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그 불만 - 前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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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3년 멕시코의 칸쿤에서 농민 운동가 이경해씨가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 이경해씨는 세계화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세계화의 부조리에 대하여 경종을 울렸다. 미국 언론들은 고 이경해씨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삶에 대하여 조명했으며 반대에 부딪힌 세계화에 대하여 심도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빧아 빨갱이 사상에 물든 빨갱이가 조국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사건으로 보도했었다. 내가 조중동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을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농민운동가 조지 보베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농민 운동이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깜작 놀랬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은 여전히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가 아니라 농민 운동에 대하여 관심조차 갖지 못하는 사회이다. 농업은 천하지대본이 아니라 그저 경제성 없는 천덕꾸러기 산업일 뿐이다. 자동차 한대를 더 팔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되어야 하는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은지 오래이다. 노동 운동에서도 심도 있게 농민 운동에 대하여 다루지는 않았다. 그저 인원 동원을 위한 기구 정도의 위상만을 가진 것이 오늘날 농민 운동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런 처자에 뜬금없이 고 이경해씨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화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비판과 불만을 읽으면서 고 이경해씨의 할복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그 악명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지만 철저하게 제도권 안의 사람이다.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도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우익인 사람이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고문 역할을 감당했으며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만한 사람이 작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그저 빨갱이 사상으로 치부해 버릴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제도권 안에서 일해 온 사람이고, 세계 은행 부총재의 직물르 감당하면서 계속적으로 IMF와 함께 일해왔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의 세계화는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유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세계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그는 세계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왜 세계화 비판의 선봉장이 되었는가?  

  그의 판단에 의하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는 소탐대실을 하고 있는 근시안적인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을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근시안적이고 권위적인 IMF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IMF가 상식선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IMF 스스로 실수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실수로 판명난 사안들에 대하여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구제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체질이 다르고 정체가 다를텐데 세계화는 어느 나라에든지 들어맞는다고 굳건히 믿는 만병통치약을 제시한다. 울타리를 낮추고, 지출을 줄이며 내핍 경제를 통하여 빨리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단순한 요구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IMF는 요구가 아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채무국의 국민들이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빨리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기거이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희생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에게 강요되니 문제이다.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 미치광이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얼마전 종부세를 완화하면서 초과한 종부세를 환급해준다는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었다.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는 IMF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줄일 것은 줄인다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이다. 그러나 줄인 곳이 문제였다. 종부세를 환급해 주기 위하여 아동복지와 사회복지 지출을 줄였던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지만 IMF는 이일을 밥먹듯이 한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운다. 그것들은 자기들 권한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빚을 빨리 받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기어이 나서서 망쳐 놓기 일쑤이다. 소탐대실, IMF의 정책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IMF를 I am F라고 부르면서 반대하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세계화의 기수 IMF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한다면, 비상식적인 행보를 계속한다면 전세계적으로 들끓는 반세계화의 물결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스키글리츠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식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세계화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세계를 빈곤에 빠뜨려 지배하기 위해 IMF가 일부러 이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음모론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IMF의 독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런 IMF의 방식을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배워와서 자신들을 방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탐대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포식자의 균형이 무너지면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소탐대실로 끝을 볼 것이냐, 아니면 상생의 길을 찾아갈 것이야 세계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부딪치는 딜레마일 것이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꼭 한번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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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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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다. 