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그거 참아보려고 도움을 청한다, 막걸리에게.
근데 취한다.
원래 막걸리 슬렁슬렁 마시며 음주독서하며, 음주음악감상하려했는데...
술만 달린다. 끄억~~
술김에 한곡 나눠본다.
어렸을 땐 그냥저냥이었는데, 나이 먹으니 이 밴드가 왜 그리 좋은지.
역시 강한놈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라는 진리!
펄잼, 오래간다. 그들의 음악은 점점 깊고 단단해진다. 그리고 여유로워진다. 

pearl jam, 'daughter + it's ok' NY live, 2000, 8, 24

http://www.youtube.com/watch?v=_GYlgOGy0xk&feature=fvst
 

무대 말미에 “괜찮아, 괜찮아. 도망치거나 숨을 필요 없어. 이건 기회야.”를 연창하는 에디 베더...('it's ok'는 원래 배드문이 부른 펑크 넘버다.) 
그렇게 다독거려주고 격려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처음 올리는 주정이며, 노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orgettable. 2011-09-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어제 같은 시간에 취해있었군요 ^^

lazydevil 2011-09-18 11:34   좋아요 0 | URL
포겟님도 나홀로 음주클럽인가요?ㅋㅋ

글샘 2011-09-1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걸리 주독엔... 복국이 최고입니다.

lazydevil 2011-09-18 11:38   좋아요 0 | URL
막걸리 한병 1300원, 복국 한끼 무려...^^;;;
아 시원한 복지리가 생각나는 21도C 가을 아침입니다.

글샘님, 반갑습니다.^^

쥬베이 2011-09-1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주독서를 하시다니^^
저한테 lazydevil님은 항상 모범생 이미지였는데 말이죠ㅋㅋㅋ

lazydevil 2011-09-18 11:37   좋아요 0 | URL
전말이죠, 늘 범생이를 가장한 호박씨였슴다.ㅋㅋ

카스피 2011-09-1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막걸리라....저도 요즘에 막걸리+홍어+돼지수육+김치에 푹 빠져있답니다.오늘 저녁도 나홀로 홍어와 김치와 막걸리 한잔 쭉 걸쳤지요^^

lazydevil 2011-09-19 00:38   좋아요 0 | URL
막걸리+홍어+돼지수육+김치!!!
거의 아토스+프로토스+아라미스, 그리고 달따냥에 필적하는 최강멤바네요!!
급땡긴다, 막걸리~홍어~ ㅜㅜ
 

<나와 마릴린> 이지민, 그책

‘그냥 그렇게 묻히기는 아까운 작품’이라는 아는 사람의 멘션과 ‘1954년에 우리나라에 방문한 마릴린 몬로의 통역을 맡았던 한국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발상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최근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급 매혹되어 있는 터라 <나와 마릴린>은 게으른 자의 필독 리스트에 올랐고...
아는 사람의 멘션과 달리 이 작품이 그냥 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만 확인했다.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특유의 섬세함은 돋보이지만, 그뿐이다.(미안하게도 이건 내가 우리나라 여성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제일 불편해하는 대목이다. 묘한 날카로움과 신경질이 묻어나는 여성 캐릭터!)
주인공 앨리스 킴의 상처와 고뇌는 너무나 보편적이다. 그의 갈등과 상처를 이야기하는데, 굳이 ‘1950년대’가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마릴린 몬로의 방한 역시 마찬가지다. 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전쟁 직후 폐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과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몬로가 이뤄내는 우스꽝스럽고 슬픈 역사적 부조화의 풍경이 아니었는가? 안타깝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창비

베스트셀러가 맞긴 맞는가 보다. 요즘 지하철이나 동네 문화체육센터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독자의 대부분은 여성.
김애란은 분명 재능 있는 작가다. 우울한 이야기를 웃으며 이야기할 줄 안다. 등장인물만 웃는 게 아니라, 독자들도 웃게 만들 줄 안다. 아니 울릴 줄도 안다. 작가의 재능이 가장 반짝이는 대목은 대화다. 전반적으로 대화가 좀 많은 편인데, ‘뭐 불필요한 대화 없나?’하는 못된 마음으로 읽었다. 없다. 모든 대화가 가볍고 리듬감 넘친다. 그야말로 촌철살인. 혼자 심각한 척하거나 징징거리지 않아서 좋다.
한 대목 아주 짠했다. 펄럭펄럭 책장을 넘기다 말고 밑줄을 그었다. 이 작가 참 감정을 쌓아올릴 줄 아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조금 뒤로 가니 그것이 뒤통수였다. 물론 작가는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설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전’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은 주인공만이 아니다. 진심으로 상황에 몰입하며 눈물을 흘렸던 독자에게 모든 것이 ‘뻥’이었다고 고백하는 소설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심정으로 작품 후반부를 읽었는데, 참으로 헛헛했다.
더불어 작품 말미에 실려있는 주인공 한아름이 남기고 간 글 ‘두근두근 그 여름’은 사족이 아닌가 싶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황현진, 문학동네

