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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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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무진장 짜증났다. 이 책의 저자는 교수기도 하고 오랜시간 공부를 한만큼 학문에 대해서 나보다 쌓은 것은 많은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는 너무나도 '권위적'이라 읽는 내내 그 불쾌한 소절에 내내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것 같다.

 

저자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신봉자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만이 가장 합리적이고 옳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책에서 역사학자들을 서슴없이 (거의 인격적으로) 깎아내려간다. 저자는 이렇게 언급한다. "역사학자들이 소재주의에 포획되어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기를 꺼리고 있다. 그들은 다른 영역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다른 질문을 던질 의욕도 없다.(p.117-118)" 이 글만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은 매우 침체되어있고 소극적이며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만이 제대로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유명 대학에서 연구하는 교수라고 해서 역사학자들이 그르다 어리석다 이런얘기를 할 수 있는건가?" 만약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런 것은 겉멋든 권위에서 연유한 '다른 학문 까기' 정도밖에 안된다. 저자는 한편 서양사적 흐름에 한국사를 맞추려는 역사가들의 행위를 어리석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어느정도 인정할 수는 있어도, 저자 그 자신도 서양산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숭배하고 거기다가 조선사를 끼워맞추려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여러모로 아이러니다. 저자 자신은 '역사학자들의 방법론에 따른 성과도 인정한다'라고 체면을 차리지만 바로 이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결국 자신의 오만함을 바꾸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도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 자신의 소양 부족일지는 몰라도 이 책은 여러모로 독자에게 불친절한 책이었다. 주석도 뒤로가서 뒤적거려야 했고, 저자의 문체 자체도 지나치게 현학적이라 이해하지 못한 문장이 자주 나와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그대로 실어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쓰지도 않는 한자가 남발되어있는 왕의 말을 해석없이 그대로 보여주어 이것이 근거라고 하는데 왜 근거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책은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역사학자도 막 까고 그럴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간학문(間學文)'의 시대라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가장 올바른 학문적 방법론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역사학자들의 방법론도, 사회과학자들의 방법론도,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어느것이 특히 더 옳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근대성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근대 만들기'라는 식으로 비판하는데, 나는 저자의 연구도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가 이 책에서 해내려고 한 것은 조선시대의 여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습으로부터 서양의 사회과학이 만들어낸 여러 용어들을 붙이고 체계화하려고 한 것인데, 이것도 일종의 '사회과학적 근대 만들기' 아닐까. 물론 그런 용어 붙이기도 충분히 학계에 지대한 도움이 되는 의의있는 새로운 시도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보다 자신의 연구가 가장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 만들기' 즉,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민족이 '제조'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가 들어갔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탈민족이 더 합리적이다' 비스끄무리한 주장에서 특정 역사학파의 주장을 떠올렸다면, 그건 내가 너무 민감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 자신이 역사학도라서 그런지 역사학자들을 깎아내리는 말에 지나치게 방어적인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의견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만큼 저자의 의견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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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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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의 개>를 그렇게나 혹평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라는 이 책은 참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내가 발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아주 밀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때 인권 변호사를 꿈꾼 적이 있어서 그런지(완전히 그 꿈을 접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이력에도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는 점도 크다.

 

  해외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말로 미국 사회와 유럽 사회의 모습을 어렴풋이 전해듣거나 저자가 매번 비꼬는 <이코노미스트>나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한 식(우리나라의 조X일보나 중X일보라거나)으로 해외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럽이 정말로 살기 좋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우러러보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는 식으로 나름 '중립적'으로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이 책이 그 편견을 깨버렸다. 저자는 실제 현실은 어떤지에 대해 두리뭉실하지 않고 수치와 통계를 들이밀며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를 통해서 유럽과 미국의 진짜 현실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요점을 간단히 말하자면, 유럽은 사회민주주의국가고 미국은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이다. 아무리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유럽이 훨씬 더 살기 좋은 것이다. 그것만은 인정해야한다. 그러한 이유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것이 저자의 주요 관점이며, 나는 대체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 혹자는 '이 사람은 노동변호사잖아. 약간 편향된 관점에서 미국을 더 안좋게 묘사했을지도 몰라'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묘사한 미국 사회의 모습과 한국 사회의 모습이 굉장히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단순한 편견이라 치부할 수도 없다.