천만이 넘는 인원을 동원한 영화 중의 하나인데 한 때 괴물을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었다. 내 나라 땅이 아니기에 내 알바 아니라는 미8군은 오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에 괴물이 단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돌연변이였던 이 생물은 몇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하였다. 어느날 한강 둔치를 습격한 괴물에 의하여 사랑하는 딸이자 손녀요, 조카인 현서를 빼앗긴 가족은 현서를 찾기 위하여 하나의 가족으로 뭉쳤다. 사랑하는 손녀를 찾기 위해 희생하는 할아버지, 온갖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아버지, 삼촌과 고모 이들의 사랑의 힘은 괴물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현서를 잃어버린 가족은 현서와 함께 붙잡혔던 남자 아이를 현서 대신 아들을 삼아 기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한강을 떠나지 못하고 매점을 하는 아버지는 항상 총을 가지고 있으며 괴물의 재등장에 긴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에도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이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과 상당한 볼거리가 적절하게 뒤섞여 있는 영화는 한국에서 성공한 괴물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화려한 볼거리에 마음을 빼았겼었는데 괴물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고 난 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에 접근하게 되었다. 괴물의 탄생은 누구의 책임인가? 미 8군인가? 아니면 미 8군의 불법 행위를 제지하지 못한 행정당국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 8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눈치를 보기만 하는 정부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상사의 명령에 의해 오폐수를 무단방류하는 이름없는 군무원의 책임인가? 분명한 것은 괴물이라는 영화 그 어디에도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감독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해 둔 것은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일부 사람들의 욕심과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며 괴물에 의한 피해는 무관심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괴물이라는 영화가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국에는 괴물이 탄생했다. 미군의 비호를 받아 반공을 부르짖는 이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넘어가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사람들, 정치와 교묘하게 야합한 경제인들, 언론인들, 상위 1%의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한국이라는 괴물일 것이다. 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이라는 괴물의 단물을 다 차지하고 있는 상위 1%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정치에 무관심하고 학연과 지연에 따라 표를 던지는 이해하지 못할 대다수의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리붙었다 저리붙었다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위해 온갖 불법과 불의도 서슴치 않는 이들의 것인가? 괴물의 탄생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한국이라는 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승자 독식이 극도로 발생한 모양일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서열화의 모습이 한국에 수입되었고, 그것이 극도로 발전하고 세련된 곳, 그리고 그러한 서열화를 부추기고 정책화 하는 것이 괴물의 척추일 것이다. 이 척추에 SKY라는 학연을 오른팔로, TK라는 지역 감정을 왼팔로 삼아 앞을 향해 전진한다. 여기에 반공이라는 굳건한 다리를 가지고 있고, 부동산이라는 먹이를 포식하는 것이 한국이라는 괴물이다. 언론은 이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박정희라는 망령과 한나라당이라는 수구꼴통 세력들은 자기들이 괴물의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괴물의 주인 자리를 빼앗긴 민주당(열우당인지 무너지 도무지 모르겠다.), 주인이 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칭 진보세력(그러나 전세계적인 모습으로 볼 때 중도 우파에 속하는) 민노당,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자유선진당, 한발 살짝 걸쳤다가 벼랑끝으로 몰린 창조한국당은 괴물의 주인 자리를 놓고 아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관전하고 있으며 내 알바 아니라는 듯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이라는 괴물의 현 상태이다. 게다가 이 괴물은 아주 잘 큰다. 북핵과 간첩, 미국을 계기로 매일매일 쑥쑥 크고 있다. 이 괴물이 이대로 자라면 세계의 돌연변이가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아니 이미 한국이라는 돌연변이는 IMF를 기점으로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탈피하였다.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편가르기와 학연, 혈연, 지연에 집착했으며 정치에 실망하고 무관심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금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괴물을 다시 돌연변이로 돌려 보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성장을 제어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한가? 이게 한국이라는 괴물을 바라보는 나의 근본적인 질문이요, 이 책이 던지는 화두이다. 이 책은 하나의 방법으로 3부문을 이야기한다. 시민의 견제와 기업과 정부 사이의 민간부분을 괴물을 길들이는 하나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상당히 거칠기는 하지만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부와 기업이 키워 놓은 한국이라는 괴물은 정부와 기업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미 지난 역사에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괴물을 길들이기보다는 괴물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괴물을 키워 괴물의 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결국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길들일 필요를 느끼는 것은 괴물에 의해 피해를 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야 한다. 