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과 살인귀
구와가키 아유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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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미오는 10년 전 묻지마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간 뒤로 삶 자체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됐습니다. 그런 미오에게 이번에는 동생 히나마저 살해당하는 비극이 닥칩니다. 하필 아버지를 죽인 소년범이 만기 출소한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미오는 그저 두려울 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히나의 과거를 캐던 언론이 그녀에게 보험 사기범 또는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는 점. 미오는 히나의 무고함을 밝히려 애쓰지만 파견직으로 대학 행정실에서 일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대학생 나기사가 미오를 돕겠다고 나섭니다. 의도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미오는 그와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점차 악화되고 괴한들의 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위의 줄거리는 사실 이 작품의 초반부를 요약한 것에 불과합니다. 구도 자체가 워낙 복잡하게 설계된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반전이 거듭되면서 이야기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것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동생 히나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의문의 대학생 나기사와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선 미오의 분투가 초중반부를 장식한다면,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만기 출소 후 종적을 감춘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한 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 미오가 어쩌면 자신이 다음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그 소년범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게 중반부 이후 엔딩까지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거기다가 10년 전 아버지가 살해당하기 직전의 어린 미오와 히나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왠지 불안한 폭탄처럼 느껴지는 미스터리와 함께 사이코패스 소년범의 잔혹무도한 독백들이 막간극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어서 내내 독자의 오감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온갖 위험한 사람을 등장시켜 보려고 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사람(제 기준으로는) 한두 명밖에 없습니다. 미오는 자신에게 닥친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세상이 고통을 주는 쪽고통 받는 쪽으로 양분됐다고 여기게 됐고, 자신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도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고통 받는 쪽의 사람들이라 체념하며 살아왔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을 고통을 주는 쪽’, 즉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캐릭터로 포장했고 그들이 미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또 파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통 받는 쪽의 무력감에 빠진 미오의 절망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동시에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히나에 이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쉴 새 없는 반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듯한 트릭의 향연도 대단합니다. 사건은 물론 캐릭터마저 반전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에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르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부만 해도 기대했던 것에 비해 다소 밋밋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려를 했는데, 읽는 도중 그런 구성마저도 실은 작가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어느 한 줄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 복잡하고 정교한 설계가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설정된 위험한 사람들역시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 받는 쪽이라 스스로를 규정하며 불안한 심리를 내보이는 주인공 미오의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사건과 인물과 심리를 지저분하지도, 작위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게 잘 직조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23만부를 기록한 판매고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게 보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반부에 실린 해설에 따르면 구와가키 아유의 작품은 대부분 잔혹한 사건이나 정상이 아닌 등장인묾의 심리를 다루고 있고, 작가 스스로도 앞으로도 놀랍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어서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설에서 거론된 처음 만난 사람달궈진 못이라는 작품이 특히 궁금해졌는데 레몬과 살인귀가 좋은 성적을 거둬 이 작품들도 조만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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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방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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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미스터리 소설집입니다. 한 편을 제외하곤 2020년부터 2022년에 걸쳐 계간 미스터리에 실렸던 작품들인데,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통해 읽은 적이 있지만 (미안하게도)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진 않았습니다. 수록작을 읽던 도중 기시감이 들어 예전에 써놓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서평과 요약해놓은 줄거리를 보고서야 이미 짧게나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을 모은 소설집이라 그런지 일관된 주제의식과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어떻게?’보다는 ?’를 좇으며,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연과 운명의 드라마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라고 했고, 후반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도 “(사연의 세계, ) 동기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외적인 미스터리 작품집이라고 지칭했듯 수록작 대부분은 사연과 동기, 그리고 그것들이 촉발시킨 심리적 불안정과 동요를 잔혹한 범죄 혹은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의 변주라 할 수 있는 푸른 수염의 방은 복수극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미스터리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그림으로써 짧은 분량에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입니다. 역시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가 떠올랐는데 그와는 달리 홍선주만의 새로운 설정이 가미돼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등단작인 ‘G선상의 아리아는 어려서부터 폭력과 착취에 길들여진 소년이 사이코패스에게 지배당하다가 스스로 괴물이 돼버리는 이야기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앞선 두 수록작이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의 성격이 도드라졌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살짝 결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모는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으로, 요약하자면 사이코패스의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인생 모토는 세태를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 다른 수록작들과는 톤 자체가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무겁고 애틋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로, 행복이라곤 찰나의 순간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불운과 불행에 짓눌려 살아온 한 여자와, 첫 만남부터 그녀의 애증의 대상이 됐던 한 아이의 비극적인 사연을 그립니다.

