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품은 수학, 수학을 품은 역사 - 인류의 역사에 스며든 수학적 통찰의 힘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4
김민형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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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인문학의 아름다운 컬래버레이션

역사·과학·문화를 만난 수학 이야기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저자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수학을 이렇게 에세이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싶어서 감탄하며 읽었더랬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역사가 깃들인 수학이라니! 수학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수학을 수학적 통찰을 살펴볼 수 있다니!! 흥미로운 주제였다.

저자는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첫번째 이유로 '역사와 문학의 틀 속에서 수학을 논함으로써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p. 7)' 를 꼽는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대단한 수학자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자다. 그런데 그의 글은 굉장히 친숙하고 대중적이다. 교수입네 학자입네 하며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저자들의 글들은 막상 읽고보면 얄팍할때도 많다. 그러나 김민형 저자의 글은 달랐다. 이런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역사와 수학의 중간즈음 어딘가에서 융합하고 있는 이 책은 시간순서라서 읽기 편했다.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와 현대까지 굵직한 수학자들이나 당대의 혁신적인 수학이론을 간략하게 풀어냄으로써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수학과 밀접하게 발달되어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는 역사도 수학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수학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의 목적이 수학을 흥미롭게 느끼도록 하는 데에 있(p. 17)'다는 저자의 바람은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평면상의 점의 정보를 수의 순서쌍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학교에서 좌표 개념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일상에서도 유용하게 적용된다. 가령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애비뉴, 동서로 뻗은 도로를 스트리트로 부르는 미국의 뉴욕이 좌표계처럼 계획된 대표적인 도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7번 애비뉴 30번 스트리트에서 만나'자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즉 좌표 (7, 30)으로 꼭 집어 정확하게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것이다. (p.40)

미국관련 책을 읽다보면 거리 이름이 애비뉴 였다가 스트리트였다가 해서 왜그런가 했더니, 애비뉴와 스트리트가 저런 의미였구나~! 저자는 이렇듯 일상과 수학을 잘 접목시키며 이야기를 전개시키곤 한다. 이러한 좌표형면상의 기하학에 대해서라면 피타고라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수학을 아무리 싫어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수학정리인 것처럼 수학에서 피타고라스의 중요성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럽 철학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되었다' 라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주장은 피타고라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즉 '과학전통은 피타고라스에 대한 인련의 각주로 구성되어 있다' 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p. 26)' 라는 저자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납득되어진다.

역사이건 수학이건 인문학이건 굳이 어느 분야라고 정리하지 않더라도 이 책속에 나오는 깨알정보들을 알아나가는 과정은 재밌으면서도 유익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여러 발명품 중 그 작동여부가 분명한 것중 하나는 나사screw 라는 것,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 제목은 '평행 전기' 로서 플루타르코스가 이 책을 쓴 목적은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비슷한 의도로 집필된 책이라는 것 등등...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도와주는 내용을 발견했을땐 더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나 키케로 등은 어째서 그의 순수성을 강조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오늘날의 수학자들 가운데도 아르키메데스의 순수성을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르키메데스가 죽고 수백년이 지난 뒤에 쓰인 플루타르코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믿음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정작 아르키메데스 자신은 스스로 그와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없고, 수학적 사고의 순수성에 대해 강하게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키케로나 플루타르코스 같은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가 이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결국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하나의 일환으로 고대 인물의 왜곡된 형상을 재발명했다고 볼 수 있다. (p 74) 키케로나 플루타르코스의 '플라톤주의적인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의 후속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 전통의 위조에 가깝다. (p. 75)

