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른 수염의 방 ㅣ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4월
평점 :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미스터리 소설집입니다. 한 편을 제외하곤 2020년부터 2022년에 걸쳐 ‘계간 미스터리’에 실렸던 작품들인데,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는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통해 읽은 적이 있지만 (미안하게도)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진 않았습니다. 수록작을 읽던 도중 기시감이 들어 예전에 써놓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 서평과 요약해놓은 줄거리를 보고서야 이미 짧게나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을 모은 소설집이라 그런지 일관된 주제의식과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어떻게?’보다는 ‘왜?’를 좇으며,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연과 운명의 드라마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라고 했고, 후반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도 “(사연의 세계, 즉) 동기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외적인 미스터리 작품집”이라고 지칭했듯 수록작 대부분은 사연과 동기, 그리고 그것들이 촉발시킨 심리적 불안정과 동요를 잔혹한 범죄 혹은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의 변주라 할 수 있는 ‘푸른 수염의 방’은 복수극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미스터리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그림으로써 짧은 분량에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입니다. 역시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가 떠올랐는데 그와는 달리 홍선주만의 새로운 설정이 가미돼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등단작인 ‘G선상의 아리아’는 어려서부터 폭력과 착취에 길들여진 소년이 사이코패스에게 지배당하다가 스스로 괴물이 돼버리는 이야기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앞선 두 수록작이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의 성격이 도드라졌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살짝 결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모’는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으로, 요약하자면 ‘사이코패스의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인생 모토’는 세태를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 다른 수록작들과는 톤 자체가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무겁고 애틋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로, 행복이라곤 찰나의 순간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불운과 불행에 짓눌려 살아온 한 여자와, 첫 만남부터 그녀의 애증의 대상이 됐던 한 아이의 비극적인 사연을 그립니다.
시작과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비극의 주인공이 독자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누가 범인?’ 스타일의 사건 중심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미를 맛본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규격화된 미스터리 서사에서 벗어나 사건 이면의 사연과 가해자의 동기와 비극의 민낯을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필력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주제나 소재를 다룰 때 억지로 무게와 난해함을 앞세운 문장에 기대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럼없이 ‘재미와 반전’을 추구한다고 밝혔던 작가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들을 구사하여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두 편의 장편이 나오는데,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나는 연쇄살인자와 결혼했다’가 POD 출판이라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반면, ‘푸른 수염의 방’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장편 ‘심심포차 심심 사건’은 제목 자체가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래도 찾아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앤솔로지와 계간지를 통해 탄탄한 필력을 입증 받은 홍선주의 장편이 기대되는 건 분명합니다. 비록 다섯 편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름 깊은 인상과 믿음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독하고 센 이야기를 홍선주 특유의 ‘재미와 반전’을 담아 장편으로 펴낸다면 주저하지 않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