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고 싶어 우리소설을 집어 들었다. 즐겁다, 우리글을 읽는 것이. 편안하다, 내가 속한 곳의 이야기가. 그럼 재미는...? 암튼 최근에 읽은 세 편의 우리소설이다. 공교롭게 모두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난감하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틀리지 않다면 비평가들은 왜 침묵하는가?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난감한 소설이다. 거북한 번역투 문장 때문에 난감하고, 공감할 수 없는 인물 때문에 난감하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에 난감하고, 전작 <엄마를 부탁해>의 신뢰가 무너져 난감하다.
퇴고의 문제인가? 반복되는 번역투 문장은 번번이 눈에 거슬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생각을 하거나’, ‘기억을 하거나,’ ‘상상을 하지’ 않는다. 늘 ‘생각이 되고’, ‘기억이 된다’, ‘상상이 된다’고 말한다. ‘한 대의 버스’같은 표현은 어떠한가? 정현종 시의 제목 ‘한 꽃 송이’처럼 시적 의도가 있는 영어식 표현인가?
꾸미는 말이 꾸밈을 받는 말과 너무 멀리 떨어져 두 번 세 번 읽게 하는 문장도 있고, ‘세상에 태어나 첫 책을 훔치다’같은 알 수 없는 문장도 등장한다.(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훔친 책이다‘라는 뜻. 쿨럭~~) 이런 어색한 문장을 방기하는 작가에게 비평가들은 문체를 운운하더라.
더욱 답답한 건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캐릭터,라고 작가는 생각할 지 모르지만 공감율 마이너스 백프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의 아픔 때문에 상처입은 청춘이기는커녕 상처입고 싶은 공주님같다. 그들이 말하고, 입고, 생각하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태도에서 눈곱만치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글쓴이는 진정 시대의 아픔 때문에 몸서리를 쳐본 기억일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되지’ 않는 걸까?
지난해 <엄마를 부탁해>는 오랜만에 읽은 우리소설이었다. 좋은 소설이었고, 크게 공감했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뚤어진 편견조차 불식시키며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작품이다. 그 작가가 이 작가란다. 정말인가? 결국 신경숙은 신경숙인가?
출간된 지 15년만에 <새의 노래>를 읽었다. 은희경이 명성이 하늘을 찌를 시기부터 우리소설과 멀어진 것 같다. 은희경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으니 은희경의 책임은 아니다. 뒤늦게 은희경의 소설을 집어든 것은, 신경숙 소설이 준 충격을 잊고자 함이다. <어디선가...>의 마지막 백페이지를 결국 읽어내지 못하고 책장을 덮은 나는 본능적으로 <새의 노래>를 펼쳐들었다. 반대급부를 찾는 본능적인 선택이었고,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어디선가...>에 공감할 수 없는 ‘공주’가 등장한다면, <새의 노래>에는 12살 여자가 등장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에 생>에 등장하는 모모같은 애늙은이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이기에 성장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아이다. 사랑스럽다. 추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민소설’이란다. 그런데 이제 읽다니.(추천해주어 고맙소! 나의 견고한 편견을 깨뜨리는데 당신은 종종 큰 역할을 한다우.)
암튼 199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참으로 낯설었다. 옛스러운 문장말이다. 이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확실히 다른 문장이었는데, 거북함은 없었으나 낯설었기에 입에 착착 감기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읽었다. 문장을 음미했다기보다 낯선 어감과 리듬에 익숙해지기 위해 재촉하지 않았다. 덕분에 작품 말미에는 주인공 진희의 위악적인 어투가 오히려 곰살맞게 다가왔다. 작가의 의도인가? 16년 동안 우리소설의 문장이 변한 것인가? 이후 출간된 은희경의 다른 작품을 보거나, 같은 세대 작가의 같은 시기 작품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첫 단편집 <냉장고>는 괜찮았으며(좋은 의미로), 두 번째 단편집 <까마귀가 쓴 글>은 힘겨웠다.(나쁜 의미로) 첫 장편 <러브 차일드>는 힘겨웠지만 괜찮았다.(좋은 의미로)
뜻밖에도 <러브 차일드>는 SF소설이다. 그렇다고 본격 SF는 아니다. SF적인 세계관 위에 펼쳐진 참혹하고 불우한 시대극이다. 그 시대는 물론 저 먼(혹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참혹하다. 읽기 힘들다.
힘겨운 책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자 한자 꾸욱꾸욱 눌러 쓴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참혹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니 어찌 힘겹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작품과 문장을 대하는 작가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김유진의 <늑대의 문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물론 순전히 참혹한 이미지 때문에 책읽기가 힘겨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요인은 이미지가 이야기를 앞선다는 점이다. 참혹함과 황폐함을 낯선 이미지로만 직조하기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그 SF적인 상상력이 분명히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