 

시작과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비극의 주인공이 독자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누가 범인?’ 스타일의 사건 중심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미를 맛본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규격화된 미스터리 서사에서 벗어나 사건 이면의 사연과 가해자의 동기와 비극의 민낯을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필력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주제나 소재를 다룰 때 억지로 무게와 난해함을 앞세운 문장에 기대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럼없이 재미와 반전을 추구한다고 밝혔던 작가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들을 구사하여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두 편의 장편이 나오는데,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나는 연쇄살인자와 결혼했다POD 출판이라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반면, ‘푸른 수염의 방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장편 심심포차 심심 사건은 제목 자체가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래도 찾아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앤솔로지와 계간지를 통해 탄탄한 필력을 입증 받은 홍선주의 장편이 기대되는 건 분명합니다. 비록 다섯 편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름 깊은 인상과 믿음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독하고 센 이야기를 홍선주 특유의 재미와 반전을 담아 장편으로 펴낸다면 주저하지 않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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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도쿄 하우스
마리 유키코 지음, 김현화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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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방송국 개국 60주년 특별기획으로 ‘1961 도쿄 하우스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됩니다. 1961년의 생활상을 그대로 구현한 집합주택 단지에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3개월을 살아내기만 하면 500만 엔이라는 거금의 출연료가 주어집니다. 원래는 가난해도 희망과 웃음이 흘러넘치던 살기 좋은 옛 시대를 만끽하는 리얼리티 쇼였지만, 제작회의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구도와 갈등 조장 등 시청률을 위한 설정들이 가미됩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두 가족 나카하라, 고이케 은 이름과 성격까지 바꿔달라는 제작진의 기이한 요구를 수용하며 집합주택 단지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3개월간의 불편한 옛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출연자 한 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리얼리티 쇼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모두 일곱 편인데, 2016년 처음 소개된 고충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할 만하지만, 실은 신간이 나오면 빨리 읽고 싶어 안달 나는그런 팬이어서가 아니라 읽고 나면 불쾌해져서 더는 읽고 싶지 않은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탓에 읽다 보니 어느 새 대부분의 작품을 읽어버린, 좀 이상한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혹은 이먀미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마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고 할까요?

 

시작부터 어둡고 음울한 게 마리 유키코의 특징인데, ‘1961 도쿄 하우스는 리얼리티 쇼라는 소재 때문인지 전작들과는 달리 가볍고 경쾌하게 출발합니다. 혹시나 마리 유키코의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초반을 벗어나자마자 리얼리티 쇼 이면에 자리 한 갖가지 탐욕과 일그러진 감정들이 슬쩍슬쩍 그려지면서 예의 불길함과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리얼리티 쇼를 준비하는 제작자들 일부에게서 다른 의도가 감지됐고, 쇼의 무대인 재건축을 앞둔 쇼와 시대의 집합주택 단지자체도 뭔가 어두운 과거를 숨기는 듯한 인상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제 1961년에 이 단지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독자와 일부 등장인물에게만 노출되면서 그 사건이 이 리얼리티 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쇼는 일단 중단됩니다. 하지만 진짜 쇼는 그때부터 시작되고 거듭되는 사건과 연이은 반전이 폭죽처럼 터집니다. 독자 입장에선 은밀한 의도를 가진 채 이 리얼리티 쇼를 이용하려는 진범이 누굴까 짐작해보게 되는데, 문제는 챕터가 바뀔 때마다 그 짐작이 여지없이 빗나간다는 점입니다. 또한 쇼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일부 인물, 그러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인물들조차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해서 독자로선 진범의 진짜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리 유키코의 전작들이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지독하리만치 불편하고 어두운 감정과 심리를 그리는데 주력했다면 ‘1961 도쿄 하우스누가, ?”에 충실한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되는 사건과 반전들은 평소 마리 유키코와 담을 쌓았던 독자들도 좋아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으로 구축돼있어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확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녀 특유의 다크 미스터리와 이야미스는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미지의 힘에 이끌려 꾸역꾸역 찾아 읽은 작품들이라 그런지 그동안 읽은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게는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의 만족도가 무척 높았던 덕분에 0.5개를 더했습니다. 몇몇 애매모호한 설명 때문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마리 유키코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한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아마 다음 신작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작품을 집어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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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의 참극 - JM 북스
도오사카 야에 지음, 김현화 옮김 / 제우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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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의 명문 도오고교에는 극과 극의 쌍둥이 자매가 재학 중입니다.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성적은 바닥권인 후지미야 미야와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성적은 전국 톱클래스권인 사야가 그들입니다. 미야와 사야의 어머니가 꽤 극성스럽다는 소문은 동급생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상은 극성을 훨씬 뛰어넘는 가혹한 통제와 압력이 쌍둥이 자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 폐교사의 교실을 근거지로 연실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학생과 교사의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해결해주는 심부름센터활동을 하고 있는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의뢰를 해온 미야와 사야의 일을 돕던 중 끔찍한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인형의 집의 참극2022년 제25회 보일드 에그즈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에 특화된 상은 아니지만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폭넓은 의미의 장르물을 대상으로 삼은 듯 해서 일단 눈길이 끌렸습니다. (제가 읽은 같은 상 수상작은 코믹+첩보+로맨스물이라 할 수 있는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도쿠나가 케이)가 유일합니다. 그 외에 판타지 로맨스로 분류되는 가모가와 호루모‘(마키메 마나부)가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가 공개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무척 난감해지고 말았는데, ‘인형의 집의 참극이란 제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건이나 끔찍한 사건이란 표현만 있을 뿐 정작 살인이란 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당연히 누가 살해당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살자를 공개하는 게 스포일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우니 다소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더라도 피살자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은 도오고교 2학년생 다키 렌지와 우즈키 레이치입니다. 체격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교내 심부름센터라는 특이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두 사람은 쌍둥이 자매와의 인연으로 인해 사건에 휘말립니다. 친할머니가 영국인이며 무난한 성격에 10대다운 순수함을 지닌 렌지가 쌍둥이 중 하나인 사야에 대한 걱정과 우정 때문에 사건에 뛰어들었다면, 냉정하면서도 때로 4차원 캐릭터를 보여주는 레이치는 말 그대로 집요한 탐정의 자세로 쌍둥이 자매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을 조사합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대부분이 10대인 고교 2학년생들이라 인형의 집에서 참극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치 청춘 로맨스물 같은 흐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가혹하게 통제당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깔보거나 원망하며 악연을 이어가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가 병행되면서 세 모녀가 사는 인형의 집은 점차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참극 이후 렌지와 레이치의 조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명탐정이 추리하고 해결한다!’라는 본격 미스터리 서사로 급전환됩니다.