계간지를 구독하는 덕분에 올해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을 공짜로 받았다. 읽었다. 재미있는 성장소설이다. 어쩌다보니 요사이 성장소설 몇 권을 내리 읽게 되었는데,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의 순서가 제일 끝머리다. 먼저 읽은 작품을 열거하면, <한밤의 아이들>, <두근두근 내 인생>. 신인작가로서는 불리한 대진운이라 할 수 있지만, 이와 상관없이 작품에 대해 딱히 할 말 없다. 굳이 말하자면, 지난해 수상작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는 것 정도.
한 가지 실수라면, 수상작에 내놓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덕담을 위한 자리라지만 공감할 수 없는 칭찬을 쏟아내는 심사위원들의 태도가 거슬린다. 독자들이 애정 없는, 혹은 형식적인 칭찬을 못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는가? 솔직히 소설가 윤성희의 심사평을 제외하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공정한 관심이 느껴지질 않는다. 수상작으로 뽑기가 마뜩치 않았을까? 내키지 않으면 뽑지 말고, 뽑았으면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라. 그것이 신예작가와 독자에 대한 예의다.
생각해보니, 지난해 수상작의 심사평을 읽었을 때도 속이 틀어졌던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심사평 따위는 읽지 않는 것이 방법일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린산책 2011-09-19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쏙 들어오는 단순명쾌 소개글.
트위터에선 여기와는 또다른 모습의 데빌님 ㅋ
앞으로 자주 뵈어용.

lazydevil 2011-09-20 12:26   좋아요 0 | URL
트친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200 페이지 정도까지 꼼꼼히 읽고, 그 이후는 듬성듬성 넘겨가며 읽다. 글이 못마땅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읽은 글도 있었거니와, 이 정도면 신형철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어떤 글을 쓰는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단상은 이 정도에서 그치고, 그의 본격 평론집인 <몰락의 에티카>를 읽고 싶다. 출간된 순서는 <몰락의 에티카>가 앞선다. 하지만 젊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만나는 순서는 어쩐지 <느낌의 공동체>가 먼저인 것이 좋을 듯싶다. 

  

 

 

 

 

 

 

신형철은 짧은 단평에서도 지식을 자랑하고, 멋을 부리고, 감수성을 뽐낸다. 그런데도 거슬리거나 거북살스럽지 않다. 무엇보다 글이 참 쉽다. 그야말로 글재주가 돋보이는 글들이다. 그래서 더욱 진짜배기가 실린 <몰락의 에티카>가 궁금해진다.
쉬운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반대로 어려운 글은 독자를 진저리치게 만든다. 특히나 현학을 뽐내려는 과시욕과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의 글을 보면 짜증스럽다 못해 한심하다.
언젠가 원로감독의 회고전을 위한 소책자를 읽은 적이 있다. 소책자 첫머리에 알만한 영화평론가가 쓴 원로감독에 대한 헌사는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불과 2페이지짜리 헌사를 20분 넘게 낑낑거리며 읽었는데,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난감.
‘개별적 영화들의 차이가 빚어내는 운동을 XXX(감독 이름)으로 보자’는 둥, ‘급변하는 시대적 공기와 제도와 환경의 작용과 관습과 포기되지 않은 예술적 자율성과 상호작용으로 개별 작품을 바라보라’는 둥, ‘그 과정을 통해 XXX을 주어가 아닌 술어로 드러내라’는 둥, ‘XXX적이라는 하나의 메타 언어로 되돌아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둥... 이게 무슨 개소린가!! 평생 한국적인 것을 고집했고, 영화로만 삶을 이야기해온 노감독이 이 ‘개소리’를 끝까지 읽었을까? 읽었다면 무슨 소리를 했을까?

닥치고 영화나 봐.
멍멍...

현학으로 자기 한심함을 폭로하는 아이러니. 영화연구가와 영화평론가들의 글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낯 뜨거운 코미디.

아무튼, 한국문학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변화를 모르는 문예지는 언제부턴가 관심 밖이다. 유명작가가 출간한 수준 미달의 신작에 대해 입바른 평론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는다. 시대저항과 예술혼을 어쩌구 하면서 지들끼리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세기가 바뀌도록 이어오고 있지 않나? 차라리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소설이나, 스티븐 킹의 신작을 읽는 것이 감동적이고 신난다. 예술혼을 맛보고 싶으면 부커상 수상작이나,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씨름하는 것이 낫다 싶다.

그런데 신형철같은 글 잘 쓰는 평론가의 책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한국문학에 대한 순정과 싫은 소리 못하는 소심함은 여전히 마뜩치 않다. 하지만 그가 소개한 아름다운 시와, 아름다운 시를 소개하는 아름다운 글은 불신으로 가득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리고 그가 소개한 시에 손이 간다.  

