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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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가이자 철학자였다는 미겔 데 우나무노의 작품으로는 <안개>를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계절이 바뀌면서 근무하는 원주가 자주 안개에 휩싸이는 까닭에 읽게 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안개는 사물을 흐려 보이기 할 뿐 아니라, 정도가 심하면 사물을 감춰버리기도 합니다.

소설 <안개>는 어느 가랑비 내리던 날 우산을 펴고 집을 나서는 순간 지나쳐간 아름다운 아가씨에 매료된 한 남자가 사랑에 빠져들었다가 무너져가는 그리고 있습니다. 돈 많은 총각 아우구스토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소설, 드라마에서는 많이 보게 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토가 빠져 든 아름다운 처녀는 에우헤니아 도밍고 델 아르코입니다. 그녀는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피아노교습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한눈에 반해 결혼에 이르고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면 이야기 거리가 될 리 없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에우헤니아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 마우리시오가 있었습니다. 다만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는 백수라는 것이 문제였죠. 아우구스토의 돌진에 당황한 에우헤니아는 일단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 마우리시오에게 직업을 구하고 결혼하자고 다그칩니다. 에우헤니아의 냉담한 반응에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아우구스토는 친구로 남을 수 있다고 한 발 물러나면서 집에 세탁물을 배달해주는 로사리오라는 처녀와 사랑 연습을 시작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 4 사람이 얽히고 설키는 와중에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와 마우리시오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우구스토가 희생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되던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초반에 초연한 척하던 아우구스토가 갑자기 자살을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삶을 접는 나약한 젊은이들이 드물지도 않은 것을 보면 이 또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 터입니다. 소설 <안개>가 색다른 점은 바로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토가 소설의 원작자를 만나러 간다는 설정입니다. 찾아온 아우구스토를 맞은 나, 즉 작가는 아우구스토는 내가 창조한 인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독자들의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긴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 시청자들을 작가를 움직여 이야기의 구조를 바꾸기도 한다고는 합니다. 작가의 설명에 대하여 아우구스토는 돈키호테의 예를 들면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를 창조한 작가보다 더 실제적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비치기도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 진행되면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토의 반론에 발끈한 작가는 아우구스토가 자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고 하고,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토는 작가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살고 싶다고 애원합니다. 결국 작가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토는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그것이 도를 넘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은 나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보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우구스토 만이 불행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맺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공연히 짠하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이 슬픈 이야기와 안개와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표현을 인용합니다.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안개 같은 것. 인생은 구름 같이 모호한 것이다.(34쪽)” “안개가 아우구스토의 정신을 침입했다. 피사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가슴에는 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167쪽)”,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북극의 안개는 독한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잘 아울리나 찬란한 하늘과 질 좋은 발데페냐스 포도주를 가지고 있는 이렇게 투명하고도 맑은 스페인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214쪽)”라면서 쇼펜하우어도 맥주가 아니라 포도주를 마셨더라면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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