간단히 얘기하자만 순수한 이론으로서의 수학을 우대하고 기술적 응용면에서의 수학을 덜 우대하는 것이 (아르키메데스를 예시로 들었던) 플루타르코스나 키케로 때부터 이미 있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자도 말하듯이 수학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연구하든 발명이나 공학적으로 이용하든 여기서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아르키메데스는 그렇게 여겼다. '플라톤주의의 영향은 많은 면에서 순수 과학과 응용 수학 간의 과도한 분열을 초래했다. (p. 76)' 저자는 이러한 분열이 오늘날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고대의 대표적인 수학자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를 살펴보면서 순수학문과 응용학문간의 분열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는 결론이라니, 그야말로 역사를 품은 수학 혹은 수학을 품은 역사라 할만 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러한 수학과 역사의 융합적 서술을 각 시대별로 짧지만 확실하게 이어나간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기원전 1700년경에는 이미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대 수학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p. 87) 피타고라스학파의 이야기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리수의 발견은 제논의 역설과 유사하게 자연을 대수적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심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당시 수 체계에 대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리스 수학은 수 체계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수학의 발전을 저해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이 대수학의 위기는 수세기에 걸쳐 에우독소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뉴턴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러면서 수학적인 이론을 기하학적으로 개발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p. 89)

우리가 생각하는 수학은 대개 숫자로 이루어진 무엇 이다. 즉 대수학이다. 하지만 뉴턴의 그 유명한 <프린키피아>도 거의 모든 것을 기하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대부터 과학혁명 이후시기까지도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수학을 기하학적으로 풀어내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수체계는 18세기에나 정리된 것이라니, 그나마 이런 수체계 정립에 이슬람 수학자들이 큰 공헌을 했지만 그랬기에 더욱 기피되어 온 것이라니... 연산에 불가능한 로마숫자 대신 아라비아숫자를 도입하고 나서야 유럽의 수학과 과학이 놀라운 비약을 이루었는데 좀더 빨리 받아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슬람 문명에서 습득한 대수학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사용한 기하학을 강조하는 것이 당시 문화의 조류에 잘 부합했을 것이고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기하학적으로 기술한 이유를 그러한 조류에서 찾을 수도 있다. (p. 132)' 는 것은 수학과 역사를 접목시켰을 때 얼마나 새로운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어서 의미깊었다.

17세기 혁명의 한 축인 베이컨은 경험론자의 선구자로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관찰과 실험에 기초를 둔 귀납법을 확립했다. 이러한 베이컨주의는 경험주의의 토대가 되었는데, 베이컨주의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치의 이성론과 더불어 근대 과학적 방법론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었다. (p. 150)

시인이자 평론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옥타비오 파스는 소르후아나를 '에밀리 디킨슨과 월트 휘트먼의 등장 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했다. (p. 167)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따라 원자론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사람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다. (p. 191)

저자의 수학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수학과 시인을 연결하고 과학과 시인을 연결한다. 그렇게 이 책의 마지막 주인공은 기브스라는 수리물리학자의 전기를 쓴 루카이저 라는 시인이다. '나는 '현대판 루크레티우스'로 해석해본 이 전기가 엄밀한 과학적 전개만 가지고는 전할 수 없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을 계속 타진하는 중이다. (p. 239)' 로 마무리되는 이 책은 그러니까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나는 저자의 이 현재진행형이 다음엔 또 어떤 책으로 수학적 흥미를 돋워줄지 기대하며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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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 내 마음의 빛을 찾아주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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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빛을 찾아주는 인생의 문장들

가까운 지인이 '책 읽어주는 남자'의 소식을 받아보는 데 가끔 내게도 그가 간추린 문장들을 전해주곤 했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라는 작가의 책까지 읽게 됐었는데 가려뽑은 문장들과 느낌들을 모은 그 에세이는 이모저모 예쁜 책이라 선물하기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다 읽은 후 선물했다. ㅎㅎ)

나는 개인적으로 맥락이나 과정을 중요시여기는 편이라 흐름에 대한 정보 없이 부분적인 문장만 읽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작가의 전작인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에서는 아는 책들도 종종 나오고 감상보다는 인용문장들에 초점을 두고 읽으니 soso하게 읽었더랬다. 하지만 두번째는 무리였나 보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많은 사람들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저자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며 그 작품이 자신에게 건네는 느낌을 중요시 여긴다. 그 작품들이 마치 작가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그 작품들은 작가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그 순간과 그 의미들에 대한 감상을 모은 것이 이 에세이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이다.