<몰락의 에티카>가 기대된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낮에나온반달 2011-07-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의 공동체가 먼저인 게 더 좋을 듯하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느낌의 공동체는 짧은 글 위주(산문집이라 불러달라 말하는 것처럼)인데 몰락의 에티카는 본격 평론이니까요. 몰락의 에티카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처음 인사드리죠? 방문은 자주 하고 즐겨찾기도 옛날옛적에 해두었지만 댓글은 처음이네요. 고령화가족, 에브리맨, 아그네스 리뷰를 인상깊게 봤습니다. 아, 아래의 쥬베이님 말씀처럼 잔학기 서평도요. 입에 발린 칭찬 같은 건 못하시더군요. 화려한 수사 없이 핵심에 곧장 다가서는 글솜씨가 부럽습니다. 드러내진 않지만 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운 건, 글이 자주 올라오진 않는다는 거.^^

반갑습니다.

2011-07-18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9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11-07-1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완전 공감한 부분이 있어요.
[어려운 글은 독자를 진저리치게 만든다. 특히나 현학을 뽐내려는 과시욕과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의 글을 보면 짜증스럽다 못해 한심하다.] <-- 바로 여거ㅋㅋㅋ

저도 예전에 쓴 서평 읽어보면, 잘난체 하는게 몇개 있더라고요
그럴때마다 놀라서 얼른 수정하곤 하는데...참 글쓰는 이들의 불치병인듯 합니다ㅋㅋㅋ
lazydevil님 무더위 잘 이겨내시고요.
화끈한 소설하나 추천 부탁드릴께요~ 아주 HOT~! 한걸로요ㅋㅋㅋ

lazydevil 2011-07-18 22:54   좋아요 0 | URL
이열치열, 열공모드이신 쥬베이님^^
놀랄 필요도 없고, 수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쥬베이님글은 잘난체 하는 거와 멀거든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HOT~!라... 글쎄요.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번역본을 읽었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더군요. 잠시 더위를 잊을 정도로요.ㅎㅎ

꿈꾸는섬 2011-07-18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느낌의 공동체 읽는 중인데 몰락의 에티카가 몹시 궁금하답니다.^^
느낌의 공동체를 먼저 만난 게 더 낫다는 님의 말씀에 전적을 공감이요.^^

lazydevil 2011-07-18 23:03   좋아요 0 | URL
섬님, 반갑습니다.
신형철이라는 평론가, 제법 널리 읽히고 있군요. 다행입니다.
<몰락의 에티카>는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 한국문학을 등안시해서 좀 꺼림칙합니다. 평론만 읽고 멋대로 작품을 제멋대로 짐작하는 후안무치한 짓거리를 할까봐요. 아마도 하겠죠^^
 

단편 ‘사육장 쪽으로’는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담고는 있는 주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등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정말 괜찮은 소설이다.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는 재미없다. 표제작 ‘사육장 쪽으로’에 드러난 주제의식, 글쓰기 방법 등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 8편이 모아놓은 단편집이지만 마치 한 작품을 읽는 느낌이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표제작만큼 강렬하지 못하다. ‘사육장 쪽으로’는 두 번째 실려있다. 이미 최고점을 찍은 작품집은 뒤로 갈 수록 그 힘을 읽는다. 작가는 세상을 인식하는 개성 있는 시선이 가지고 있고, 독특한 문체로 그것을 표현하여 괜찮은 작품을 써냈지만, 독자는 거듭될수록 지친다.

