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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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달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 이어 세 권째 읽는 은유 작가의 책이다. 이 책이 나온 지 꽤 되었는데 독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회자 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역시나 읽으면서 은유 작가 글을 참 잘 쓰는구나, 책도 정말 많이 읽었구나, 감탄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직업적인 글쓰기를 했다는데 그런 시간이 축적된 것 같았다. ‘최전선이라는 단어가 왠지 비장하면서도 멋지게 느껴졌는데, 연구공동체의 글쓰기 강좌명을 제목으로 쓴 거였다. 어떤 목적에 갇히지 않고 자기 삶을 자기 시대 안에서 읽어내고 사유하고 시도하는 삶의 방편이자 기예로서 학인들과 함께 했던 글쓰기 수업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글쓰기 주제는, PART1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 PART2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PART3 사유 연마하기 PART4 추상에서 구체로 PART5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부록에는 학인들의 글 세 편이 들어있다. 어떤 주제든 글쓰기 수업에서 다룬 내용이 자세히 들어있어서 글쓰기 수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무언가 끄적이는 걸 좋아하다 독학으로 글쓰기를 해온 나로서는 참여자인 학인들과 만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열띤 분위기가 무척 부럽게 느껴졌다.

 



어느 때 보다 글쓰기의 효용이 중시되고 있다. 책을 좋아하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편으로써 글쓰기를 하게 되는 등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 왜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일까. 은유 작가는 스무 살 무렵 명동 성당을 지나다 본 일을 신문에 투고하고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 같다. 은유 작가는 사회문제가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생생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의 일처럼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현재 은유 작가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서문에서 중심 잡기’, ‘풀어 내기’, ‘물러 앉기’, ‘지켜 내기’, ‘발명 하기’, ‘감응 하기’, ‘함께 하기에는 은유 작가의 글쓰는 삶의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를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았던 이유는 순전히 감응력덕분이라고 했다.

 



연애 문제로 마음 졸이는 친구에 감응하고,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에게,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의 거친 손에 감응하고 그때마다 글로 쓰고 나면 신체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정희진은 한 권의 책이 내 몸을 통과하고 나면 그 전후가 달라야 한다고 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책을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한 편의 글을 완성한 희열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은유 작가처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마다 가진 관심사를 잘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관심의 분야는 다를지라도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철학과 삶의 태도를 알아가면서 자신의 글쓰기를 성장시키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학인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 이야기를 통해서 공감한 부분이 많았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적어가며 읽었다. 글쓰기는 자기를 치유하는 힘은 물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포용하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 예를 들자면, 글쓰기 과제를 학인들과 함께 합평하는 시간에 여성의 사적인 경험, 어쩌면 시시콜콜한 말들이 누구에게는 수다인지 토론인지 알쏭달쏭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대 남학생 학인에게 물었더니, 엄마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단다. 은유는 이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신체 변용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관점 하나 바꾸기가 어려운데 이런 시간을 통해 관성의 사고와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 갱신을 촉구하는 강력한 긴장을 합평 시간에 맛볼 수 있다고 했다.

 



여럿이 읽기로 니체의 책읽기를 소개하는 부분도 좋았다. 역시나 어려운 책은 함께 읽기를 통해서 여러 해석을 들을 수 있고 완독의 기쁨도 누릴 수 있다. 나 또한 20대 시절에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 접었던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고통은 해석이다’(p72)라고 했다는 니체의 인용 글이 환하게 해석되는 전율의 기쁨을 느꼈다! 마음공부에서 자주 들었던 얘기와 아주 비슷하게 다가왔다. 마음은 실체가 없는데 자신의 어지러운 관념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시나리오를 쓰고 해석하면서 고통을 키운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독서 내공이 생긴 덕분일까. 얼마 전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사 두었으니 조만간 들추어봐야겠다.

 



은유 작가는 이렇게도 시를 열심히 읽었구나, 감탄했다. 학인과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에서 시집을 읽고 낭송하고 토론하는 얘기도 있어서 반가웠다. 참으로 알찬 글쓰기 수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학인들의 글쓰기 과제를 일일이 읽고 첨삭까지 해서 리뷰했다니. 그렇게 성실하고 사명감을 갖고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으니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가 되었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좋아서 한 일이었겠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 좋은 글은 울림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글이며,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에 나오는 대로 생활무한(生活無限)”이고 글쓰기도 무한이다.’(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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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0-02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에는 내 삶이 반영되기 마련이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말이죠. 그래서 가끔 두렵습니다.
이렇게 써도 되나, 하고 고민을 할 때도 있어요. 너무 주관적인 생각인 것 같은 경우예요.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은 참 유익할 것 같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비교할 수도 있고...^^