  민영화 문제나, 터무니없이 비싼 교육비와 대학 등록금 문제, 규모를 무작정 넓히고 값을 높이기에만 급급하는 도시 계획, 평균 소득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내집 마련,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복지와 무한 경쟁을 숭배하는 분위기. 이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그렇게 훌륭한 '롤 모델(role model)'로서 숭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 사회는 일명 '리틀 아메리카'일지도 모르겠다. 더 씁쓸한 사실은 우리나라는 이 골치아픈 아메리카보다 심지어 더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덜 못나지겠다고' 미국을 따라 신자유주의를 무작정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무조건 미국을 나쁘게 말하는 거 아니냐고 혹자는 질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도 비슷한 말을 했듯이 이것은 사회민주주의라는 한 사상을 숭배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통계의 비교를 통한 일종의 '상식'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롤스도 <정의론>에서 말했듯이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계층에 놓여있는가도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을 쓰고서 미국과 유럽 둘 중에서 택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둘 중 어디가 좀 더 '정의롭다'라고 판단할까?

 

  이 책이 약간 거슬렸다면, 저자가 종종 미국에 대한 강력한 애국심을 표현한 부분이라거나 자신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변명하는 부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원래 미국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을 것이라고 예측해본다면, 그의 이런 태도도 이해는 간다. 일종의 '자기 검열'일지도 모르고, 매커시즘에 의해 '낙인'찍혀 자신의 의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상황에 대해 우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모 판사가 한미 FTA의 급격한 체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때 첫 문장이 '나는 진보 성향이 아니다'였던 것을 떠올리면 이런 점까지 한국과 미국은 닮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의 사회와 너무 비슷한 나머지 감정이입까지 되는 미국 사회와 이와는 대조되게 편안한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 유럽 사회. 한국은 이제 미국과 함께 되돌릴 수 없는 거센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타버렸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안타까움과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계속 수렁으로만 빠지지 않을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은 점점 대기업의 위력이 민중에게까지 침투하고, 미국처럼 제조업을 소홀히 하면서도 돈놀이(부동산 투기나 한방을 바라는 주식 투자)에 집중하는 모습이 점점 강해지고만 있다.

 

  이런 한국이 짊어나갈 앞으로의 운명이 얼마나 밝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전히 한국의 많은 정치가들이 이미 증명된 미국의 실패를 '성공'이라고 떠들어대며 무작정 미국을 따라하려고만 한다. 마치 어리석은 광대같은 모습이다. 미국이 정말로 성공한 케이스이고, 그래서 따라하는 것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에 비해서 물론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유럽인들은 기회 비용과 편익을 생각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효율성을 사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유럽인들도 결코 바보는 아니기에.

 

  저자는 이 많은 이야기들을 상당히 문학적 표현들과 실제 경험의 묘사를 이용하여 훌륭하게 글로 구현해내고 있다. <루소의 개>보다 읽기가 상당히 용이했다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일명 '유럽식 자본주의'가 탄생한 장소라 일컬어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느낀 자신의 기분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사회과학서를 뛰어넘은 감성적 아우라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표현적, 내용적 측면 등 다양한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으면서 또다시 생각해본다. 오늘 드디어 2012년을 맞이했다. 2012년은 총선도, 대선도 걸려 있는 중요한 해다. 그 두번의 기회로 한국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는 빅뱅은 없겠지만, 이 '리틀 아메리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이 약간 답을 준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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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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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친한 친구가 '역사책은 사실만을 줄줄 늘어놓은 걸 읽어야 하는 거라서 지루한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 책이 처음으로 가르쳐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역사책에 지다니 이건 내 능력부족을 탓해야할지 아니면 책과 스타일이 안 맞았던 것이라 생각해야할지 모르겠다. 결국 300페이지 가량만 읽고서 책을 덮어버렸는데, 그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의 좋았던 점에 대해서 조금 이야깃거리를 풀어놓고 싶다.