그러나 책을 온전히 읽지 않고 그림을 제대로 보지 않고 남의 감상만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내것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감상은 그저 그 개인의 감상일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나만의 작품이 될순 없는게 아닐까... 나는 본래의 작품을 모른채 남의 감상만 읽는 것이 적응되지 않고, 게다가 그 감상이 위로와 힐링으로 점철되는 오글거림이 가득한 문장들일때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임을 다시금 느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이 시대에, 소설 한권 온전히 다 읽어내는 것이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이 시대에, 누군가 좋은 문장을 골라주고 소개해주는 것을 읽는 게 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생각거리를 느낄 거리를 전해주는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저자의 전작 처럼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권해주기 좋은 책이다. 누가 알겠는가, 저자가 읽은 책 속에서 저자에게 꽃이 되어 남은 문장들이 그 문장들만으로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을 부르고 꽃이되는 문장들이 될수 있을런지도. (그래서 나는 이번 책도 기꺼이 선물로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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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책세상 세계문학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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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젊은 목소리로 말해지는 가혹한 어른들의 삶이자 세계의 이야기다. 지금 읽어도 조금도 감각이 낡게 느껴지지 않으며, 이번 번역은 요즘 나온 젊은 작가의 신작 소설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세계명작소설들은 참 많다. 유명한 작품들도 있고 그닥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위대한 개츠비> 정도면 굉장히 유명한 작품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내가 공감하지 못한다해도 세계명작이 되는데 아무 지장은 없지만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 명작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읽게 된 이유는 백민석 소설가의 독후감이 실려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백민석 소설가의 소설을 읽진 못했지만 최근에 그가 쓴 미학에세이를 읽고나서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시각에 무척 공감했었기에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을 독후감을 통해서나마 깨닫게 되려나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의외로 독후감을 읽기전에 소설 자체에 빠져들어 읽었으니 독후감 때문이 아니라도 망작이 명작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의 제목을 정할 때,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쓰레기 계곡의 백만장자들',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 등 몇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피츠제럴드가 인용한 시는 사실 인용문이 아니라 자작시인데 그 시의 제목 '위대한 개츠비' 에 붙어 있는 주석에 따르면 소설의 제목을 짓기까지 이런 후보들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새삼 알수 있었고 흥미로웠다. 트리말키오가 뭔가 검색해보니 '서기 1세기 고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가 쓴 소설 『사티리콘(Satiricon)』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이 책은 방탕한 한 로마의 젊은이가 보여주는 허세와 방랑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자소설이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트리말키오는 자신의 친구와 아첨꾼들을 초대해 초호화 연회와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식사를 베풀며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 그는 벼락부자가 되어 가짜 미식가 행세를 하던 당시 일부 로마인들의 도를 넘은 허영과 경박함을 보여 주는 풍자적인 인물이 되었다.' 라고 나오는 것이나 쓰레기, 백만장자, 황금모자 등등의 표현들로 봤을때 이 소설은 애초에 제목부터 내용을 뻔히 드러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가 되는 순간 명작으로 남을 운명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한 가지 충고를 했다.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면 이 점을 꼭 명심하도록 해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p. 13)

닉 캐러웨이 라는 인물의 회상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은 제3자의 관찰자적 시점이기때문에 서사의 주요 주인공들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읽어 알 수 없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주인공들의 소설은 늘 조금은 이해가 어렵기 마련인 것 같다. 제3자의 시선을 읽고있는 나는 제4자 정도 되기 때문에 도저히 주인공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닉은 자신의 아버지가 알려준 교훈을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 교훈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충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개츠비만은 예외다. 내가 대놓고 경멸해 마지않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보여준 개츠비. 한 인간의 성격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몸짓으로 잘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무언가 대단한 면이 있었다. (중략) 결국 개츠비가 옳았다. 인간의 덧없는 슬픔과 짧은 희열에 내가 잠시나마 흥미를 잃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개츠비를 먹이로 삼은 것들, 그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p. 14~ 15)

고개 끄덕여지는 충고로 시작한 이 소설은 바로 뒷장에서 그 충고를 정면 부정한다. 적어도 개츠비 한 사람만큼은 예외적 경우라고.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닉에게만큼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자수성가한 개츠비, 그 성공만 보자면 개츠비는 위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공의 목적과 과정과 말로를 보자면 내게는 여전히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으니 개츠비의 '유명한 무명성'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파티가 열리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주인부터 찾아 나섰다. 두어 사람에게 주인의 소재를 묻자 그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p. 70)

