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찬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9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임병철 옮김 / 책세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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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행을 전후에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마침 밀라노를 거쳐서 피렌체에 이르는 참입니다. <피렌체 찬가>는 르네상스의 절정기라고 할 15세기 전반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가 쓴 글입니다.

아레쪼에서 태어난 브루니는 이십대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피렌체로 왔다가 스투디아 후마니타스의 고전학과 인문학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서른다섯이 되던 해에 교황청 비서관이 되었고, 10년에 걸쳐 여러 교황을 위해 일했다고 합니다. 마흔 다섯이 되던 해 집필하기 시작한 <피렌체 시민사>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브루니가 이 글을 쓴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403~4년간으로 짐작되는 듯합니다.

당시 피렌체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만성화된 계급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내전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밀라노와 나폴리의 침공이 이어지는 한편 피렌체 역시 피사나 루카와 같은 주변도시를 침공하는 등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 상황은 1434년의 의회가 출범하면서 등장한 메디치가의 집권으로 안정되기 시작했고, 시민적 휴머니즘과 공화주의 이념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번역한 임병철님은 당시의 피렌체의 변화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금욕적 명상과 자기 수양에 몰두하면서 사회사 및 정치문제를 도외시 했던 이전 세대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적 휴머니즘과 달리, 브루니를 위시한 피렌체 지식인들은 공화주의적 자유, 시민의 능동적 정치 참여와 자기희생, 공공선에 대한 헌신과 같은 새로운 이념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87쪽)” 그런 점에서 옮긴이는 브루니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규정한 듯합니다.

