 감촉으로 비단의 질을 판단하듯 기억을 ‘느낌’으로써 그 질감을 판단한다. 이름에 대한 익숙함은 기억에 특정한 질감을 부여한다. 유명하지 않지만 낯익은 서배스천 바이스도르프 같은 이름의 경우 이런 익숙함이 혼동을 불러온 것(160쪽)”이라고 합니다. 즉 최근에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유명인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인드버그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하여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채점을 할 때 이름을 가리는 것과 같이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표시를 가리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제한점이 있습니다. 내일이면 개막하는 동계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피겨스케이팅시합의 채점방식이 마인드버그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방향의 마인드버그가 작동해서라도 우리나라의 김연아선수가 좋은 성적으로 우승을 거두기를 기대합니다.

 

저자들은 마인드버그를 속이는 효과적인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일상적인 내집단의 선호에 따라 의도치 않게 외집단이 불이익을 겪는 것이 가장 골치 아픈 일이이라서 부제에 들어 있는 ‘좋은 사람들’에는 이와 같은 숨은 편향이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파악하여 편견을 배제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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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수학 -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
EBS 문명과 수학 제작팀 지음, 박형주 감수 / 민음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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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수학이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수학이 인류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졸업을 했습니다만, 두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수학적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수학을 전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라는 부제가 달린 <문명과 수학>은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에서 기획한 방송프로그램 <문명과 수학>을 제작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방송제작팀이 만든 책답게 중요한 사실 중심으로 잘 요약되어 서술적으로 적고 있어 마치 방송을 시청하는 것처럼 쉽게 읽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방송화면을 통하여 소개된 다양한 그림들을 같이 볼 수 있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야기는 1858년 스코틀랜드의 고고학자 헨리 린드가 이집트의 룩소르 시장에서 사들인 한 장의 파피루스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완전한 탐구, 모든 존재에 대한 통찰, 모든 비밀에 대한 지식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쓴다.” 이 문건은 견습서기들을 위한 기하와 산술문제집이었다고 하는데, 삼각형, 사각형, 사다리꼴, 원 등 도형의 넓이와 원기둥, 피라미드의 부피를 구하는 법 그리고 단위 분수의 계산과 일차 방정식 풀이 등을 포함해서 모두 84개의 문제를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중학교 다닐 때 배웠던 수학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 배운다는 것 같습니다. 이집트 시대의 수학은 지금처럼 정교하지는 않지만 거의 4천년 전에 지금의 수학으로 얻는 결과에 아주 근접하는 답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실용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용적인 방법으로 간략하게 접근하던 수학이 사고를 통하여 논리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그리스 시대의 피타고라스(B.C. 580?~500?)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가 ‘증명’을 통하여 수학적 법칙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피타고라스학파가 ‘학문이 가미된 고대의 신비종교집단’ 같았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불멸과 윤회를 믿었고, 채식 위주의 금욕적인 생활로 육체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했다.(61쪽)”라고 하니 논리적이었다는 학자들이 엉뚱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피타고라스학파를 중심으로 꽃을 피운 수학은 유클리드(BC 330~BC 275)에 의하여 정리되는데, 그가 쓴 <원론> 안에는 모두 23가지의 정의를 담고 있고, 유클리드는 이 정의를 이용해서 증명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저자는 유클리드의 원론에 입각하여 정삼각형을 그리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삼각형을 그리는 방법을 한 번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저자가 삽입해놓은 그림을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클리드는 증명을 마친다음에 언제나 Q.E.D.라고 적어 넣었다고 하는데, 이는 Quod Erat Demonstrandum라는 라틴어 낱말을 줄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은 ‘이로써 증명되었다.’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직역하면 ‘이것이 보여져야 할 것이었다.(70~71쪽)’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로마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인도의 수학과 결합하여 새롭게 진화하는 과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현대수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인 숫자 0의 개념이 있습니다. 숫자 0에 대하여 이 책을 감수하신 포항공대의 박형주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기묘한 숫자 0이 유럽 수학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용된 건 이제 겨우 500년 남짓 밖에 안된다.(21쪽)” 박교수님은 <문명과 수학>이 바빌로니아 문명이 빠져있고 특히 중국문명이 다루어지지 않은 점 등, 수학의 발전에 기여한 모든 문명을 뒤져낸 것이 아니라는 제한점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이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책으로 만들게 된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학은 대입 수능 시험의 중요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피타고라스가 세계의 근원을 묻고 진리를 탐구하던 영역으로서의 수학은 점점 퇴색해 가고 있다. 수학의 현실은 현대의 모든 학문이 처한 위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신비를 캐고, 진리를 알아 나가는 즐거움, 학문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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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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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이 지나면서 갑오년이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갑오년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60갑자가 일주하여 태어난 해의 간지를 다시 맞게 된 것입니다. 