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프레드 포드햄 그림,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제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사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여러 번 읽었던 까닭에 그때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진부한 리뷰를 써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숫자를 세어보면 리뷰를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게 훨씬 더 많겠지만 말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요 내용이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신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 테마나 주제에서는 살짝 벗어난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이전의 리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교는 언제나 민감한 문제이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나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고, 종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맹목적인 광신자의 격분한 비판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까닭에 일부러 외면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미사마저 거르기 일쑤인, 일종의 패션 신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내가 여타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는 없지만 종교가 존속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혹은 믿으려고 하는)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잘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종교란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며, 종교를 통하여 그들이 처한 작금의 다급한 처지를 개선해 주겠다는 헛된 약속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한다기보다는 지금은 마음의 위로 외에는 달리 해줄 게 없지만 내세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메시지로 그들을 설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경구는 어찌 보면 교회 입장에서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영업 멘트가 아닐까 싶다. 사는 게 곧 고통임을 설파하는 불교의 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세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경쟁과 불평등이 상존하는 까닭에 신이 아니라 신의 할아비가 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로 출간된 <멋진 신세계>의 장점은 가독력과 이해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묘사에 의한 상상력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그래픽 노블'의 출간에 대해 환영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자 텍스트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나 동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기호에 맞춰 우리가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고전 소설을 그래픽 노블로 재출간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줄거리는 대충 알겠지만 반역자였던 왓슨과 총독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총독의 주장을 옮겨 본다.


"사람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에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나, 그 독립이 인생의 최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글쎄, 우린 지금 인생의 최후까지 젊음과 번영을 보장받고 있다네. "종교적 신앙심이 우리가 겪는 모든 상실을 보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상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상실도 없는 걸. 그리고, 젊음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충족되었는데 왜 그 대체제를 찾아 헤매야 할까?  (p.202)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에 종교는 존재하며 신에 대한 갈망과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행을 밑천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의 풍요와 만족, 온갖 유희와 쾌락 등이 과학이 발달한 먼 미래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리 없지만 그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 역시 종교를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틀임은 분명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낮 기온은 높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끼인 금요일 오후, 휴가를 떠난 직원들의 빈자리에서 "야호!" 소리가 수시로 들리는 듯한 착각 속에서 출근한 직원들의 후줄근한 얼굴들이 겹쳐집니다. 휴가 신청 순위에서 밀렸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피치 못할 업무 때문에 출근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으로부터 숙명과도 같은 직장인의 비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하늘처럼 어두웠던 깊은 우울과 함께 말입니다.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이고 이틀 동안의 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그닥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하는 듯했습니다.


한 주를 돌이켜보면 금주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동해안 유전 소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며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연구기관과 전문가들 검증도 거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발표였습니다. 보수 언론과 정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발표가 마치 산유국 대한민국의 증표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고, 관련 주가는 폭등했습니다. 나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주가조작의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주가조작 전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 중 모르는 이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21%라는 처참하게 낮은 지지율을 회복할 방법은 전무해 보이는 까닭에 대통령이라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실컷 돈이나 벌어보자는 쪽으로 국정 기조를 바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시추공 하나를 박는 데 일천억 원가량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지만 그게 어디 대통령의 개인 돈이겠습니까. 어차피 그 많은 돈이 세금에서 지출되더라도 석유의 존재 유무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밝혀질 테니까 말입니다.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을 적절히 이용만 하면 관련 종목의 주가를 띄우는 일이야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닐 수 없고,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주가조작 전문가는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제69회 현충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셨던 저의 선친 역시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까닭에 현충일은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곤 합니다.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북한 정권은 역사의 진보를 거부하고 퇴행의 길을 걸으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해상 포사격과 미사일 발사에 이어 최근에는 정상적인 나라라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비열한 방식의 도발까지 감행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위협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계비가 탐이 나서 지속적으로 삐라를 살포하는 탈북자 단체의 행위 역시 비열한 방식의 도발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이에 맞대응하는 북한의 오물 풍선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막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좌시만 하겠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연설이었습니다.