만약 이대로 방치한다면 괴물은 더 커질 것이고 더이상 잡아 먹을 것이 없는 불가사리같은 존재가 되어 스스로 소멸하고 말 것이다. 자기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킨 다음에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남미와 아프리카를 관찰하면 대략적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2008년 책을 30권 읽겠노라는 결단으로 시작했다. 참 열심히 읽으려고 했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결심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것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내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한건식 해주시는 바람에 독서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 때문에 시작한 일이 오늘 나를 50권이 넘는 책을 읽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런 내가 마지막을 괴물의 탄생으로 장식했다는 것은 참 공교로운 일임과 동시에 의미심장한 일이다. 내 앞에는 SERI2009가 놓여 있다. 괴물이 2009년에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괴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내가 괴물의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질될지,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의 힘 앞에 절망할지, 아니면 용기를 가지고 괴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덤벼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기에 다시 새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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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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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항상 안대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엔 날선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의미하며, 날카로운 검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의미한다고 한다.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의 형편이나 권력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양심에 따라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양심과, 공평과 엄정성이 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외국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한국적인 모습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고, 안대를 하고 있지 않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온갖 법률 비리가 넘쳐나고 있다. 판사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였다는 말을, 적어도 재벌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에 한해서는 한국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법관들조차 믿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 이런 비리와 불법이 자행되는 것은 법원 앞의 디케상이 안대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연수원생들이 디케의 눈에 안대를 해 주는 퍼포먼스를 계획했던 일이 있다. 물론 선배들의 제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위의 의미는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에서는 법원이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삼성의 특검을 통하여 이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법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법률은 일단 어렵다. 판결문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읽고 난 후에 결국은 몇 년 형이라는 말만 알아들을 뿐이다.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쓰는 법률과 판결문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법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시에 목숨을 건다. 일단 사시 합격이 되고 나면 인생 역전이 되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도 사시에 목숨을 걸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이 몇 있다. 그들을 보면서 이젠 법이 법이 아니고, 판사가 암행어사 박문수나 솔로몬이 아니라 고수입을 보장하는 하나의 직업이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법조인은 고수입을 보장하는 전도유망한 일류직업이다. 그러니 안대를 하고 싶어하겠는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김앤장이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혹은 그냥 김앤장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공적자금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나와 관련이 없는 전문용어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삼성, 현대, 한화, 론스타, 한미은행 등등 왠만한 재벌 기업들의 일에는 꼭 김앤장이 끼어 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들이 내려질 때마다 속으로 생각해본다. "법관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정신은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냐? 어떻게 저런 판결을 내릴 수 있지?"  이 책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막연하게나마 누가 돈 먹인거 아냐, 로비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배후로 김앤장을 지목한다. 단순한 카더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집어가면서 배후를 지목한다. 여기에 이 책의 무서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재판에서 반드시 이기는 승률 100%의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앤장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한국판 데블스 어드보킷이 바로 김앤장이 아닐까? 고객의 이익을 위하여 공정을 불공정으로 바꾸고, 수억의 돈을 쏟아부으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불법 로비를 벌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약자를 억압하고 철저하게 강한자의 편에 선다. 이게 법이고, 이런 사람들이 법조인인가? 제목도 기억이 안나는데 얼마전 종영된 드라마 가운데 법조인을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야, 현실은 안그래 하면서 즐겨 보지 않았는데 마지막 엔딩을 어떻게 보게 되었다. 그 대사의 대략 적인 내용이 그랬다. 법관은 형평성을 가지고 판결해야 하는데 사실 완전한 공평이라는 것은 불편등이다. 