미스터리 해결에서 주역을 맡은 레이치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사소한 단서들을 끌어 모은 뒤 날카롭지만 살짝 비약에 가까운 추리로 진상을 파악하는 반면, 렌지는 감성에 의지한 수사로 레이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서로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희한하게 궁합이 잘 맞는 콤비라고 할까요?

 

‘10대 고교생 탐정물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인형의 집의 참극10대 청춘물과 살인 미스터리 서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거부감 없이 잘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렌지와 레이치는 나름 흥미로운 명탐정 콤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시리즈화가 결정되어 20239월 후속편(‘괴물과 요람’)이 나왔다고 하니 어쩌면 한국 독자들도 두 사람의 활약을 좀더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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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협주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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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30년 전 어린 소녀를 토막 살해하여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었던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를 징계하라는 일반인들의 청구가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미코시바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가 갑자기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더구나 흉기에서 그녀의 지문이 발견된 탓에 곧바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맙니다. 미코시바는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말과 함께 조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자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코의 과거를 캐던 미코시바는 그녀가 30년 전 자신이 토막살인을 저질렀던 곳에 살았던 사실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체배달부였던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더는 그 과거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계속 그 과거에만 함몰된다면 어떤 사건이 등장하든 동어반복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을 읽고 쓴 서평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때만 해도 진심으로 더는 과거와 얽히지 않은 사건들을 다루기를 바랐지만, ‘복수의 협주곡을 읽고 나니 실은 이 시리즈 자체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그의 과거가 얽히지 않은 사건은 이 시리즈에서 다룰 이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30년 전 그가 저지른 토막살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면으로 다뤄진 복수의 협주곡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습니다.

 

미코시바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반인들을 끌어 모아 자신을 징계하라고 청구한 블로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징계청구자 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익명을 이용하여 제멋대로 선의니 정의니 떠드는 자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이익까지 얻어내려는 미코시바다운 대응입니다. 또 하나는 살인혐의로 체포된 사무소 직원 구사카베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한 직원이지만 미코시바는 그녀에게 조금도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원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의뢰인으로만 취급할 뿐입니다. “자네가 살인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반드시 꺼낸다.”는 건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평소 의뢰인을 대하는 미코시바의 태도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뿐입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미코시바를 당황하게 만든 건 자신이 요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의 고향도, 가족도, 살아온 이력도 전혀 몰랐던 미코시바는 누명을 씌울 만큼 원한 관계에 있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 요코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알게 된 그녀의 과거 30년 전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점 - 는 미코시바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요코의 과거를 캐는 일은 곧 자신이 30년 전에 저지른 토막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미코시바가 품은 의문은 거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풀리는데, 그 해답 역시 미코시바를 꽤나 놀라게 만듭니다.

 

요코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은 다소 싱겁게 전개되고, 미코시바의 추리도 홀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막판에 힘이 살짝 빠진 건 사실이지만, 미코시바가 지목한 진범의 정체는 다시 한 번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갱생과 속죄를 다룬 하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점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미코시바의 탐문과 조사는 실은 30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사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고, 요코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또 하나의 속죄의 계단을 올랐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속죄라는 주제는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20233월에 일본에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살육의 광시곡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노인 요양센터에서 9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최악의 피고를 변호한다는데 과연 어떤 접점을 통해 미코시바의 속죄와 연결될지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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