모나리자 2023-10-02 22: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자기를 용기있게 드러내는 것, 자기검열 등을 극복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은유 작가는 말합니다.
그쵸. 함께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시간은 정말 값진 시간이
될 것 같아 부러웠어요.
10월에도 들쓰기 응원할게요~페크님.^^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 계속 쓰려는 사람을 위한 48가지 이야기
은유 지음 / 김영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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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은유 작가의 책을 읽었다. 글쓰기를 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컨셉인가, 제목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작가의 책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이어 두 번째 읽게 되었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지 13년이 되었고 세 번째 쓴 글쓰기 책이란다. 글쓰기 수업과 강연, 칼럼을 연재하는 등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로서 글쓰기 현장에서 경험한 다양한 에피소드까지 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 책 한 권을 낸 나로서는 칼럼 연재나 글쓰기 수업, 강연에 대한 이야기에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가며 읽었다. 마치 버킷리스트를 쓰듯이 나중에 내가 해보고 싶은 목록을 적어가며. 그러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나만의 멘트를 기록해 보기도 했다.

 



내용의 구성은 1. 혼자 쓰다가 주저한다면 2. 일단 써보고자 한다면 3. 섬세하게 쓰고 싶다면 4.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이렇게 네 가지 주제에 48개의 질문과 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초보자부터 좀 더 잘 쓰고 싶고 나아가 글로써 삶을 꾸려가고 싶은 이들까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다. 요즘은 글쓰기 교실이 많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혼자 글쓰기를 하다 보면 이게 맞는 건지 답답한 마음도 들고 슬럼프에 빠지는 일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또 자신에게 과연 재능이 있는 건지, 글쓰기 수업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지 등 혼자 글을 쓰며 의기소침한 이들을 위한 친절한 답변이 들어있다. 이렇게 방황하는 글쓰기 초기 시절을 작가는 글쓰기의 유년기라고 하면서 글쓰기 수업에서 학인들에게 자주 반복했다는 격려의 말을 들려준다.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쓴 글이 잘 쓴 글입니다.”(P19)

 



빙그레 미소가 퍼지지 않는가.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 쓴 글이 잘 쓴 글이라며 다독여 주는 말에 큰 응원을 받은 느낌이다. 더불어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은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내면을 다지는 풍요의 시기로 생각할 수 있어야 오래 쓰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고 한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혹평을 받거나 내가 쓴 글보다 더 잘 쓴 글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분발의 계기로 삼는 것이 낫다고 한다.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말은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P61~62)

 



다양한 지면에 글을 쓰면서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라서 그런지 글에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성폭력 여성, 노동현장의 참사 사건 등 그들의 인권을 위해 발로 뛰고 그러한 현실을 알리기 위한 글을 쓰는 작가에게서 소명의식과 글쓰기 철학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널리 알려서 함께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 때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쓰기는 나쁜 언어를 좋은 언어로 바꾸어내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배워야만 가능한 일이고요.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어떤 단어를 쓸 때 타자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는지, 배제나 차별의 시선은 없는지, 살펴보고 쓸지 말지 판단해요. 좋은 언어는 적어도 타인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언어라고 생각해요.’(P167)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모든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자기 생각을 내보이고 논증해서 독자를 설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날것의 생각과 사례를 다듬고, 데치고, 익혀서, 먹을 만한 이야기로 접시에 담아내 제공하는 거죠.’(P227)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전문가가 되고 성공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렇게 되려면 글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고 계속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에 메이슨 커리의 예술하는 습관을 읽은 적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하여 수전 손택, 코코샤넬 등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인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어떻게 창조적 영감을 길어 올렸는지 하루의 루틴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글쓰기는 또 다르지 않을까. 육아와 가정을 돌보는 전통적인 사회 통념상 여성 작가의 글쓰기는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도 연과 실을 쓴 앨리스 매티슨의 글쓰기 에피소드가 나온다. 육아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면서 지하실에서 글을 썼다는 얘기다. 어떻게든 글쓰는 시간을 만들고 꾸준히 실천할 때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거라서 인상 깊었다. 노래를 잘 부르고 말을 잘 하려면 잘 듣는 것이 우선인데 글을 쓰는 것도 결국 잘 듣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다. 시인과 작가는 관찰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여기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냥 흘리지 말고 듣고 메모하는 습관이 글을 쓰는 재료를 축적하는 일이겠다. 작가는 어떤 이야기든 편견 없이 빨아들이는 커다란 귀, 작은 차이도 구별해내는 섬세한 귀가 있는 사람이 작가일 거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책은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심 있는 독자가 많이 찾게 될 것 같다. 또 나만의 책을 쓰고 싶은 사람들도 말이다. 유명한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에피소드를 인용한 글이 풍성해서 좋았다. 나의 글쓰기 역사를 돌아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부터 시작해서 20대 이후로는 방송 매체에 투고하거나 각종 백일장에 열심히 쫓아다니던 추억이 있다. 그리고 오래도록 로망이었던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계속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작가들에게 있어 글쓰기는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이사벨 아옌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악마를 쫓아내고 천사를 맞이하고 제 자신을 탐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입니다.”(P288~289)라고. 글쓰기는 나를 알아가는 일이다. 많은 독자가 자신을 탐구하는 길에 동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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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8-09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쓰기는 누구와의 경주가 아니라 나 홀로 묵묵히 걸어가는 긴 여정입니다.
노력해도 성과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서 어느 책에서 읽은 대로- 작가에게 필요한 건 인내- 인 것 같아요. 긴 시간 동안 인내를 발휘하려면 글쓰기를 즐길 수 있어야 하겠죠. 즐기지 못하면 그만두게 될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글을 쓰는 이들은 글쓰기만큼 매료되는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일 듯합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우선 책을 좋아하여 많이 읽는 것부터 하는 것이 글쓰기의 출발점일 듯.^^

