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특유의 가볍지만 날카로운 표현은 시작부터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고 고민하며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쫄보 유전자의 본능(p. 9)' 덕분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쉬이 공감이 갔다. 힘세고 덩치큰 존재들을 보면 두근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울한 미래 앞에 잔뜩 쫄아든 인간은 그러나 살아남았고 그 어떤 존재보다 번성했다. 그러한 삶의 흔적이 인간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다. 고전이란 그런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책은 성인용 전래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지만 새롭게 무엇보다 재밌게 호로록 읽혀진다.
'서양의 행운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알고 잡으려 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우리 복은 복이란 걸 잡을 생각도 없이 자기 할 일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어 복이 찾아올 거란 생각이다. (p. 31)' 첫번째 이야기 [복돼지와 김 진사] 이야기 속 김 진사는 크고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늘 하던 작고 보잘것 없는 사소한 일을 그저 꾸준히 열심히 했다. 그 사소함에 복돼지가 찾아왔다. 저자는 이야기 하나하나 마다 간결한 교훈으로 마무리한다. '사소함이 전부다. 그 사소함에 복이 깃든다. (p. 35)'
[구복 여행] 에서는 총각이 복을 찾으려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때가 '탄다'라는 말은 때가 '묻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떡볶이 국물이 떨어져서 얼룩지는 것은 더러워졌다고는 해도 때가 탔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들러붙어 묻어나는 것을 '탄다'고 한다. 때가 그러면 때가 탄다고 하고, 복이 그러면 복이 탄다고 한다.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묻어나는 것을 '복이 탄다'고 한다. 복울 움켜쥐려는 것은 복을 타는 행위가 아니다. 과정에서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고 배어들어야 복을 타는 것이다. (p. 51)' 복은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고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다. 그 과정 속에 복이 저절로 묻어나 복을 타게 되는 것이었다.
'남을 보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남을 보고 주눅들 것도 없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멍청해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감당할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p. 63)' [차복이와 석숭이] 에서는 복을 갖고 태어나지 않아도 남의 복을 빌려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차복이는 석숭이의 복을 빌려 쓴 것을 알았기에 행복하게 사용하고 다시 그 복을 돌려주었다.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빌려 쓴 것을 알고 다시 돌려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복을 찾고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복을 조금은 때론 많이 빌려 쓰고 있다고. '행복의 지혜는 고마움이었고, 행복의 열망은 고마움으로 남에게 되돌려주는 거였다. (p. 69)'
[세종에서 세조로] 는 옛이야기 까지는 아니지만 태종과 세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의 시대 속 공물납부에 관련된 비교를 통해 염치와 아량에 대해 풀어낸다. '아량과 염치는 닭과 달걀이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나 서로가 먼저여야 하는 관계다. (p. 87)' 가진자가 아량을 베풀줄 알고 얻은자가 염치를 생각할 줄 알면 세상사 다툼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이 염치와 아량을 아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염치와 아량을 모른다면 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박복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옹고집은 도플갱어 가짜에게 시달리는 정도(?)로 곤욕을 당하다가 뉘우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벼락 맞아 죽은 부자도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옹고집전>의 핵심이 숨어있다. 정답은 옹고집이 뉘우친 것의 실체가 뭐냐에 있다. 그러니까, 옹고집은 대체 뭘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뉘우쳤느냐는 거다. (p. 94)' 저자의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일 때마다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흥부전의 놀부는 탈탈 털렸고 <장자못 전설>의 부자는 벼락맞아 죽었다는데 [옹고집전] 의 옹고집은 고생은 좀 했을지언정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다 찾았다. 왜였을까? 옹골참과 옹졸함의 한끗 차이를 알려주는 저자의 해석에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
저자의 옛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늘 매력적인데 [혹부리 영감] 이야기도 그러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노래를 불러라'다. '진심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생이다' 라는 이야기다. (p. 113)' 가난한 혹부리 영감의 노래와 욕심낸 혹부리 영감의 노래가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은 도깨비들이 한번 속지 두번 속냐의 버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가? 이것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후로도 재미난 옛 이야기와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교훈으로 마무리되는 어른용 전래동화 다시 읽기는 계속된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속 공주의 선택, [자린고비] 가 자식에게 알려주는 마음을 아끼는 법, [두더지의 결혼] 에서의 자신감, [내 복에 먹지] 의 자존감, [신선, 감사, 구렁이 친구] 가 알려주는 욕망과 욕심의 차이, [수박씨 먹던 때를 기억한 재상] 이 알려주는 배은망덕, [학동과 구렁이] 속 나쁜 습관의 결과는 모두 익숙하게 알아왔던 전래동화를 삶의 지혜가 가득한 고전으로 새로 읽게 만들어준다.
서양고전이라 불리는 그리스로마고전이니 북유럽이야기는 '신화'라고 고전의 격을 높이는 듯 하면서 우리네 고전은 '전래동화'라고 어리고 미숙하게 보는 것 같은 시각은 나만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 이야기든 옛이야기들은 어차피 인간들의 이야기였고 조상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허구적 현실들이었다는 점에서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서양신화를 즐겨 읽는 이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내복을 짓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ㅎㅎ
ps. 우리네 고전의 진수를 새롭게 깨달으려면 저자의 전작 <문제적 고전 살롱>을 먼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순한 에세이보다 더 파격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