주말 휴일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습도가 높아지는지 기온이 떨어져도 후텁지근합니다. 로또 복권을 사는 것처럼 어느 날 있을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이 내가 보유한 주식에 관련된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도 말고 두 번만 상한가를 갔으면 좋겠습니다. 비실비실하던 '한국석유' 주가가 그랬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보다 더 큰 그릇을 알지 못한다. 매 순간 지구에 사는 수십억 명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지구가 아닌 우주의 차원으로 넓힌다면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용량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에 담긴 인류의 과거 기억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보면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현재의 상황과 흡사한 어떤 사건들과 더러 마주치게 된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까닭에 실체적인 사실은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고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감정이나 느낌은 또 어찌하랴. 우리는 역사 속 실체가 업는 누군가의 감정이 그리울 때 그 시절에 쓰인 시를 읊거나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우리가 시대를 오가며 감정을 공유하는 까닭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를 '시간' 속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역시 그런 소설 중 한 권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할,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어떤 순수한 영혼을 통해 밝혀진 불멸의 정의를 깨우치는 기회를 갖기 위해.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p.11)


일반 독자들이 하는 조지 오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단지 <1984>나 <동물농장>과 같은 소설을 통해 문단에 진출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하였고, 그곳에서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하였던 그는 제국주의의 허상을 비판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게 되는데 그것이 그가 문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파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그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쓴 르포르타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년 1월 스페인 통일노동자당 민병대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고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후 그때 느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기자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으로서 많은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바 나 역시 산문가로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 5시, 한쪽 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5시는 늘 위험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면서 해를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흉벽 위로 머리를 내밀면 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나는 보초들에게 교대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느낌이 왔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p.238)


자신의 의용군 체험담과 아울러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고발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소련에 대한 비판을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오웰은 "서양의 사회주의 운동에 소련의 신화가 끼친 부정적 영향"에 맞서 싸우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왜 의용군에 입대해 싸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라고.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공동의 품위'를 너무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비꼬았던 고 노회찬 의원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p.294)


조지 오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김훈 작가를 생각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저널리스트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글의 논리성이나 문장의 적확성을 따지는 면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다. 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맹점이나 허점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조지 오웰에 비해 김훈 작가는 너무나 나약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 등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여야 하는 이가 모든 예술가라면 이에 가장 선봉에 서서 저항해야 할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일 것이다. 문학이, 그림이, 음악이 지구인의 아픔을 보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작품은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에 맡겨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까닭은 서로의 가슴으로 흐르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없다면 예술은 무슨 소용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 당신의 생명은 한없이 가볍습니다.


주말이고 6월의 첫날입니다. 하늘은 실수인 듯 조금 흐렸고 이따금 바람이 붑니다. 아, 바람! 그런 뜻의 바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최근 우리나라의 뉴스 1면을 달구고 있는 모 재벌 회장과 최고 권력자의 딸 간의 이혼 소송을 떠올리게 됩니다. 1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재산 분할과 20억 원의 위자료. 물론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는 만큼 모든 게 확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우리와 같은 일반 서민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이혼 비용을 감당하고서라도 당사자인 재벌 회장은 과연 실제 이혼을 결행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물론 혼인 파탄의 책임이 전적으로 재벌 회장에게 있는 까닭에 그 책임 또한 전적으로 재벌 회장이 지는 게 법적으로, 도의적으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말입니다. 이 소송의 귀책사유 역시 아내 있는 남편의 '바람'이었습니다.


또 한 명의 꼴통 보수의 이혼 소송이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꼴통 보수인 대통령과 우리 국민 사이의 결별입니다. 국민들은 이미 '헤어질 결심'을 굳힌 듯합니다. 취임 2년 차의 대통령 지지율이 21%라는 건 우리 국민 열 명 중 여덟 명이 지지를 철회했다는 의미이고, 지금 당장 헤어져도 아쉬울 게 없다는 뜻일 테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 중 상당수가 제발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게 해 주십사 새벽마다 정화수를 올리고 정성스레 치성을 드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극단적인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설마 그 귀책사유가 국민에게 있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꼴통 보수들 상당수는 그 귀책사유를 국민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무식한 국민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지요.