우연히 끼게 된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소설가였다. 편혜영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는 “우리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자연스레 편혜영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편혜영은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였고, 두 권의 작품집과 한권의 장편을 출간한 작가였다. 그리고 호평 일색이었고, 여러 차례 수상경력도 눈에 띄었다. 결국 두 번째 작품집 <사육장 쪽으로>를 읽게 되었다.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독자들의 생각도 문단의 평가와 같을까?하는 생각 말이다. 이건 작가의 재능, 혹은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육장 쪽으로’는 훌륭한 단편이고, 함께 실린 작품들도 좋은 소설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재미가 없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미안하지만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쓰면 평론가들이 좋아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쓰면 독자들과의 소통은 요원하겠구나 싶었다. 그가 ‘아오이가든’이나 ‘사육장 쪽으로’같은 뛰어난 단편을 쓴 작가라할 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성급하다. 첫 장편 <재와 빨강>을 읽은 뒤에야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에게 공평하리라. 하지만 선뜻 끌리지 않는다. 장편이 ‘사육장 쪽으로’의 확장판이라면 기꺼이 반기겠지만, ‘사육장 쪽으로’와 닮은 작품들의 장편화라면... 거부감이 앞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래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고 싶어 우리소설을 집어 들었다. 즐겁다, 우리글을 읽는 것이. 편안하다, 내가 속한 곳의 이야기가. 그럼 재미는...? 암튼 최근에 읽은 세 편의 우리소설이다. 공교롭게 모두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난감하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틀리지 않다면 비평가들은 왜 침묵하는가?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난감한 소설이다. 거북한 번역투 문장 때문에 난감하고, 공감할 수 없는 인물 때문에 난감하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에 난감하고, 전작 <엄마를 부탁해>의 신뢰가 무너져 난감하다.
퇴고의 문제인가? 반복되는 번역투 문장은 번번이 눈에 거슬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생각을 하거나’, ‘기억을 하거나,’ ‘상상을 하지’ 않는다. 늘 ‘생각이 되고’, ‘기억이 된다’, ‘상상이 된다’고 말한다. ‘한 대의 버스’같은 표현은 어떠한가? 정현종 시의 제목 ‘한 꽃 송이’처럼 시적 의도가 있는 영어식 표현인가?
꾸미는 말이 꾸밈을 받는 말과 너무 멀리 떨어져 두 번 세 번 읽게 하는 문장도 있고, ‘세상에 태어나 첫 책을 훔치다’같은 알 수 없는 문장도 등장한다.(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훔친 책이다‘라는 뜻. 쿨럭~~) 이런 어색한 문장을 방기하는 작가에게 비평가들은 문체를 운운하더라.
더욱 답답한 건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캐릭터,라고 작가는 생각할 지 모르지만 공감율 마이너스 백프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의 아픔 때문에 상처입은 청춘이기는커녕 상처입고 싶은 공주님같다. 그들이 말하고, 입고, 생각하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태도에서 눈곱만치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글쓴이는 진정 시대의 아픔 때문에 몸서리를 쳐본 기억일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되지’ 않는 걸까?
지난해 <엄마를 부탁해>는 오랜만에 읽은 우리소설이었다. 좋은 소설이었고, 크게 공감했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뚤어진 편견조차 불식시키며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작품이다. 그 작가가 이 작가란다. 정말인가? 결국 신경숙은 신경숙인가?


출간된 지 15년만에 <새의 노래>를 읽었다. 은희경이 명성이 하늘을 찌를 시기부터 우리소설과 멀어진 것 같다. 은희경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으니 은희경의 책임은 아니다. 뒤늦게 은희경의 소설을 집어든 것은, 신경숙 소설이 준 충격을 잊고자 함이다. <어디선가...>의 마지막 백페이지를 결국 읽어내지 못하고 책장을 덮은 나는 본능적으로 <새의 노래>를 펼쳐들었다. 반대급부를 찾는 본능적인 선택이었고,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어디선가...>에 공감할 수 없는 ‘공주’가 등장한다면, <새의 노래>에는 12살 여자가 등장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에 생>에 등장하는 모모같은 애늙은이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이기에 성장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아이다. 사랑스럽다. 추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민소설’이란다. 그런데 이제 읽다니.(추천해주어 고맙소! 나의 견고한 편견을 깨뜨리는데 당신은 종종 큰 역할을 한다우.)
암튼 199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참으로 낯설었다. 옛스러운 문장말이다. 이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확실히 다른 문장이었는데, 거북함은 없었으나 낯설었기에 입에 착착 감기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읽었다. 문장을 음미했다기보다 낯선 어감과 리듬에 익숙해지기 위해 재촉하지 않았다. 덕분에 작품 말미에는 주인공 진희의 위악적인 어투가 오히려 곰살맞게 다가왔다. 작가의 의도인가? 16년 동안 우리소설의 문장이 변한 것인가? 이후 출간된 은희경의 다른 작품을 보거나, 같은 세대 작가의 같은 시기 작품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첫 단편집 <냉장고>는 괜찮았으며(좋은 의미로), 두 번째 단편집 <까마귀가 쓴 글>은 힘겨웠다.(나쁜 의미로) 첫 장편 <러브 차일드>는 힘겨웠지만 괜찮았다.(좋은 의미로)
뜻밖에도 <러브 차일드>는 SF소설이다. 그렇다고 본격 SF는 아니다. SF적인 세계관 위에 펼쳐진 참혹하고 불우한 시대극이다. 그 시대는 물론 저 먼(혹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참혹하다. 읽기 힘들다.
힘겨운 책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자 한자 꾸욱꾸욱 눌러 쓴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참혹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니 어찌 힘겹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작품과 문장을 대하는 작가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김유진의 <늑대의 문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물론 순전히 참혹한 이미지 때문에 책읽기가 힘겨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요인은 이미지가 이야기를 앞선다는 점이다. 참혹함과 황폐함을 낯선 이미지로만 직조하기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그 SF적인 상상력이 분명히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