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눈물 - 종교철학 명상록
이명곤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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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 마음을 먹은 것은 ‘눈물’, 그것도 ‘성인들의 눈물’때문이었습니다. 성인들께서 흘리시는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다는 이야기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제목 앞에 붙여둔 ‘종교철학의 명상록’이라는 전제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책읽기를 머뭇거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간적인 삶 안에서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혹은 ‘종교적 지평에서 본’ 인간현상들을 해명하고 그 원리들을 설명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철학의 명상이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제시되는 명상들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해명하거나 그 세계관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앙인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라 할 천지창조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책은 모두 2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의 기획의도라 할 수 있는 명상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장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검토되고 있는 화두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명상한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카오스 같은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명상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이 신의 현존의 특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이 인간과 신 사이의 매개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도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인들 말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라고 보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형이상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과학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뿐입니다.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과학자와 철학자의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을 과학자의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차이를 인정할 필요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는 신비가나 성인의 실존을 ‘눈물’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끌어와 설명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신비가나 성인에게는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눈물은 너무나 극명한 세상의 비극과 슬픔을 보면서 자신이 이 비극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있고, 두 번째 눈물을 세상 사람들이 부도덕한 만큼이나 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신의 뜻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눈물은 보다 신의 음성이 분명할수록, 신성한 명령을 이행할 내적인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있으며, 마지막 눈물은 신의 현존이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이 모든 고뇌들이 해결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합니다. 신의 현존은 믿음을 근본으로 하여 증명한다고 하는 것도 옳은 접근방식인가에 대하여도 아직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 명상이 반드시 종교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삶에 대하여 혹은 생에 대하여 명상을 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굳이 종교에 몸을 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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