거의 매일 화려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의 저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정작 파티의 주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러쿵저러쿵 수근거리길 멈추지 않는다. '개츠비가 그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낭만적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증거였다. (p. 74)' 하지만 낭만적인 추측 치고는 살인자라느니 범법자라느니 소문들은 흉악했다. 닉 또한 초대장을 받고 참석했으나 '내게는 좀 별난 파티입니다. 아직 집주인도 만나지 못했어요' "내가 개츠비인데요' (p. 79)' 에서 알 수 있듯이 얼굴을 마주하고도 개츠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초대를 받던 받지 않았던 수많은 손님들도 '개츠비 쪽으로 쓰러지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중략) 누구도 개츠비의 어깨에는 머리를 얹지 않았다. 여럿이 모여 노래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개츠비와 노래하는 무리도 없었다. (p. 83)' 닉은 개츠비와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주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날 닉은 개츠비의 손님들 명단을 적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이름들은 개츠비의 환대를 받고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알쏭달쏭한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에 대해 내가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뚜렷한 인상을 줄 것이다. (p. 97)' 라며 풀어놓은 손님들의 면면은 개츠비가 대체 왜 이 사람들에게 이런 파티를 열어주는지 더욱 알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닉에게도 개츠비는 '그저 이웃의 호화로운 호텔 주인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p. 101)' 그러다 개츠비가 닉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나는 주로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지내는데, 내게 일어난 슬픈 일들을 잊으려고 이곳저곳 떠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p. 105)' 라며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또한 직접이 아니라 조던 이라는 (닉과 자주 만나는) 여성을 통해 건넨다. 그러니까 개츠비 라는 인물은 부의 성공을 이룩했는지는 몰라도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줄은 몰랐던 인물인 것이다. 개츠비는 부유했으나 외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

너무나 소박하고 겸손한 부탁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이나 기다려서 대저택을 구입하고는 우연히 날아드는 부나방때에게 별빛을 보도록 한 것이 고작 어느 날 오후 잘 모르는 이웃에게 '초대받아 건너가기'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p. 123)

개츠비는 서툴다. 재산을 모으는 데는 능력자였는지 모르지만 사회적 관계에서의 처세술에는 능했지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것에는 초짜중의 초짜였다. 여하튼 닉을 통해 드디어 오매불망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

개츠비의 감정은 분명히 두 번째 단계를 지나서 이제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모르다가 방금 기뻐하는 단계를 지나서 지금은 데이지가 눈앞에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넋을 잃은 것 같았다. 개츠비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이 순간만을 꿈꾸어왔다. 말하자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이를 악물고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놓은 시계태엽처럼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p. 143)

어렸을때 테엽을 감아 사용하는 커다란 벽시계가 있었다. 열쇠모양의 키를 꼽아 태엽을 끝까지 돌리려면 아주 빡빡해지는 느낌이 들때까지 돌려야 한다. 그렇게 많이 감아놓으면 천천히 풀렸던가... 오르골은 태엽을 많이 감아놓으면 처음엔 빠르게 소리를 내다가 점점 느려지는데 시계는 어땠더라.... 결국 시간은 같은 속도인데 태엽은 달랐던가... 아주아주 더 느렸던가...

자그마치 5년에 가까운 세월! 눈앞에서 데이지를 보면서도 개츠비에게는 그날 오후도 그동안 꾸어왔던 꿈에 비하면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데이지의 잘못이라기보다 개츠비가 오랫동안 집요하게 품어온 환상때문이리라. 그 환상의 힘은 데이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초월했다. 개츠비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줄곧 그것을 부풀리고 주변에 떠도는 온갖 빛나는 깃털을 남김없이 사용해서 화려하게 장식했다. 아무리 열정이 대단하고 순수하다고 해도 한 남자의 영혼 속 깊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에는 견줄 수 없으리라. (p. 148~149)