 

  루소나 흄은 고등학교 윤리 정도를 배웠다면 누구나 익히 보고 들었을 거장 철학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윤리 시간에는 철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이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의 개>와 같은 책은 그 철학자들이 왜 그런 이론을 내세우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저술한 것이 그 사람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의 정세와 큰 연관이 있었던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상당히 신선했다. 철학도 아닌 것이, 역사도 아닌 것이. 루소와 흄 각자의 일상 에피소드나 저 두 철학자가 연관되면서 발생한 각종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이론적 토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확장해나가는 저자의 필력은 상당히 괜찮았다고 본다. 실제로 100페이지 정도는 정말 재미있었다. 무려 <에밀>을 쓴 루소가 자기 자식들을 갖다 버렸다는 경악스러운 행동을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들은 적은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루소가 상상 이상의 편집광적 괴짜라는 사실)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 기분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루소와 흄 두 인물뿐만이 아니라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주목했다기보다는 그 흐름을 구성하던 작은 요소에 주목하여 자세히 보여주는 미시적 접근에 근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역사 수업에서 귀로만 들었던 살롱을 뚜렷한 이미지로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이 책의 강점은 '철학자'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철학자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책이 끝까지 읽히기 어려운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보여줌'이 너무 과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적당히 그들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읽다가 보면 상당히 비슷한 패턴의 에피소드들(루소가 망언을 함->루소가 망명함->누가 루소를 거둬들여줌->루소는 그 누군가에게 또 망언을 해서 결별함... 무한반복...!)에 질리게 된다. 너무 많은 인물들이 책 속에서 난무하고 이름도 다 외우기 전에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하다고 삼국지처럼 독자들을 확 사로잡는 스토리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계속 읽다 보면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고는 하나 이런 '촌극'도 한 두번으로 족하지 계속 반복되는 것은 별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들을 서술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약간 요약과 생략의 미(美)를 살림이 어떠하였을까. 예를 들어, <뺨 세 대>만 확 살린다던가...!

 

  이 정도의 글을 써낼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책을 마구 비판하고 있으니 내 모습이 상당히 우습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 자체는 철학자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의 철학을 결부시켜 보여주려는 시도와 18세기 살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도를 살려냈다고 본다. 그렇지만 너무 자세히 보여주려는 나머지 '질리게' 만든다는 게 단점이다. 내가 300페이지에서 책을 덮었던 이유도 '나머지 100페이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구나'라며 질려버렸던 점이 컸다. 그래서 연대기적으로 한 인물의 일거수 일투족을 소개하는 것보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인물에 대한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중점으로 보여주었다면 이 책을 읽기가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다 안 읽게 된 것은 '꼰대' 루소가 비슷한 '찌질한' 짓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것에 대한 짜증도 상당히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꼰대'의 이론이 흄의 말보다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는 점일 것이다. 학문과 인간은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점에서 가끔 학문과 인간 사이의 단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쉽게쉽게 '인간 철학자'가 아니라 '인간' 철학자인 이유이다. 어쨌거나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루소(저번 학기 레포트의 주제가 루소였던 적도 있다)의 됨됨이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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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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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에 관심이 많고 가끔 스스로 글을 쓰기도 하는 자칭 '글쟁이'지만, 부끄럽게도 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적이 없었다. 내심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던 것도 같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이 선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웬일. 철학적 시 읽기의 흥미로움을 알게 해 준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일단 책의 형식에 대해서 좋았던 점을 말해보고 싶다. 보통 인문과학서를 읽을 때 예쁘고 신기한 그림을 기대하기는 힘든데, 이 책은 문학이라는 일종의 '예술'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그런지 일러스트가 돋보였다. 추상적이어 보이지만 글의 내용과 묘하게 일치하는 것 같아서 심지어 회화 미술에는 문외한인 나일지라도 즐겁게 보았다. 그리고 한 챕터의 말미에는 꼭 주제와 관련된 참고도서에 대한 소개가 있어 더 확장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친절한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적 측면도 좋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에게는 마르크스 이외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철학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철학에 대한 깊은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해가 잘 될 정도로 저자는 철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내고 있다. 각종 어려운 인용구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한몫 했다고 생각했다. 생판 남 같아보이는 시와 철학 사이의 연결고리를 기막히게 만들어내는 저자의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인문학적 사유가 돋보였다(인문대생으로서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마술사 같다는 느낌까지.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아시겠지만~'이라는 하는 철학자도 죄다 모르고 있어서 가슴아팠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이 책이 무작정 시와 특정 철학 담론을 연결시킨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인상깊게 읽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에는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사랑과 자유'라는 테마가 있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한국의 시인들과 서양의 철학자들이 '사랑과 자유의 철학'이라는 매개로 연결된다는 것을 관조하고 있는 것은 실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이유는 시와 철학 안에 담겨 있는 인간 본연의 자유와 사랑은 그리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럴 때면 '인간의 진정한 본질, 존엄함이란 없다'라는 뉘앙스의 푸코나 몇몇 위대한 철학자의 생각이 다 맞지는 않을거라는 소소한 반감을 가져본다.