꼴통 보수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들의 명예가 '원 오브 뎀'인 국민들의 생명이나 인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런 까닭에 10.29 참사의 희생자도,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도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을 뿐만 아니라 꼴통 보수인 자신들이 법적인 책임을 짐으로써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당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위패도 없는 분향소가 차려진 까닭도 그런 이유입니다. 죽어서도 그들은 '원 오브 뎀'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생탐방에 나선 대통령이 머리가 하얗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에게 반말을 찍찍하는 까닭도 모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꼴통 보수의 명예 또한 '원 오브 뎀'인 노동자의 생명보다 소중한 까닭에 중대재해처벌법에 의한 법적 제재란 그들 사전에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원 오브 뎀'이었던 어느 해병의 죽음 때문에 꼴통 보수인 사단장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인권이나 목숨은 유부남인 꼴통 보수의 외도에 의한 혼외자의 출산 혹은 단 한 번의 바람보다도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왜 보수 정권하에서는 많은 생명이 죽어 사라지느냐고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은 한없이 가볍습니다. 당신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장석주 지음 / 달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기억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면 의식 또한 타인에게 언제든 밝힐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 굳이 명명하자면 '백색 의식'과 '흑색 의식'쯤으로 말할 수 있으려나. 그것이 어떻게 이름 붙여지든 간에 '흑색 의식'은 내 기억은 또렷하지만 타인에게 밝힐 수 없거나 밝힐 필요가 없는 것들, 이를테면 타인에게 밝혔을 때 나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실익이 없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구성 물질로 추정되지만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암흑 물질의 존재와 크게 닮아 있다. 나의 의식에서도 그러한 기억들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불필요한 것들이니 차라리 무의식의 영역으로 자리 이동을 했으면 싶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쉽게 옮겨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란 입이 방정인 경우가 많은지라 의식의 세계에서 떠도는 기억들은 언젠가 실익도 없이 누군가에게 떠벌려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수시로 들게 마련이고.


"하루키 소설은 우리 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노스탤지어는 기억의 내밀한 삶에 가닿으려는 불가능한 욕망이고, 혹은 욕망이 품은 욕망의 불가능함이다.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오마주이다. 따라서 그것은 감미로운 슬픔을 동반한다. 노스탤지어는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가 과거 - 미래이고,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장소이다. 사라진 시간과 없는 장소에 가닿으려는 불가능으로 부풀어오른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늘 좌절의 슬픔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p.54)


시인이자 장서가로 잘 알려진 장석주 작가의 책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는 꽤나 매력적이다. 물론 하루키의 책에 관심이 없거나 하루키가 쓴 어떤 소설이나 에세이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책 역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책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상하게도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하루키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루키 소설의 선정성이나 가벼움 등을 들어 공격하곤 한다. 반면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의 내면에 깔린 독자적인 세계, 즉 '하루키 월드'에 대해 열광한다. 양자 사이의 접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작중인물이 보여주는 비사회성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혹은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바깥으로 미끄러지며 익명으로 떠돈다. 그들은 메마르고 사악한 현대사회를 떠도는 익명의 표류자다. 고도자본주의 세계는 잃어버린 낙원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매혹이자 혐오의 세계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평범한 일상성의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는 그들은 이내 엄청난 수상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때 펼쳐지는 비현실적 모험의 연쇄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회귀의 여정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바로 자아로의 회귀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p.131)


나는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거나 독서 권태기에 접어들 때마다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책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중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레드썬' 하고 외치면 금세 최면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장석주 시인은 '봄날 햇볕 아래서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으면 행복해질 작가를 꼽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루키를 꼽겠다.'고 한다. '하루키 소설을 맛있는 빵을 조금씩 떼어먹듯 읽었다'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마음만 먹는다고 뚝딱 내놓을 수 있는 게 소설이 아니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되는 법이다. '테드 창'이 그렇고 앤드루 포터'가 그렇다. 너무 아쉬워서 아껴가며 읽다 보면 때로는 감질이 나서 참지 못하고 후루룩 다 읽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다음 작품에 목이 마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설에 맛이 있다면 하루키 소설은 봄날 햇빛의 맛이다. 그것은 상큼하고, 아릿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복잡한 맛이다. 반쯤 감은 눈의 속눈썹에 엉기는 햇빛 알갱이의 찬란함! 하루키 소설의 인상은 그런 것이다. 그의 소설엔 살아 있음이 주는 기쁨과 상실로 빚어진 비애, 그리고 적당량의 멜랑콜리가 버무려져 있다. 그것은 밝되 슬프게 빛난다."  (246)


1979년에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한 구절 "모든 건 스쳐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를 가만가만 되뇌다 보면 저 너른 벌판을 건너온 바람이 나의 빈 가슴속을 통과하여 영원의 품으로 안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살면서 용서하지 못할 것도, 굳이 내려놓지 못할 욕심도 하루키의 책을 읽는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무작정 들었던 것도 하루키 소설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