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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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이 지나면서 갑오년이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갑오년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60갑자가 일주하여 태어난 해의 간지를 다시 맞게 된 것입니다. 제가 갑오년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언젠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써오던 일기를 읽어보고는 너무 치졸하다싶었던지 모두 내다버린 적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적고 있는 글들도 나중에 읽어보면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쓴 것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결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변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같은 모습으로 남는 듯하다.”는 줄리언 바지니의 말에 공감하게 될 것 같습니다.(줄리언 바지니 지음, 에고 트릭, 10쪽, 미래인, 2012; http://blog.joins.com/yang412/12873764) 자아를 가지고 있는 생물, 즉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바지니의 말에는 자아의 두 가지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이렇듯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개인의 관심 수준에서 머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수준으로, 그리고 우주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는 우주의 시원과 종말에 관한 과학적 연구성과를 정리한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43832>와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59055>가 다루는 스케일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우주생물학자이며 아리조나대학교 천문학의 크리스 임피교수는 이 책들을 통하여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우주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고, 역시 누구도 볼 수 없을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고 있어 읽는 이의 호기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원과 종말은 천체물리학의 발전으로 이제 예측이 가능한 범주에 들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오히려 인간의 시작을 더듬어보는 일이라던가 인간의 종말을 예측하는 일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도 있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대상을 조금 넓혀서 지구생물들의 발자취를 짚어보고,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볼프 슈나이더는 ‘인류는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유엔 환경계획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지구를 파헤치고 덧붙이고 유린하고 있다. 더 심각한 일도 저지른다. 인류는 마지막으로 남은 자원과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우려 때문에 그동안 인류가 해온 일들을 정리하고, 이러한 진단이 틀렸기를 희망하면서 우울한 미래를 내다보기도 합니다.(볼프 슈나이더 지음, 인간 이력서, 12쪽, 을유문화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296412) 그래서 저는 이런 작업들이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생존을 위한 자기점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고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난 시간에 비하면 인류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오랜 과거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아있는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쌓인 방대한 자료를 해석하는 시각이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을 세운 에드워드 윌슨교수의 <지구 정복자>는 ‘사회성’이라는 화두로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목에 넣은 ‘정복’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볼프 슈나이더 역시 <인간이력서>에서 “지구는 우리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굴복시켰다. 더위, 추위, 사막, 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복했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칫 오만해 보이는 ‘정복’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윌슨교수가 <지구정복자>에서 “인간은 생명의 역사에 출현한 다른 어떤 종과도 달리 생물권을 정복하면서 황폐화시켜왔다. 인간이 해 온 짓을 볼 때, 인간은 정말로 독특하다.(23쪽)”라고 적고 있는데서 인간을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지구 파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섞인 반어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라기보다는 “지구에서 우리 인간은 우세종에 해당된다.”(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 지음,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571쪽, 사이언스북스,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2597810)라는 생각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윌슨 교수의 <지구정복자>로 돌아오면, 이 책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담은 다윈의 진화이론으로는 어렵던 생물들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해온 영국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적합도 이론’을 버리고 ‘집단선택’이론으로 회귀하는 논점들을 담고 있습니다. 윌슨교수는 장대익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곤충의 복잡다단한 생태를 더 깊이 연구하면서 혈연선택보다 생태적 요인이 진사회성의 진화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중앙일보, 2013년 11월 30일자 기사, [책과 지식] 다윈이 몰랐던 것 … 진화의 원동력은 협력(http://blog.joins.com/yang412/13282842)”라고 변화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윌슨교수의 입장변화는 진화학계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고 하는데,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살짝 던져 놓을 게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져야 할 책이다. 정말 유감이다.”라는 서평을 남겼다고 합니다. 진화학계를 뜨거운 논쟁으로 몰아넣은 윌슨교수의 주장을 음미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자는 독특하게도 불운한 화가 폴 고갱의 삶을 요약하면서 그가 남긴 명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 그대로도 이 책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고 보입니다만, 윌슨교수는 ‘고도의 사회생활은 왜 존재하고, 그토록 드물게 출현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진화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열망을 늘 품고 있던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에 정착해서 원시주의(primitivism)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고 인간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의 깨달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 작품은 제가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유럽미술전시관을 수리하면서 닫고 있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아쉽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79810).