'제임스 개츠, 이것이 개츠비의 진짜 이름, 아니면 적어도 법률상의 이름이었다. (중략) 사실을 말하자면,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에 사는 제이 개츠비는 자신의 상상력이 빚은 이상적인 모습에서 탄생한 인물이었다. (p. 151)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이 말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일', 즉 방대하고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을 위해 전력을 쏟아야 했다. 그래서 개츠비는 열일곱살 소션이 지어낼 법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을 꾸며내고, 최선을 다해서 그 이미지에 충실했다. (p. 152)' 나는 기독교적 비유나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작가가 '신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 이라고 표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제임스 개츠가 제이 개츠비로 변모한 순간, 데이지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의 환상은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바라는 건 딱 한가지였다. 톰에게 가서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p. 169)' 개츠비에게 자신의 환상은 순결무구 그 자체여야 했다. 그래서 부를 쌓고도 직접적으로 데이지에게 가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낸 이상은 '아뇨, 난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어요! (p. 170)' 라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환상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 현실을 자각할 수록 개츠비의 꿈은 환상임이 분명해질 따름이었다. '오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맥없이 스러진 개츠비의 꿈만이 홀로 싸움을 계속했다. 이제 더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불행하지만 끝내 절망하지 않은 채 방 저편의 사라진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p. 208)' 5년 동안 홀로 기다렸지만 만나고 나서도 홀로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개츠비는. '어느 틈엔가 그 자신이 온마음으로 취하려고 한 것이 다름 아닌 성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228)' 성배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개츠비의 환상은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썩어 빠진 족속이에요"

나는 잔디밭 너머로 계속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인간들 몽땅 합쳐놓아도 당신이 훨씬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기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츠비를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만큼 그때 그 말이 그에게 해준 유일한 칭찬이 아니었나 싶다. (p. 234 ~ 235)

개츠비의 짧은 생애는 비극적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수백 명이나 그 집에 드나들었는데 말이야. 더럽게 불쌍한 사람이군" (p. 264)'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 쾌락이 넘치던 파티 들끓던 손님들 그리고 생애 유일한 사랑... 그 모두가 결국은 다 허상이었다. 개츠비는 여름내내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수영장에 혼자 에어매트를 낑낑대고 끌고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장에 둥둥 떠다녔다. 자신의 삶이 둥둥 떠다녔듯이.

개츠비는 그 녹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아련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더 멀리 두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해맑게 갠 아침에...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떠밀리고 떠밀려가면서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p. 271)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거야' 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엔딩처럼 마무리된 마지막 문장들이 이질적으로 남는다. 이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문장 '하지만 개츠비는 알지 못했다. 그 꿈이 이미 자기의 등 뒤로, 저 도시 너머의 광막한 어둠 속으로, 밤의 장막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합중국의 어두운 벌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p. 271)' 이 더 마지막문장 다웠다. 여하튼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 는 분명 과거에 읽은 것과 달랐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다시 읽었기 때문인지 새번역이기 때문인지 하여튼 이번에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내게 명작이었다.

명작이 다 그러하듯 이 작품도 출판 당시에는 그닥 주목받지 못했었다고 한다. '1940년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난 때만 해도 그의 명성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가 쓴 작품은 대부분 절판되었고, 그의 이름도 점점 잊혀가는 듯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뒤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위대한 개츠비> 덕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위대한 개츠비>를 진중문고로 15만부나 구매했다. 그 바람에 <위대한 개츠비>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피츠제럴드는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위대한 개츠비>는 21세기에도 매년 30만부씩 팔리는 스테디 셀러로 자리매김했으며, 피츠제럴드는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가 반열에 올랐다. (p. 278~279)' 미군은 왜 이 소설을 대량 구매했을까? 군인 출신 청년의 자수성가 스토리로 이해했던 것일까? 목숨이 오가는 전장 속에서 군인들에게 세상 현실은 더 전쟁터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여하튼 개츠비라는 인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결국 개츠비는 위대하다기보다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톰의 계략에 의해 비극으로 끝난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측은 마음 지울 길 없다. 어쩌면 피츠제럴드도 개츠비가 가엾다 못해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여준 것은 아닐까 싶다. (p. 283)' 라는 백민석 소설가의 작품해설에서 이 작품을 다시 읽은 나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소설에서의 전문가인 작가가 개츠비를 위대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는데 하물며 나같은 일개 평범한 독자가 개츠비의 위대함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ㅎㅎㅎ