모나리자 2023-08-16 23:0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만의 페이스로 걸어가는 길이지요.
어떤 일을 10년 후에도 하고 있으면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도 10년 후에도 글쓰기를 하고 있는 나를 소망합니다. 읽고 쓰고의 반복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글쓰기 재능을 키우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함께 쭈욱~ 쓰는 사람이 되어요. 페크님.^^
 

생물이 생기기 이전에는 지구에도 한때 메마르고 황량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구는 지금 생물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생물이 없었던 시기의 어느 날, 탄소를 기본으로 하는 유기 분자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은 그 분자들에서 어떻게 비롯될 수 있었을까? 이 최초의 유기 생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와 같이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의 생물로 진화할 수있었단 말인가? 아, 그리고 그 원초의 생명이 진화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인식 기능을 갖추게 됨으로써 이제는 스스로의 기원을 탐구할 수있게 됐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단 말인가? - P65

1만 년 전 지구상에는 젖소나 사냥개나 씨알이 굵은 옥수수 따위는없었다. 이 동식물들의 조상은 현재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그동안 인간이 그들의 번식과 특성을 지속적으로 조작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특정 형질의 품종들만을선택적으로 번식시켰다. 예를 들어 목양견이 필요하면 똑똑하고충성스러우며 양떼를 잘 지킬 줄 아는 개를 골라 양치기에 필요한 유전 형질을 조장하는 쪽으로 키웠다. 떼를 지어 사냥하는 개는 양몰이에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엄청나게 커진 젖소의 젖은 우유와 치즈에 대한 인간 욕심의 반영이다.  - P71

19세기에 진화론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한 토머스 헉슬리 Thomas Huxley가 다음과 같이 한탄한 적이 있다. "다윈과 윌리스의 저작물들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의섬광이었다. 그 섬광으로 드러난 길은, 그 길이 집으로 향하고 있든 말든, 무조건 따라가게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내가 ‘종의 기원』의 핵심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나는 참담했다. 바보같이 왜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콜럼버스와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도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을 것이다.… 변이성, 생존을 위한 투쟁 그리고 환경 조건에의 적응력과 같은 개념들은 우리 사이에 이미 충분히알려져 있지 않았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과 월리스가 그 밤의어둠을 헤쳐 없앨 때까지 종의 기원으로 이르는 길이 변이성, 생존 경쟁, 환경 적응 등의 개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중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P75

1950년대 초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운이 좋게도 나는 위대한 유전학자이자 방사선이 돌연변이를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허먼 조지프 멀러Herman Joseph Muller의 실험실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헤이케게가인위 도태 혹은 인위 선택의 예임을 가르쳐 준 것도 멀러였다. 유전학의 실용적 측면을 배우기 위해서 나는 두 개의 날개와 큰 눈을 가진 작고 유순한 생물인 초파리 Drosophila melanogaster 를 가지고 실험을 하면서 많은시간을 보내야 했다. (초파리의 학명에는 검은색 몸체에 이슬을 좋아하는 생물이라는 뜻이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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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고지도를 파는 떠돌이 도붓장수였다. 그는 옛 지리학자들에 관한 서적과 또 그들이 쓴 책들을 열성적으로 읽었다. 그중에는 에라토스테네스, 스트라본,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도 들어 있었다.  - P54

