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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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녹지 않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태우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눈 결정체는 알 수 없는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켰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람들은 눈송이가 스며들 일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주복 같은 옷을 입었고, 야외 외출과 환기는 절대 금지 사항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괴설이 내리기 시작한 후 언제 어느 곳에든 하얗고 반짝이는 방부제 가루, 가짜 눈이 있었다. 땅에 묻거나 태워야만 하는 눈을 처리하기 위한 매립지로 백영시가 선택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났다.


눈을 소각해 없애는 작업장 '센터'가 지어졌고 폐허처럼 변해버린 도시 백영시로 밤낮없이 눈이 실려왔다. 모루는 그곳에서 매일매일 도착하는 무수한 눈을 태우고, 태우고, 또 태웠다. 그렇게 녹지 않는 눈이 내린 지 7년째 되던 해, 이모가 사라졌다.⠀


차갑지 않은 눈이라니. 이게 정말 눈이 맞을까? 눈송이는 높은 기온과, 내 체온에도 녹지 않았다. 6월 중순, 초여름이었고, 등교 직전 뉴스에서 본 기온은 27도를 웃돌았다. 결정체의 모양이 일반적인 눈송이와는 달리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훨씬 밝게 반짝였다. 꼭 진짜 눈을 흉내 내어 만든 모형처럼. 그런데 곧 눈송이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 주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p.17)


설 연휴 동안 『스노볼 드라이브』 원고를 읽으며, 언젠가 이 소설처럼 녹지 않는 눈이 정말로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부에 닿으면 발진이 일어나는 눈,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눈,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일상을 잃게 하는 재앙. 불과 2019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의 세계라고 생각했을 이야기가 마냥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또한 인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일상을 잃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루는 실종된 이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센터에 남는다. 고된 작업, 건조함에 부르트는 살, 매일 눈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사체들. 그럼에도 이모가 다른 사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까 봐 모루는 온갖 쓰레기가 모여드는 센터를 떠날 수 없었다. 기숙사에서 일어나 셔틀버스를 타고 작업장에 도착해서 눈을 퍼담고 퍼나르는 일상, 당장의 생존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과거의 평범했던 일상들은 모두 잊혀진다. 그러던 어느 날 모루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이월이 센터에 취직한다.⠀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전의 일상이 어땠더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이제 돌아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데. (p.74)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바람을 쐬고 한가롭게 거닐던 거리들,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모여 맥주잔을 부딪히던 일상, 카페에서 오랜 시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휴가를 맞춰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던 시간들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래도 요즘은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곤 한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지루하기만 했던 학교, 포도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평범한 하루, 들뜬 마음이 가득하던 졸업식 풍경 같은 것. 흰 눈에 뒤덮인 세상, 온몸을 가리는 똑같은 방역복을 입고 다녀야 하는 무채색의 현재 속에서 모루는 이월을 보며 모두 각자의 색깔을 가졌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남쪽에는 아직 포도를 재배하는 곳이 있대."


잊고 있던 예전의 빛깔들이 흑백의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까지 물들여 줄 수 있을까. 흰 눈과는 다른 색의 세상이 오기는 할까. 지금 우리에게도 다른 세상이 오기는 할까?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모루와 이월이 내딛는 걸음은 코로나로 지친 우리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준다. 아무도 길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이모도, 우리의 일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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