이와 같은 피렌체의 변화를 담아낸 <피렌체 찬가(Laudatio florentinae urbis)>는 그리스의 웅변가 아리스티데스(Aelius Aristides)의 <아테네 찬가(Panathenaicus)>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피렌체의 역사를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기술한 것입니다. <피렌체 찬가>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피렌체의 환경, 즉 지정학적 탁월함, 청결한 도시환경, 아름답고 장엄한 건축물 그리고 비옥한 영토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 등을 예찬합니다. 두 번째는 도시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인들이 건설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무렵 피렌체에 대두된 공화주의를 염두에 두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로마인들에 앞서 이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에트루리아인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피렌체의 대외정책을 다루었는데, 밀라노의 지안갈레아쪼의 침략에 대항한 것을 인용하여 피렌체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자유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왔음을 강조합니다. 늘 약자의 편에 섰고, 주변 도시에 관용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피렌체 역시 주변 도시국가들을 침공한 것에 대하여는 언급을 피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피렌체의 내부 조직과 정체(政體)에 대하여 말합니다. 법에 기반한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한 피렌체의 모든 시민은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브루니는 “어느 누구도 이 도시보다 더욱 빛나고 영광스러운 곳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13쪽)”라고 적었습니다. 특정 도시를, 아니 국가라 함이 옳겠습니다만, 예찬한다는 것은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 설명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글쓴이가 얼마나 넓게 세상을 살폈는가도 중요할 듯합니다. 멀지 않은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객관적으로 비교를 해보았을까 싶습니다. 제국말기라고 하더라도 천년이 넘게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피렌체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다만 도시민의 평등과 자유를 기반으로 한 경우라면 수긍이 갈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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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알고 있다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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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한 두 사람이 기억하는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보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보는 사람의 주관이 상당히 개입되기 때문에 어떠한 관점에서 상황을 보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미술 등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족에게까지도 감추고 싶은, 심지어는 스스로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족 사이에는 서로 비밀이 없어야 신뢰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역시 몰라도 좋은 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국 BBC방송의 예술 다큐멘터리 극작가 출신인 르네 나이트의 소설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요소를 잘 버무린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심리소설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는 소설의 독후감을 쓰는 일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서사를 어느 선까지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경우는 특히 전개는 물론 반전까지도 너무 극적인 데가 있어서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이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같은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감추고 싶은 비밀을 누군가 지켜본 듯이 소설로 써서 주변 인물들에게 이를 읽도록 강요받는 그런 상황이 너무 끔찍할 수도 있다는 상황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아이에 대한 막연한 사랑과 믿음이 다른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세상을, 사물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연습을 당장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주어진 상황 가운데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혹은 인지를 했더라고 굳이 무시하는 경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연습을 꾸준하게 한다면, 하고 있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누군가는 알고 있다>에 이어,에이미 E. 허먼의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읽고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가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끌어가는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선가 만나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정이 엮인 불행한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데서 새로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진실을 밝히므로서 파탄으로 치닫는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전개가 이어지다가 놀라운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매혹적이고, 교묘하며, 중독성 있는 이 소설은 훌륭한 스릴러의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다’라는 평가를 받아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평생 그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고 말합니다. 19살에 사고로 죽은 아들이 남긴 사진을 받아든 부모가 소설가라면 어떨까요? 아들의 유품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내려가지 않을까요? 그 소설을 발표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유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지각의 편향성을 배제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또 다른 화자가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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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눈물 - 종교철학 명상록
이명곤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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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 마음을 먹은 것은 ‘눈물’, 그것도 ‘성인들의 눈물’때문이었습니다. 성인들께서 흘리시는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다는 이야기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제목 앞에 붙여둔 ‘종교철학의 명상록’이라는 전제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책읽기를 머뭇거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간적인 삶 안에서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혹은 ‘종교적 지평에서 본’ 인간현상들을 해명하고 그 원리들을 설명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철학의 명상이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제시되는 명상들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해명하거나 그 세계관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앙인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라 할 천지창조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책은 모두 2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의 기획의도라 할 수 있는 명상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장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검토되고 있는 화두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명상한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카오스 같은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명상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이 신의 현존의 특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이 인간과 신 사이의 매개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도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인들 말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라고 보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형이상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과학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뿐입니다.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과학자와 철학자의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을 과학자의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차이를 인정할 필요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는 신비가나 성인의 실존을 ‘눈물’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끌어와 설명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신비가나 성인에게는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눈물은 너무나 극명한 세상의 비극과 슬픔을 보면서 자신이 이 비극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있고, 두 번째 눈물을 세상 사람들이 부도덕한 만큼이나 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신의 뜻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눈물은 보다 신의 음성이 분명할수록, 신성한 명령을 이행할 내적인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있으며, 마지막 눈물은 신의 현존이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이 모든 고뇌들이 해결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합니다. 신의 현존은 믿음을 근본으로 하여 증명한다고 하는 것도 옳은 접근방식인가에 대하여도 아직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 명상이 반드시 종교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삶에 대하여 혹은 생에 대하여 명상을 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굳이 종교에 몸을 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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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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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가이자 철학자였다는 미겔 데 우나무노의 작품으로는 <안개>를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계절이 바뀌면서 근무하는 원주가 자주 안개에 휩싸이는 까닭에 읽게 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안개는 사물을 흐려 보이기 할 뿐 아니라, 정도가 심하면 사물을 감춰버리기도 합니다.