다만 고정희와 시몬 베유 부분은 크리스찬적인 색채가 강해서 뿌리깊은 무신론자(?)인 나에겐 읽는 데 어색함이 있었다.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한몫 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해방신학'을 소개하면서 자유를 논하는데, 그 찬찬한 논의가 인상깊었고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약간이나마 없앨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즘 사랑에 대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고 있는데, 이 책이 말하는 사랑에 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사랑을 논한 파트에서 인상깊었던 것이 김행숙과 바르친, 채호기와 맥루한 챕터였다. 각각의 챕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구를 가져와본다. 

이제 포옹을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과도 같고,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와 같다고 한 시인에게 공감할수 있으신가요? (...)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가 되려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 그러나 포옹으로 타자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으니까,(...) 포옹은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를 함축하고 있는 겁니다. (p.123) 

엑스터시는 '바깥으로 나가 있는 상태'(...) 바깥이란 바로 타자가 있는 자리 (...) 결국 엑스터시를 목적으로 하는 섹스는 근본적으로 타자와 소통하겠다는 인간의 절절한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지요. (p.132. 이전에 친구에게 들었던 바타이유가 말한 성욕의 정의와 유사해서 놀랐다.) 

한편 자유에 대한 논의도 참 좋았다고 느낀 것이, 김수영과 신동엽의 자유... 그들의 시를 말하는 부분에서 내가 추구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문학(시는 아니고 소설이지만)에 대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랐는데, 김수영이나 신동엽이 말하는 자유의 문학, 문학의 자유가 딱 평소 생각에 맞는 것 같아서 놀랐다. 역시 인간의 본연적 사고를 향해 파고들면 비슷하게 생각하게 되는 특성이 있긴 한가보다. 인용을 좀 해본다.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학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51)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란 경제적 구조나 정치적 구조를 변혁시켜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을 지배하거나 남에게 복종하려는 야만적 동물성을 원천적으로 극복할 때에만 가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p.168)

간만에 좋은 책을 읽은 것 같다. 이 저자의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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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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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이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혁명'에 대한 역사나 '독재'에 대한 역사에 관심이 많다.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맹신자들'의 대중운동이 자주 출현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해당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0월 추천에 넣지는 않았지만 사실 흥미롭게 보고 있던 책이었다. 혁명이나 독재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서 공부한 적은 있지만 그 원리에 대해서는 좋은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책에 별점 4개를 줬다. 내용 자체의 설득력에 대해서는 4.5에 가깝지만, 세상에 비친 대중운동의 특징을 전부 보여주고 있는지,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니 4개를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졌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설득력'있다는 점, 균형있는 시각을 보여주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여러 대중운동이 공통점이 많다는 가정은 모든 운동이 똑같이 이롭다거나 똑같이 해롭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설명하고자 할 뿐이며...'(p14. 인용자 강조)

 보통 대중운동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좌파'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저자의 경우 대중운동이 성향을 막론하고 극좌에서 극우까지 아우른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예시도 한 쪽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건으로부터 논거를 제시한다. 특정 대중운동에 대한 판단 또한 유보함으로써 읽는 독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대중운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의 특징을 고찰하겠다는 요지가 돋보인 것 같다. 