제가 갑오년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언젠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써오던 일기를 읽어보고는 너무 치졸하다싶었던지 모두 내다버린 적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적고 있는 글들도 나중에 읽어보면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쓴 것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결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변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같은 모습으로 남는 듯하다.”는 줄리언 바지니의 말에 공감하게 될 것 같습니다.(줄리언 바지니 지음, 에고 트릭, 10쪽, 미래인, 2012; http://blog.joins.com/yang412/12873764) 자아를 가지고 있는 생물, 즉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바지니의 말에는 자아의 두 가지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이렇듯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개인의 관심 수준에서 머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수준으로, 그리고 우주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는 우주의 시원과 종말에 관한 과학적 연구성과를 정리한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43832>와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59055>가 다루는 스케일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우주생물학자이며 아리조나대학교 천문학의 크리스 임피교수는 이 책들을 통하여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우주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고, 역시 누구도 볼 수 없을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고 있어 읽는 이의 호기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원과 종말은 천체물리학의 발전으로 이제 예측이 가능한 범주에 들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오히려 인간의 시작을 더듬어보는 일이라던가 인간의 종말을 예측하는 일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도 있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대상을 조금 넓혀서 지구생물들의 발자취를 짚어보고,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볼프 슈나이더는 ‘인류는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유엔 환경계획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지구를 파헤치고 덧붙이고 유린하고 있다. 더 심각한 일도 저지른다. 인류는 마지막으로 남은 자원과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우려 때문에 그동안 인류가 해온 일들을 정리하고, 이러한 진단이 틀렸기를 희망하면서 우울한 미래를 내다보기도 합니다.(볼프 슈나이더 지음, 인간 이력서, 12쪽, 을유문화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296412) 그래서 저는 이런 작업들이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생존을 위한 자기점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고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난 시간에 비하면 인류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오랜 과거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아있는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쌓인 방대한 자료를 해석하는 시각이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을 세운 에드워드 윌슨교수의 <지구 정복자>는 ‘사회성’이라는 화두로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목에 넣은 ‘정복’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볼프 슈나이더 역시 <인간이력서>에서 “지구는 우리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굴복시켰다. 더위, 추위, 사막, 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복했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칫 오만해 보이는 ‘정복’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윌슨교수가 <지구정복자>에서 “인간은 생명의 역사에 출현한 다른 어떤 종과도 달리 생물권을 정복하면서 황폐화시켜왔다. 인간이 해 온 짓을 볼 때, 인간은 정말로 독특하다.(23쪽)”라고 적고 있는데서 인간을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지구 파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섞인 반어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라기보다는 “지구에서 우리 인간은 우세종에 해당된다.”(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 지음,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571쪽, 사이언스북스,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2597810)라는 생각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윌슨 교수의 <지구정복자>로 돌아오면, 이 책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담은 다윈의 진화이론으로는 어렵던 생물들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해온 영국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적합도 이론’을 버리고 ‘집단선택’이론으로 회귀하는 논점들을 담고 있습니다. 윌슨교수는 장대익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곤충의 복잡다단한 생태를 더 깊이 연구하면서 혈연선택보다 생태적 요인이 진사회성의 진화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중앙일보, 2013년 11월 30일자 기사, [책과 지식] 다윈이 몰랐던 것 … 진화의 원동력은 협력(http://blog.joins.com/yang412/13282842)”라고 변화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윌슨교수의 입장변화는 진화학계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고 하는데,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살짝 던져 놓을 게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져야 할 책이다. 정말 유감이다.”라는 서평을 남겼다고 합니다. 진화학계를 뜨거운 논쟁으로 몰아넣은 윌슨교수의 주장을 음미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자는 독특하게도 불운한 화가 폴 고갱의 삶을 요약하면서 그가 남긴 명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 그대로도 이 책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고 보입니다만, 윌슨교수는 ‘고도의 사회생활은 왜 존재하고, 그토록 드물게 출현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진화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열망을 늘 품고 있던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에 정착해서 원시주의(primitivism)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고 인간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의 깨달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 작품은 제가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유럽미술전시관을 수리하면서 닫고 있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아쉽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79810).

