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 내 기억회로의 엔터키를 누르지 않으면 어제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시인은 참 귀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병률의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고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부피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전날의 기억들을 분리수거도 채 하지 못하고 20리터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는 나날들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날들이 모여 한꺼번에 뭉텅이로 달아났다는 걸 깨닫는 아침이면 지난 세월에 가벼운 손인사라도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몃 두통이 인다. 이따금 찬바람만 휑하니 도는 절간 같은 마음일 때 시인의 한마디는 군불처럼 따숩다.

 

<끌림>으로 시작된 이병률 읽기는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났고 책의 표지가 바래고 글귀들이 일상처럼 무뎌졌을 때, 그는 돌연 한 권의 책을 들고 나타나곤 했다. '이병률 여행산문집'이라는 부제에 눈길이 멎었다. 그는 또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인가, 생각했는데 책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아름다운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그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여행한 듯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그 수많은 영혼들은 수억 광년보다 더 먼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 외로워 했는지도 모른다. 그 거리를 좀 더 가깝게, 혹은 하나로 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은 직후였다.

 

작가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소소한 일상에 주목하고 있다. 그 많은 사건들을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인 양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깊이 반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매만지고 음미하고 느끼다 보면 하루는 정말 천천히 흐를 것만 같았다.

 

"우리로서는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없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수화로 일러줍니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일과, 우리 몸에 바싹 붙어 지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흠씬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의 한낮, 마음 한켠이 까슬까슬하여 집어든 책을 내쳐 다 읽고 말았다. 내가 시인의 책 한 권을 읽는다 하여 메마르고 척박한 세상이 칠십억 분의 일만큼 더 다정해질 것도 아니지만 한 번 믿어보라는 작가의 꼬드김을 차라리 믿고 싶은 심정이다. 하루 종일 해가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스산한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어둡다. 이 비 그치면 가을은 한뼘 더 깊어질 터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가까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 반비례하여  점점 멀어져만 가는 심리적 거리는 어찌하랴. 이 계절 방향을 잃은 우리는 무참한 계절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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