 사실 나는 처음에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맹신자들'(번역의 뉘앙스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라고 칭하는 것에서 약간 마음이 불편했었고 끝까지 책을 잘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꽤나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이 책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감탄했던 부분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에 고찰하며 저자는 '빈민(가난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보통 '빈민은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라는 결론에 그치는 데 비해, 저자는 빈민의 유형을 하나하나 나눠가면서 어떤 빈민은 보수성을 지니고 어떤 빈민은 급격한 변화를 지향하는지 고찰하는 세심함을 보이고 있다.  

'반향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p.52) 

'공동체적 양식이 붕괴되고 부패한 곳에서는 대중운동이 파고들어가 수확을 거둘 수 있다.'(p.60) 

 이처럼 이 책은 꽤나 설득력있고 합리적으로 보이려는 맥락을 견지한다. 사실 상당히 그럴듯한 논리다. 허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에서 그렇게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쓴 합리성 때문에 이 책의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일단 책의 형식상에 대한 아쉬움이다. 약간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정제되지 않은 문체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번역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읽는 도중 종종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문장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는 풍부한 예시를 들며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큰 흠은 아니다. 번호를 125개로 나눈 것도 그렇다. 굳이 그렇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소제목을 더 자세히 다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한다. 어떤 항은 3줄, 어떤 항은 열몇 페이지라니... 내용상의 체계성과 합리성을 형식적으로도 견지해 주면 좋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지 의문이 드는 내용도 있었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보이려고 '쓰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에서 처음부터 견지하고 있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 변화를 선호한다(p.21)' 

 이는 마치 이 사회에서 가장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며, (그렇기에 대중운동은 약간 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좌절'의 의미를 '이 사회의 부당함을 느끼는 것' 정도로 확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또 모르지만, 이 저자가 말하고 있는 '좌절한 자들'의 정의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쉽게 말해, 대중운동의 참여자의 범주를 정하고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 과정 자체에 무언의 뉘앙스가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 그 과정에서 삭제되는 것도 많고.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내 자신이 대중운동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사람인데도 나는 저자가 말한 어느 유형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좌절한 이들만 대중운동을 한다고 보는 관점은 좀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소위 '데모'를 깔보고 멸시했었고 지금도 그런 까닭 중에서 실제로 이런 말들을 한다. 열심히 노력하지는 않고 자기가 상황이 안 좋으니까 괜히 운동한다는 논지인데, 이 책은 (절대로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논지에 충분히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간에 서 있더라도, 만약 사회에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충분히 대중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동기가 항상 '자기부정을 향한 갈망'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일반화와 법칙화를 중시하는 사회과학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불편함'을 조금 더 강화시킨 것이 이 저자가 든 예시에서 언뜻 투영되는 뉘앙스 때문이었다. 저자는 p.71에서 강한 공동체와 대중운동 참여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며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한참 잘 읽고 있는데 순간 이런 말이 눈에 띄었다. 

'유대인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시오니즘이 출현하여 공동체 안에 그들을 감싸 안으며 소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은 신의 섭리나 다름없는 듯하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은 고향과 가족, 회당과 민족, 국가와 혁명 정당,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된, 실로 귀중한 안식처이다.'(p.71) 

'일본의 눈부신 근대화는...(페이지를 못찾겠네요)'

 순간 갸우뚱하며 이 책의 저자가 유대인인가를 알아봤을 정도다.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려 애썼다는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보게 된 건 작고도 큰 오점으로 생각되었다. 만약 정말로 좌우 편향되지 않아 보이는 책을 쓰려고 했다면, 예시를 드는 것에도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나름 마지막 파트에서 대중운동의 긍정성을 약간 다루려고 한 점은 어쨌거나 중요하지만, 이러한 앞의 파트에서 이미 편견이 생겨버렸는지 약간 꼬아서 읽게 된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일반화(한계도 있었지만)를 통해 대중운동의 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 책이라 흥미롭게 읽은 것 같다. 앞으로 대중운동을 접하게 될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이 책에서 본 것들을 이것저것 적용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통해서 이 책에서 맞다고 생각한 것, 빠졌다고 생각한 것 등에 대해 더 심도 있는 생각이 가능할 것 같다. 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뜻깊게 읽은 듯 싶다. 물론 저 사람들이 맹신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해서 보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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