한때 이 소설의 신드롬에 편승해 개츠비스크란 말이 유행했다. 일부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데, 대체로 꿈과 이상을 좇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꿈과 이상을 좇되 결과적으로는 개츠비처럼 측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하면 좋겠다. (p. 283)

내가 처음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그 찌질함에 혀를 내두르며 '위대한' 이란 표현에 강한 반발감이 일었었다. 하지만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그 허망함에 '위대한'이란 표현조차 짠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피츠제럴드의 작품들 가운데 진심으로 슬프고 삶의 피곤함에 절어 질척거리는 유일한 작품은 그의 진짜 인생을 회고하는 자전 에세이들이다. (p. 299)' 라며 피츠제럴드의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삶이 피곤에 쩔어 있는데 굳이 백여년전 소설가의 질척거리는 삶까지 읽어보고 싶진 않다. 나는 그저 개츠비의 헛된 꿈을 측은하고 여기고 개츠비 못지 않게 허상을 좇으며 살았던 것 같은 피츠제럴드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위대한 작가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자 한다면 다른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명작에 대한 평론가의 난해한 해설보다 백민석 소설가의 진솔한 해설과 독후감이 깔끔하게 책을 덮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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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 유광수의 고전 살롱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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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아끼는 일, 옹졸함이 가져온 궁색함, 염치와 아량의 상관관계...

지식과 교양에 '복'을 더한 우리 고전의 재발견

고전읽기를 좋아한다고 할때의 고전은 대부분 서양고전인 경우가 많다. 나또한 그러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고전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꽤 여러권 읽어왔지만 대부분 서양고전들이었다. 그런 내게 한국고전의 진미를 알려준 책이 있었으니 유광수 교수의 <문제적 고전 살롱-가족 기담> 이었다. 전래동화라고만 여겼던 옛이야기를 고전으로 접근하고 그 고전 속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참의미를 깨닫고 나니 우리의 고전과 옛이야기들에 새롭게 개안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네 고전에서 '복'을 찾아 읽어주겠다니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았을까. ㅎㅎㅎ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며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지었는데, 좀 잘못됐다. '호모 암울스'나 '호모 두근스'가 맞다. 정확하게는 '호모 쫄보스'다. 생각은 쫄보니까 한 거다. 생각해서 쫄보가 된 게 아니고. 인간들이 희극보다 비극에 더 끌리는 이유도 간단하다. 호모 쫄보스라서 그렇다. (p. 9)

저자 특유의 가볍지만 날카로운 표현은 시작부터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고 고민하며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쫄보 유전자의 본능(p. 9)' 덕분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쉬이 공감이 갔다. 힘세고 덩치큰 존재들을 보면 두근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울한 미래 앞에 잔뜩 쫄아든 인간은 그러나 살아남았고 그 어떤 존재보다 번성했다. 그러한 삶의 흔적이 인간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다. 고전이란 그런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책은 성인용 전래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지만 새롭게 무엇보다 재밌게 호로록 읽혀진다.

'서양의 행운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알고 잡으려 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우리 복은 복이란 걸 잡을 생각도 없이 자기 할 일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어 복이 찾아올 거란 생각이다. (p. 31)' 첫번째 이야기 [복돼지와 김 진사] 이야기 속 김 진사는 크고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늘 하던 작고 보잘것 없는 사소한 일을 그저 꾸준히 열심히 했다. 그 사소함에 복돼지가 찾아왔다. 저자는 이야기 하나하나 마다 간결한 교훈으로 마무리한다. '사소함이 전부다. 그 사소함에 복이 깃든다. (p. 35)'

[구복 여행] 에서는 총각이 복을 찾으려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때가 '탄다'라는 말은 때가 '묻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떡볶이 국물이 떨어져서 얼룩지는 것은 더러워졌다고는 해도 때가 탔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들러붙어 묻어나는 것을 '탄다'고 한다. 때가 그러면 때가 탄다고 하고, 복이 그러면 복이 탄다고 한다.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묻어나는 것을 '복이 탄다'고 한다. 복울 움켜쥐려는 것은 복을 타는 행위가 아니다. 과정에서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고 배어들어야 복을 타는 것이다. (p. 51)' 복은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고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다. 그 과정 속에 복이 저절로 묻어나 복을 타게 되는 것이었다.