지구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예측한 규모와모양 바로 그대로였으며, 대륙들의 윤곽선은 옛 지도 제작자들의 능력과 솜씨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주었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알렉산드리 - P54

아의 지리학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모두 무릎을 치며좋아하지 않았을까?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약 600년 동안 인류를 우주의 바다로 이끈 지적 모험을 잉태하고 양육한 곳이다. 그러나 그 대리석 도시의 위용과 영광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피지배층이 느꼈던 배움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이 겪어야 했었던 지배층으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로 옛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은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 P55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전 경호원을 시켜 건설한도시다. 알렉산더 대왕은 외래문화를 존중했고 개방적 성격의 인물로서 지식 추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이 종 모양의 잠수 기구를 타고 홍해 바닷속으로 내려간 세계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그 사건의 사실 여부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않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탐구 정신을 충분히 알 수있기 때문이다.  - P55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그 부속 박물관들이었다. 박물관 museum이란 사실 이름을 그대로 옮기면 뮤즈muse라고 불리던 아홉 여신의 전공 분야에 각각 바쳐진연구소였다. 그 전설의 도서관은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고, 오늘날에는 당시 별관에 불과했던 세라피움 Serapeum 이라는 축축하고 잊혀진 지하실만 하나 남아 있다. 세라피움은 본래 세라피스 Serapis 신에게 받쳐진신전이었는데 후대에 지식에 봉헌된 성전으로 바뀐 셈이다. 물질적인 유물로는 썩어 부서져 가는 책꽂이 선반 서너 개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에는 지구에서 가장 거대했던 도시의 심장이자 영광이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진정한 의미의 연구 현장이었다. - P56

도서관 소속 학자들은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 코스모스 Cosmos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 어이며 카오스 Chaos에 대응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한다. 그리고 우주가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이 이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모여 물리학, 문학, 약학, 천문학, 지리학, 철학, 수학, 생물학, 공학 등을 두루 탐구할 수 있었다.  - P56

무엇보다도 도서관의 생명은 모아 놓은 책들에 있다. 도서관 관계자들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모든 언어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들을 해외로 보내서 책을 사들였고 장서를 확충해 갔다.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한 상선은 관리의 검문을 받았는데, 검문의 목적은 밀수품 적발이 아니라 책 찾기에 있었다. 책 두루마리가 발견되면 즉시 빌려다가 베낀뒤, 사본은 도서관에 보관하고 원본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정확한수치를 어림하긴 어렵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는 일일이 손으로 쓴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이 50만여 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많던 책들은 다 어떻게 됐는가? 알렉산드리아와 그 대도서관을 낳은 - P58

고전 문명이 붕괴되면서 도서관도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장서의 극히일부만이 후세로 전해졌고 그나마 남은 것도 사방으로 흩어져서 고작글 몇 줄, 종이 몇 조각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들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남은 몇 줄의 문장이나 종잇조각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애를 태우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  - P59

현대의 과학은 고대 세계가 알고 있던 과학의 수준을 넘어선 지오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자료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이가 빠진듯 여기저기 뚫려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도서 대여중 하나만남아 있었더라면 과거의 수수께끼들을 많이 밝혀낼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안타깝기가 이를 데 없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바빌론의 사제인 베로소스 Berosos가 쓴 3권짜리 세계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 작품은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P59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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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체로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졌다. 지구가 조그마한 세계‘ 라는 인식 역시, 현대인들이기원전 3세기라고 부르는 시절에 당시의 거대 도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비롯되었다.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에는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다. 그를 시기하고 경쟁의 상대로 여겼던 어떤 사람은 그를 "베타"라고 불렀다고 한다. 베타는 알다시피 그리스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무슨 일을 하든그 분야에서 여지없이 세계 둘째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베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가 손을 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는 ‘베타‘가 아니라 아주 확실한 ‘알파‘ 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천문학자이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극 평론가였으며 수학자였다. 『천문학Astronomy』에서 시작하여, 『고통으로부터의 자유On Freedom from Pain』 까지 그가 쓴 책의 제목만 보아도 그의 관심이 광범위하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책임진 도서관장이었다.  - P47

 800킬로미터의 50배이면 4만 킬로미터, 이것이 바로 지구의 둘레인 것이다.
제대로 나온 답이었다. 그때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도구라고 할만한 것은 막대기, 눈, 발과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코자 하는 정신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가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겨우몇 퍼센트의 오차로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00년 전의실험치고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따라서 에라토스테네스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행성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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