완전한 평등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의 편으로 저울 추가 기울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냉소주의다. 나만이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그렇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디케의 안대를 벗기고 눈을 뜨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디케의 눈에 안대를 다시 씌워줄 것인가? 이 책이 이 질문에 대한 아주 작은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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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허허 2011-12-31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를 보고 김앤장을 떠올린다라... 거기 가서 엑소시즘이라도 해보시는게...........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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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장하준이라는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생각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다 몇달전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 도서에 "나쁜 사마리아인"이 버젓이 이름을 올린 것을 보고 "국방부가 미쳤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무슨 책인지 읽어보고나 불온 도서로 선정한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이유로 장하준이라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일까? 그의 책을 읽어 빨갱이의 빨자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보수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가에서 나나서 주도하는 통제 경제, 이것이 장하준이 이야기하는 경제의 모델이 아닌가? 많은 선진국들이 이 경제 모델을 통하여 선진국이 되었고, 아시아의 신흥강국들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후진국들이 발전하기 위해선 이 방법을 기본으로 삼아 각 국에 맞는 경제 발전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보수적인 주장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좌파적인 불온 사상으로 평가되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시장만능주의를 믿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발언 때문일까? 여하튼 국방부 불온 도서에 그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장하준의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런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할나위 없이 자랑스럽고, 이런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국에 눌러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나쁜 사마리아인"의 원형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하준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도둑이 파숫꾼으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발전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이 범법이든, 비열한 짓이든 말이다. 이렇게 발전해서 어느 위치에 오르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아니다. 이젠 더 비열한 짓이 남아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과거의 기억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시장의 힘에 모든 것을 맡겨버렸더니 오늘 이렇게 발전했다는 개도 안물어갈 소리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한다. 국가에서 나서서 이것저것 컨트롤하면 될 것도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상대방이 발전할 가능성을 싹부터 잘라버린다. 비열한 짓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상대방의 발전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상대방의 생존권마저 위협해 버리고, 상대방을 착취하기 위하여 온갖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는다. 잊네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과거 자기들의 행태는 모드 잊어 버리고서 말이다. 오늘 대한민국이 세계 사회에서 졸부 취급 받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던가? 선진국들이야 자기들의 과거를 이미 깨끗하게 세탁해 버렸다지만, 대한민국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가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대한민국에 민영화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쓸만한 공기업들은 다 팔아버려야 한다고 한다. 팔아서 민간에 맡겨야 경쟁력이 살아 난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장하준 교수는 분명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공기업 매각은 소수의 기득권층에게 부를 더 몰아주는 일일뿐이라고 말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을 키워 그것을 헐값에 대기업에 넘겨주는 것이 민영화의 핵심이 아니던가? 그 가운데 오가는 웃돈이란 부수입일 것이고. SK가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누가 돈으로 기업을 만들었고, 그 기업의 열매는 누가 가져갔는가? 이 책이 불온 서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힘이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국제 사회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사다리 걷어차기는 계속되고 있다. 부의 사다리를 아둥바둥 대면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꼭대기에 앉아서 그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올라온 사람들을 걷어차 버리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은 아수라장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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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업 -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