'남을 보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남을 보고 주눅들 것도 없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멍청해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감당할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p. 63)' [차복이와 석숭이] 에서는 복을 갖고 태어나지 않아도 남의 복을 빌려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차복이는 석숭이의 복을 빌려 쓴 것을 알았기에 행복하게 사용하고 다시 그 복을 돌려주었다.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빌려 쓴 것을 알고 다시 돌려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복을 찾고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복을 조금은 때론 많이 빌려 쓰고 있다고. '행복의 지혜는 고마움이었고, 행복의 열망은 고마움으로 남에게 되돌려주는 거였다. (p. 69)'

[세종에서 세조로] 는 옛이야기 까지는 아니지만 태종과 세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의 시대 속 공물납부에 관련된 비교를 통해 염치와 아량에 대해 풀어낸다. '아량과 염치는 닭과 달걀이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나 서로가 먼저여야 하는 관계다. (p. 87)' 가진자가 아량을 베풀줄 알고 얻은자가 염치를 생각할 줄 알면 세상사 다툼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이 염치와 아량을 아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염치와 아량을 모른다면 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박복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옹고집은 도플갱어 가짜에게 시달리는 정도(?)로 곤욕을 당하다가 뉘우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벼락 맞아 죽은 부자도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옹고집전>의 핵심이 숨어있다. 정답은 옹고집이 뉘우친 것의 실체가 뭐냐에 있다. 그러니까, 옹고집은 대체 뭘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뉘우쳤느냐는 거다. (p. 94)' 저자의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일 때마다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흥부전의 놀부는 탈탈 털렸고 <장자못 전설>의 부자는 벼락맞아 죽었다는데 [옹고집전] 의 옹고집은 고생은 좀 했을지언정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다 찾았다. 왜였을까? 옹골참과 옹졸함의 한끗 차이를 알려주는 저자의 해석에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

저자의 옛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늘 매력적인데 [혹부리 영감] 이야기도 그러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노래를 불러라'다. '진심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생이다' 라는 이야기다. (p. 113)' 가난한 혹부리 영감의 노래와 욕심낸 혹부리 영감의 노래가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은 도깨비들이 한번 속지 두번 속냐의 버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가? 이것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후로도 재미난 옛 이야기와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교훈으로 마무리되는 어른용 전래동화 다시 읽기는 계속된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속 공주의 선택, [자린고비] 가 자식에게 알려주는 마음을 아끼는 법, [두더지의 결혼] 에서의 자신감, [내 복에 먹지] 의 자존감, [신선, 감사, 구렁이 친구] 가 알려주는 욕망과 욕심의 차이, [수박씨 먹던 때를 기억한 재상] 이 알려주는 배은망덕, [학동과 구렁이] 속 나쁜 습관의 결과는 모두 익숙하게 알아왔던 전래동화를 삶의 지혜가 가득한 고전으로 새로 읽게 만들어준다.

서양고전이라 불리는 그리스로마고전이니 북유럽이야기는 '신화'라고 고전의 격을 높이는 듯 하면서 우리네 고전은 '전래동화'라고 어리고 미숙하게 보는 것 같은 시각은 나만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 이야기든 옛이야기들은 어차피 인간들의 이야기였고 조상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허구적 현실들이었다는 점에서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서양신화를 즐겨 읽는 이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내복을 짓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ㅎㅎ

ps. 우리네 고전의 진수를 새롭게 깨달으려면 저자의 전작 <문제적 고전 살롱>을 먼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순한 에세이보다 더 파격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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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CLASS ⓔ
노명우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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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자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지식을 완성해가는 즐거운 기획

사회학이란게 뭘까? 얼핏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학문같으면서도 막상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는 것이 사회학인것 같다. 호모사피엔스가 동물로 남지 않고 인간으로 특화된 것은 특유의 사회성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문장만큼이나 굉장히 당위적 문장이다. 그러니 한번쯤 제대로 사회학적 사고를 해보고 싶었다. 사회학자가 한줄로 사회학을 정리해줄 것 같은 이 책을 펼치게 된 이유다.