 

정영숙 시인은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적으면서 “이 그림은 우리에게 인생의 근원과 행로에 대해 생각게 한다. 그러나 많은 미스터리가 담긴 이 작품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정영숙 지음,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읽기, 155쪽, 이담출판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21741)이라고 했습니다. 화가는 이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가며 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림은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 배치한 복잡한 듯 얽힌 넓고 깊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군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조금 뒤로 물러나 원죄와 사후세계를 담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중앙에서 오른쪽 뒤편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볼 수 있고, 이들의 원죄로 태어나는 아이가 맨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하고 잠자는 아기에게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가 짊어지고 태어난 원죄의 고난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중앙에 양손을 위로 올려 사과를 따고 있는 인물은 개인의 자아인식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은 지혜를 얻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서 사과를 먹고 있는 아이와 생기가 느껴지는 젊은 여인, 그리고 늙은 여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늙은 여인은 어둡게 표현하고 있지만, 눈동자에서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중앙에서 왼쪽 뒤편에는 푸른색으로 채색된 우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후세계의 여신 히나를 표현한 것으로 그림이 완성되고 있습니다.

 

윌슨교수는 인간진화의 원동력을 ‘혈연 이기성’ 보다 ‘사회성’에 두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의 전공분야이기도 한 곤충학의 연구성과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장류도 마뜩치 않을텐데 곤충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만, 지구의 다른 사회적 정복자들, 즉 고도로 사회학적인 개미, 꿀벌, 말벌, 흰개미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얻은 결과가 인류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것이 인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사회성 진화 전체를 살펴보면, 인과관계로 연결된 두 현상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패턴이 뚜렷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 현상은 육상 환경에 서식하는 동물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 체제를 갖춘 종들이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은 진화적으로 볼 때, 그런 종들이 아주 드물게 출현했다는 것이다.(137쪽)” 진사회성 동물로는 인간과 약2만종의 곤충이 알려져 있는데, 개미, 벌, 말벌, 흰개미가 대부분으로, 약 100만종에 달하는 곤충 중에서 겨우 2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제 집단 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개별집단의 특성이 서로 섞이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인데, 곤충류들의 집단은 어느 정도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지, 집단 간의 교류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어 사회성이라는 유사성만으로 직접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패턴은 지금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곤충사회의 문명패턴의 발전양상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자는 1부에서 ‘사회성’이라는 수수께끼를 설명하고, 이어서 2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서는 인간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지난 반 세기동안, 침팬지와 갈라져 나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원동력으로 포괄적합도라는 집단 수준의 특성을 만드는 원인으로 상정된 혈연선택(kin selection)을 인류 진화의 원동력으로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윌슨교수는 포괄적합도라는 일반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모호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구성되는 다수준선택(multilevel selection)을 제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개체선택이 집단 선택을 압도하는 일은 포유동물을 비롯한 척추동물에서는 드물 뿐 아니라, 결코 완성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75쪽)’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개체수준에서 우월한 형질이 출현하여 누적된 결과가 집단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자연선택설에 배치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곤충류의 진사회성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포유동물의 생활사와 집단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사회성 진화에서는 곤충과 흡사한 사회체제가 결코 나올 수 없다.’라고 제한점을 밝히기도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흔적을 보면 현생인류와는 달리 수십만 년을 살아왔지만, 원시적인 석기제작 기술에 머물러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3만 년 전에 사라진 점을 본다면 진사회성 만으로 인류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3부와 4부에서 사회성 곤충들이 무척추동물계에서 우위종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이어서 5부에서는 인간이 지구생물 가운데 우위종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근본적 이유를 언어, 문화, 종교, 예술 등 다양한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읽는 이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빈약해 보이는 점도 조금 아쉽습니다.

 

저자는 과학기술의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10년 이후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하고, 이런 상황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을 고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복해온 행성은 저 너머 어떤 다른 차원에 있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들른 정류장 같은 게 아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이자, 앞으로도 인류의 유일한 고향일 곳을 파괴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 교훈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359쪽)”라는 점을 인식하는 새로운 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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