 

정영숙 시인은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적으면서 “이 그림은 우리에게 인생의 근원과 행로에 대해 생각게 한다. 그러나 많은 미스터리가 담긴 이 작품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정영숙 지음,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읽기, 155쪽, 이담출판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21741)이라고 했습니다. 화가는 이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가며 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림은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 배치한 복잡한 듯 얽힌 넓고 깊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군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조금 뒤로 물러나 원죄와 사후세계를 담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중앙에서 오른쪽 뒤편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볼 수 있고, 이들의 원죄로 태어나는 아이가 맨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하고 잠자는 아기에게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가 짊어지고 태어난 원죄의 고난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중앙에 양손을 위로 올려 사과를 따고 있는 인물은 개인의 자아인식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은 지혜를 얻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서 사과를 먹고 있는 아이와 생기가 느껴지는 젊은 여인, 그리고 늙은 여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늙은 여인은 어둡게 표현하고 있지만, 눈동자에서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중앙에서 왼쪽 뒤편에는 푸른색으로 채색된 우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후세계의 여신 히나를 표현한 것으로 그림이 완성되고 있습니다.

 

윌슨교수는 인간진화의 원동력을 ‘혈연 이기성’ 보다 ‘사회성’에 두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의 전공분야이기도 한 곤충학의 연구성과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장류도 마뜩치 않을텐데 곤충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만, 지구의 다른 사회적 정복자들, 즉 고도로 사회학적인 개미, 꿀벌, 말벌, 흰개미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얻은 결과가 인류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것이 인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사회성 진화 전체를 살펴보면, 인과관계로 연결된 두 현상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패턴이 뚜렷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 현상은 육상 환경에 서식하는 동물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 체제를 갖춘 종들이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은 진화적으로 볼 때, 그런 종들이 아주 드물게 출현했다는 것이다.(137쪽)” 진사회성 동물로는 인간과 약2만종의 곤충이 알려져 있는데, 개미, 벌, 말벌, 흰개미가 대부분으로, 약 100만종에 달하는 곤충 중에서 겨우 2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제 집단 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개별집단의 특성이 서로 섞이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인데, 곤충류들의 집단은 어느 정도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지, 집단 간의 교류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어 사회성이라는 유사성만으로 직접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패턴은 지금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곤충사회의 문명패턴의 발전양상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자는 1부에서 ‘사회성’이라는 수수께끼를 설명하고, 이어서 2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서는 인간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지난 반 세기동안, 침팬지와 갈라져 나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원동력으로 포괄적합도라는 집단 수준의 특성을 만드는 원인으로 상정된 혈연선택(kin selection)을 인류 진화의 원동력으로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윌슨교수는 포괄적합도라는 일반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모호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구성되는 다수준선택(multilevel selection)을 제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개체선택이 집단 선택을 압도하는 일은 포유동물을 비롯한 척추동물에서는 드물 뿐 아니라, 결코 완성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75쪽)’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개체수준에서 우월한 형질이 출현하여 누적된 결과가 집단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자연선택설에 배치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곤충류의 진사회성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포유동물의 생활사와 집단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사회성 진화에서는 곤충과 흡사한 사회체제가 결코 나올 수 없다.’라고 제한점을 밝히기도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흔적을 보면 현생인류와는 달리 수십만 년을 살아왔지만, 원시적인 석기제작 기술에 머물러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3만 년 전에 사라진 점을 본다면 진사회성 만으로 인류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3부와 4부에서 사회성 곤충들이 무척추동물계에서 우위종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이어서 5부에서는 인간이 지구생물 가운데 우위종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근본적 이유를 언어, 문화, 종교, 예술 등 다양한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읽는 이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빈약해 보이는 점도 조금 아쉽습니다.