속담은 사회학자보다 세상 경험을 더 많이 했고, 그래서 사회를 구석구석 더 잘 알고 있고,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생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만들어냈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전수된 지식 체계라는 점이 장점입니다. 속담은 학문적 언어가 아니라 민중의 언어로 표현된 사실상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26)

가깝고도 먼 학문인 사회학을 가깝고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자가 골라낸 것은 '속담'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 줄 사회학' 은 곧 '속담'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12개의 속담을 사회학적으로 풀어낸다.

저는 사회학자로서의 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과의 만남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학교 안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캠퍼스를 벗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생한 해석을 들을 수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발길이 닿은 서울시 은평구 연신내 골목길에 '니은 서점'이라는 작은 서점을 차렸습니다. 니은 서점은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하는 사회학자의 공간이자 사회학자가 토속민의 언어, 골목길의 언어를 익히며 세상 사람과 교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p. 31)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해외유학까지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엘리트코스를 밟아야 가능하다. 저자는 그러한 코스를 거쳐 사회학 교수가 되었으나 학문이 학문인만큼 자신을 학교안이라는 울타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세상으로 나와 사회를 보려고 노력한 것 같다. 사회학자가 운영하는 서점이라... 가보고 싶다. 나는 서점을 참 좋아하는데... 여건만 된다면 작은 서점 하나 차려놓고 내가 읽었던 책을 추천해주며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인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라서... 저자의 서점이 무척 부러울 따름이다...

사회학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출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도 아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뒤 보다 인간이고 싶을 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싶을 때, 어떻게 살아야 내가 올바르게 살 수 있을지 궁리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속담을 통해 저에게 도움을 주시고, 저는 사회학의 렌즈를 통해 세상에 대한 더 풍부한 해석을 여러분에게 제공하면서 우리가 함께 <한 줄 사회학>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p. 35)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면서도 본인이 학문으로만 접하는 사회학에 대해서 스스로를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며 첫번째 속담풀이를 시작한다. 뒤이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서울 가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개도 텃세한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개천에서 용 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 는 속담들을 사회적으로 풀이한다.

사회학자도 잘 모른다는 사회에 대해 우리도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지만

'자리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부패와 위선을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고

도시 사람들만의 사회적 분위기와 예의가 어떻게 깍쟁이처럼 혹은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는지 모르지 않다가도

SNS 세상에서 '발 없는 말이 천리' 가 아니라 만리 억리를 순식간에 가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회 안전과 안정의 상실에 대해 무뎌지고

데이터는 내가 쌓아주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것이 남의 얘기인줄로만 알며

둘 만 모여도 느껴지는 '텃세' 를 체감하면서도

'친구 따라' 기꺼이 강남뿐만 아니라 그 어디든 따라하고 따라하기도 한다.

비교가 흔해진 시대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티를 못내는 사회가 되었고

'개천에서 용이'나는 시대도 시대도 지났는데

온 세상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지 못해 오늘도 우리는 비오 안오는데 바짓단을 흙탕물로 적시며 걸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쉽게 말해온 '속담'에 대해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어쩌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상상력은 우리를 무지와 무력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사회학은 개인의 무능력과 무지함이 결합해서 빚어지는 체념에 개입하는 공적인 시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원하는 미래 사회를 생각하는 상상력입니다. (p. 333)' 라며 저자는 사회학적 사고를 시도해볼 것을 권유한다.

읽다보면 철학과 심리학을 오가는 사고실험이나 사회분석들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적 경계를 더 모르겠는 안개속으로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사회학의 범주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이 생각할 수 있는 성찰의 논리적 정점의 학문들을 엮어서 개인이 아닌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아오는 내내 축적된 그 지혜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그것이 '속담'이었다. 쉬운 속담을 사회학적으로 어렵게 풀어내는 시도는 해봐도 좋고 안해봐도 사는데 아무 지장은 없다. 다만 한낱 속담이 '지혜'라는 것 그 지혜가 사회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새삼 느껴보고 싶다면 저자의 사회학적 속담풀이를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사회적 지혜(=속담)'를 수월히 사용하는 사회학적 사고방식을 이미 하고 있음에 사회를 이루고 사는 개인 한명한명이 모두 사회학자인 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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