한스 바이스.클라우스 베르너 지음, 손주희 옮김, 이상호 감수 / 프로메테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나이키, 아디다스, 맥도날드, 코카콜라, P&G, 리복, DKNY, 월 마트, 리바이스, 포드, 치코, 셸, 바이엘, 화이자, 디즈니, 포드, GM, 몬산토, 델몬트, 엑슨 모빌, 토미 힐피거, 지멘스, 마텔, 도이체 방크, 갭, 글락소 미스클라인, 네슬레, 노바르티스, 놀, 다임러 크라이슬러, 돌, 알리안츠, 마이스토, 미쓰비시, 베링거 인겔하임,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 BP, 삼성, 셰링, C&A, 아벤티스, 아지프, 알디/호퍼, HVB, OMV AG, OTTO, 유니레버, 치키타 브랜즈, 카슈타트크벨레, 크래프트 푸즈, 토탈, 트라이엄프, 하인리히 다이히만 제화, 헤네스 앤 모리츠,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생활 용품에서, 약품, 의류, 제화, 에너지, 전자 제품, 자동차 등 모든 물품을 총 망라하는 다양한 기업들인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초국적 기업들이라는 것이요, 두번째는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CSR)을 중요시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업들이라는 것이며, 세번째로 나쁜 기업이라는 책에 의하여 그들의 부정이 고발된 단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수천억대의 돈을 쏟아부어서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홍보전략을 구사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하청업체와 노동자들을 쥐어짜내어 이윤을 극대화하는 나쁜 기업들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어떻게 전세계적으로 자원을 착취하고 있으며, 인간을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사실에 근거해서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블러드 다이아 몬드"라는 영화와 장 지글러의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라는 책이 생각이 났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세계의 일류 기업들이 어떻게 시에라리온으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사들이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구입 대금으로 받은 돈들이 어덯게 무기 구입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디카프리오의 멋있는 얼굴도, 다이아몬드라는 보물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피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를 수 있는 시에라리온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비극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업들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글러의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던 네슬레의 횡포에 대하여 이 책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세계 곡물 기업들이 그 곡물들을 식량이 아닌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기업들의 이미지에 속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파렴치한 회사에서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기업들이 얼마만큼의 홍보예산을 편성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서는 인권이 어떻게 무시되고 있는지를 실례와 구체적인 자료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2장에서는 휴대폰과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콜탄의 생산지 콩고가 어떻게 초국적 기업들의 이윤추구를 위하여 이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삼성도 여기에 연루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삼성이 비도덕적인 기업인 것은 익히 알고 잇지만 독일 사람에 의하여 지적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3장은 의약품 다국적 기업들의 비윤리적인 작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플라시보 연구는 의약적으로도 비윤리적인 것인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의약 기업들이 아직까지도 플라시보 처방을 내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약이 없는 것도 아니고, 치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신약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하여 플라시보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UN의 헌장을 무시하는 행위이지만 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을 모르모트로 사용하고 있는 기업들에는 화이자와 바이엘이 대표적이다.

  4장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축복이자 저주인 석유 산업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예를 들어서 기업들의 파렴치한 모습을 고발한다. 석유를 더 쉽게,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각국의 기업들이 어떻게 개싸움을 벌이는지, 얼마만큼 환경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무책임한지 보여준다.

  5장에서는 식료품을 다루고 있는 돌, 델몬트, 몬산토, 치키타 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비리에 대하여 고발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굶어 죽어가지만 그것은 세계 식량의 40%를 소들이 먹어치우기 때문이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서 오는 광우병과 환경파괴를 지적한다. 또한 네슬레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산모와 어린이의 생명을 어덯게 우습게 여기는지, 그리고 다른 기업들이 바나나와 코코아 등의 열매를 생산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동력을 착취하는지 고발한다.

  6장에서는 완구를 만들어 파는 회사들이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으며, 최저 임금마저 무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7장에서는 스포츠용품과 의류를 생산해 내는 회사들의 기만적인 행위에 대하여 8장에서는 수출업과 금융업들이 앞 뒤 재지 않고 단기 이익을 위한 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상과 이로 인한 피해는 누가 보고 있으며, 이익은 누가 보고 있는지를, 9장에서는 기업들이 부정과 로비를 어떻게 저지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포럼과 위원회들이 어던 기업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조차 잊지 않는다.

  10장에서는 각 기업들이 어떤 문구로 자기 기업의 이미지를 포장하는지, 그리고 실상은 어떤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매우 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춘향가의 "玉盤佳肴千人膏 金樽美酒萬人血"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각국의 기업들이 오늘날 쌓아올린 부는 천짜서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도 변학도와 같은 기업들 때문에 신음하는 이들이 전 세계에 널려 있다. 인간을 원료로 보는 기업들은 자진하여 바뀌지도 않고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소비자들이 항의할 때 비로소 바꾸려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여라. 속지마라.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은 콩고의 내전을 부채질하는 자금줄이며, 내가 먹고 있는 바나나는 아이들을 노예로 사고 팔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다. 쓰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조금만 덜쓰자는 말이다. 수십만원짜리 휴대폰을 일년에 한번식 바꾸지 말고 조금만 더 쓰자. 그러면 그 기간만큼 콩고의 사람들이 덜 죽어갈 것이다. 나쁜 기업에 충성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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