소설 <안개>는 어느 가랑비 내리던 날 우산을 펴고 집을 나서는 순간 지나쳐간 아름다운 아가씨에 매료된 한 남자가 사랑에 빠져들었다가 무너져가는 그리고 있습니다. 돈 많은 총각 아우구스토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소설, 드라마에서는 많이 보게 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토가 빠져 든 아름다운 처녀는 에우헤니아 도밍고 델 아르코입니다. 그녀는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피아노교습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한눈에 반해 결혼에 이르고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면 이야기 거리가 될 리 없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에우헤니아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 마우리시오가 있었습니다. 다만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는 백수라는 것이 문제였죠. 아우구스토의 돌진에 당황한 에우헤니아는 일단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 마우리시오에게 직업을 구하고 결혼하자고 다그칩니다. 에우헤니아의 냉담한 반응에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아우구스토는 친구로 남을 수 있다고 한 발 물러나면서 집에 세탁물을 배달해주는 로사리오라는 처녀와 사랑 연습을 시작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 4 사람이 얽히고 설키는 와중에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와 마우리시오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우구스토가 희생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되던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초반에 초연한 척하던 아우구스토가 갑자기 자살을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삶을 접는 나약한 젊은이들이 드물지도 않은 것을 보면 이 또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 터입니다. 소설 <안개>가 색다른 점은 바로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토가 소설의 원작자를 만나러 간다는 설정입니다. 찾아온 아우구스토를 맞은 나, 즉 작가는 아우구스토는 내가 창조한 인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독자들의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긴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 시청자들을 작가를 움직여 이야기의 구조를 바꾸기도 한다고는 합니다. 작가의 설명에 대하여 아우구스토는 돈키호테의 예를 들면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를 창조한 작가보다 더 실제적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비치기도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 진행되면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토의 반론에 발끈한 작가는 아우구스토가 자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고 하고,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토는 작가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살고 싶다고 애원합니다. 결국 작가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토는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그것이 도를 넘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은 나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보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우구스토 만이 불행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맺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공연히 짠하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이 슬픈 이야기와 안개와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표현을 인용합니다.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안개 같은 것. 인생은 구름 같이 모호한 것이다.(34쪽)” “안개가 아우구스토의 정신을 침입했다. 피사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가슴에는 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167쪽)”,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북극의 안개는 독한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잘 아울리나 찬란한 하늘과 질 좋은 발데페냐스 포도주를 가지고 있는 이렇게 투명하고도 맑은 스페인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214쪽)”라면서 쇼펜하우어도 맥주가 아니라 포도주를 마셨더라면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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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밥이다 2 헌법은 밥이다 2
최진열 지음 / 이담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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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세사를 전공하신 최진열박사님이 우리나라 헌법정신의 탐구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 성과를 정리하여 <헌법은 밥이다; http://blog.yes24.com/document/10595541>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여전히 배가 고프셨던지 후속편까지 내셨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여러 차례 뜯어고쳤고, 그러다보니 국민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편의 핵심내용이었습니다.

<헌법은 밥이다2>에서 저자는 헌법에 밝힌 정치와 경제 부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 특히 헌법에 적시된 바를 권력을 쥔 사람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점들을 지적하였고, 마지막으로는 헌법에 규정된 바가 명료하게 지켜지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헌법은 밥이다2>에서도 저자는 전정권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박근혜정부에서 내세웠던 건국절에 대하여 헌법조문에 기반하여 그 타당하지 않음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헌법전문에 표명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13쪽)’ 부분을 인용하여 1919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기미독립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이라는 정부가실효적으로 성립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3권이 분립된 행정체계가 갖추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10월 3일 개천절이 실질적인 건국절이므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중복된 개념이라는 주장입니다. 개천절이란 단군왕검이 신시에 나라를 열었다는 고대사에 기반한 것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고려, 조선의 개국일을 건국절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생각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간주한 이승만대통령의 철학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헌법이란 우리나라의 정체를 비롯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철학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조문이 포괄적이거나 상징적으로 정리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문에 국한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헌법 정신을 무시하는 행태는 어느 정권에서도 벌어지던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장관임명 절차입니다. 대통령 책임제인 우리나라에서는 장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총리의 제청권이 실효적으로 작동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관행이라고 해야 되나요? 정교분리의 원칙과 기독교의 정치간섭이라는 주제도 그렇습니다. 딱히 기독교가 정치에 간여한다는 주장도 따지고 보면 다른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의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불교도 정치에 간여하고 있으며 노동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단체도 대한민국의 정치에 간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원칙적으로 헌법은 한 나라의 최고 규범이다.(313쪽)’라는 구절에 저 역시 공감합니다. 특히 ‘원칙적’이란 단어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입니다. 헌법은 우리 국민을 지키는 기본 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므로 헌법정신을 지켜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국민들 역시 헌법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헌법을 비롯한 법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느슨하게 적용하고, 내가 아닌 남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최근에 화제가 된 대법원 법관이 자신과 피고인에게 내린 판결이 서로 달랐던 사례는 지극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헌법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데는 동의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일을 하듯이 헌법 역시 법을 만드는 일에 전문인 헌법학자와 법률제정의 권한을 가진 국회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고, 다만 그 내용은 모든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밝혀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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