 

저자는 과학기술의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10년 이후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하고, 이런 상황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을 고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복해온 행성은 저 너머 어떤 다른 차원에 있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들른 정류장 같은 게 아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이자, 앞으로도 인류의 유일한 고향일 곳을 파괴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 교훈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359쪽)”라는 점을 인식하는 새로운 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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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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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을 바탕으로 연극이나 뮤지컬을 관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토리의 극적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하여 스토리를 보완하기도 하고, 스토리가 지나치게 길어 줄일 수도 있어 원작을 읽어야 쉽게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도 그랬고, <안나 카레니나> 때도 원작을 미리 읽은 덕분에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영국에서 초연된 이래 전 세계 27개국 145개 도시 공연, 1억 3천만 명이 관람하였다고 하는데, 브로드웨이 공연은 1988년 시작해서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을 기록하고 있는 뮤지컬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1년 한국어 공연이 무대에 오른 이후 2005년 오리지널 공연팀이 내한 공연을 펼치기는 등 여러 차례 관객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관극하지 못했습니다만, 뮤지컬로 만나기 전에 원작으로 먼저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원작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꿈속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것인데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하면서 아서 코넌 도일이나 에드거 앨런 포와 비견되는 추리소설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수나 배우들이 귀신을 만나게 되면 대박을 낸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만, 화려하고 웅장한 파리 오페라하우스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사건을 조사해온 조사관이 밝혀낸 사실들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엮어놓은 것입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총감독들의 퇴임 축하 공연과 만찬이 벌어질 중요한 날, 무용단원들은 복도에서 유령과 마주쳤다고 소동이 벌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날 축하공연에서는 그동안 오페라계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여가수 크리스틴 다에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를 선보이면서 오페라하우스의 새로운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프랑스로 옮겨 음악활동을 해온 크리스틴은 라울 샤니 자작과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사이인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활동이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변화는 분명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죽으면 음악천사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크리스틴은 우연히 접근한 에릭이 바로 아버지가 보내주신 음악천사라고 믿고 도움을 받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에릭은 추한 몰골로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다가 페르시아 왕궁에서 미로를 건축하는 일을 하고서 죽임을 당할 상황에서 천우신조로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온 사람으로 오페라하우스 건설에 참여하면서 지하에 미로를 건설하고 숨어살고 있는 인물로 크리스틴의 음악에 빠져들면서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에릭은 흉측한 외모를 가져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틴은 라울을 좋아하지만 귀족이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차에 접근한 에릭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게 됩니다. 라울은 크리스틴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공연 중인 그녀를 지하 호숫가에 있는 집으로 납치하기도 하는데, 라울은 때맞추어 등장한 페르시아인의 도움을 받아 유령과 크리스틴을 추적하기에 이르는데.... 크리스틴이 에릭에게 결혼을 약속한 것은 라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만 일까요? 아니면 “제발 나를 사랑해주시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준다면, 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난 어린 양처럼 순해질 수 있을거요.(441쪽)”라는 에릭의 절절한 고백도 그의 추한 외모 때문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일까요?

 

오페라 하우스에 설치된 미로를 꿰뚫어 보고 있는 에릭이 객석과 무대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사건사고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공연 중인 배우 카를로타의 노래까지 망가트린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페르시아인의 등장도 뜬금없어 보입니다. 라울이 페르시아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라울은 뜨거운 손으로 페르시아인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싸늘했다.(373쪽)”고 적어서 헷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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