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속의 여인
로라 립먼 지음, 박유진 옮김, 안수정 북디자이너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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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미국 볼티모어. 매디 슈워츠는 37살 생일을 앞두고 그동안의 안락한 삶에 작별을 고합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간 매디는 열악한 생활을 견디는 와중에 흑인 경찰 페디와 인연을 맺는가 하면 11세 소녀 실종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겨우 볼티모어 신문사 스타에 들어갔지만 기사 작성과는 거리가 먼 잡무만 떠맡으며 혹독한 수습생활을 견디던 매디는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 특종을 따내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사건 관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의 기자들까지 냉소만 보낼 뿐입니다. 더욱 분발하던 매디는 유력한 단서를 손에 넣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1997년 데뷔 이래 세계 유수의 범죄문학상을 석권했다는 로라 립먼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호수 속의 여인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앤솔로지 작품인 라인업을 제외하면) 단 두 작품만 소개됐다는 점도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의외로 보였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기자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예단할 수 있는데, ‘호수 속의 여인은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면을 지닌 작품입니다. 큰 뼈대는 기자 지망생매디 슈워츠가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온갖 종류의 차별 - 여성, 흑인, 종교 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서사와 함께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살아온 매디 슈워츠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연대기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사회 고발물, 여성소설이라는 최소한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까요?

 

10대 때부터 엄청난 카리스마와 외모로 상대방을 장악했던 매디는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는 능력자였지만 17살에 악몽과도 같은 일을 겪은 탓에 18살이 되자마자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와 부랴부랴 약혼을 했고, 이후 겉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지냈지만 실은 자신의 처지가 시녀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집을 뛰쳐나온 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는, 특히 백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언론의 마초들에게 수시로 당하는 지독한 차별을 이겨내는 모습은 1960년대에 태동한 페미니즘 이슈를 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눈길을 끈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과 여성이 열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보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매디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건 새 연인인 흑인경찰 페디입니다. 당시 흑백인종간의 연애가 불법이었던 탓에 데이트는커녕 함께 외출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하던 매디와 페디는 늘 좁은 방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불행한 연인입니다. 경찰인 페디는 매디의 취재와 조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감은 미스터리보다는 당시의 부당했던 사회상을 폭로하는 장면들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는 매디의 행보는 거침없습니다. 정식 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지독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 분투합니다. 페디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매디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매디의 롤러코스터 같은 과거사와 온갖 차별에 대한 서사가 워낙 묵직하게 읽혀서 그런지 미스터리 자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갔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성 역시 미스터리에의 몰입을 방해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즉 매디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탐문하는 챕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 누군가1인칭 주인공인 챕터가 이어집니다. 중요한 조연뿐 아니라 매디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군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건이나 매디에 관해 말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 역시 희한하게도 무척 재미있어서 역설적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 서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곤 합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를 살아간 한 여성의 버라이어티한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지만 개인적으론 의외로 재미있는 책읽기가 됐습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좀더 강렬했더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그 아쉬움은 한국에 출간된 로라 립먼의 두 작품들(‘죽은 자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로 달래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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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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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 단박에 느껴지는, 어딘가 4차원스러운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청춘물은 실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 연작단편집의 첫 수록작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백화점!’이 제20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대상 수상작이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구보 미스미)화소도중’(미야기 아야코)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들인데 이 두 작품 모두 ‘R-18 문학상수상작이라 같은 상을 수상한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를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주인공 나루세 아카리는 각 수록작을 통해 중학교 2학년부터 고교 3학년까지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바라는 꿈만을 위해 돌직구처럼 살아가는 나루세의 삶은 그저 괴짜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4차원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루세가 민폐녀 혹은 반골녀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44년의 역사를 지닌 백화점이 문을 닫게 되자 그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올여름을 세이부에 바칠까 한다.”라는 말과 함께 여름방학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는다든가, “나는 개그의 정점을 찍을까 한다.”라는 뜬금없는 목표를 세우곤 전국적인 만담 대회에 출전하는가 하면, 지금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200살의 수명에 도달하기 위해 규칙적인 운동과 올바른 생활습관을 견지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득 뭔가 하고 싶어지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직진하는 순도 100%의 노력파라고 할까요?

그런 나루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거의 대부분 다나까로 처리된 어미입니다. 애어른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전국시대의 무장이나 미래의 로봇의 말투 같기도 한 나루세의 화법은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절묘하게 조합이 돼서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냅니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또래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나루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 감각 하나가 망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이트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나루세도 성장과 함께 특별한 경험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후회에 사로잡힌다든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든가 - 을 하나둘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 외의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 또래에 어울리는 삶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루세가 좀더 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드는 통과의례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망대로 200살까지 살더라도 나루세는 여전히 나루세로 살아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중엔 나루세가 완전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나루세의 친구들이나 소도시(나루세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시가현오쓰시)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박한 일상과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간혹 울컥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들의 이야기엔 일본소설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행복감이 잘 배어있어서 나루세의 성장담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맛보게 해줍니다.

 

작가는 책머리의 서문을 통해 나루세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 소망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이라는 바람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R-18 문학상수상작의 특별한 맛을 즐기진 못했지만(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19금인데다 이야기가 무척 세고 독합니다), 심각한 장르물 편식 와중에 나루세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과 휴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후속편인 나루세는 믿었던 길을 간다20241월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좀더 큰 세상으로 나와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이 됐을 나루세가 어떻게 자신의 고집과 꿈을 더 단단하게 키워나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나루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꼭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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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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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동성 부부인 아이지아와 데릭이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원한 관계로만 추정될 뿐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의 수사는 거의 답보상태입니다. 피해자들의 아버지인 아이크와 버디는 직접 진상을 알아내기로 하고 위험천만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비영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아이지아가 어떤 일을 보도하려던 게 사건의 기점임을 알게 된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이 살던 집에서 단서를 찾으려 하지만 갑자기 쳐들어온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들들을 살해한 갱단의 정체를 파악한 것은 물론 사건 이면에 한 여자가 연루된 사실도 알아냅니다. 아이크와 버디는 여자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지만 사태는 점점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뿐입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였지만 검은 황무지라는 묵직한 제목과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표지에 이끌려 만났다가 곧바로 팬이 된 S. A. 코스비의 두 번째 한국 출간작입니다. ‘검은 황무지도 그랬지만 묵직하면서도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S. A. 코스비의 서사는 단순한 진실 찾기를 넘어 깊은 여운을 자아내는 다양한 주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는 아들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는 두 아버지의 분투가 메인 줄거리지만, 그에 못잖게 인종, 세대, 성 소수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사회파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흑백 동성 부부였던 아이지아와 데릭은 가족 그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였던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의 커밍아웃에 분노했고 그들의 결혼식을 외면했으며 그들이 살해당하기 전까지도 거의 절연하다시피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두 아버지의 가슴 속엔 돌이킬 수 없는 회한만 남게 됐고, 아들들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끝 모를 자책감과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결국 아들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을 향해 순수한 증오심을 담아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인종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지만 아이크와 버디는 치명적인 전과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갱단과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나이가 든 중년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에 익숙한 전과자라는 이력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버팀목입니다. 아이크와 버디를 상대하는 악당들은 늙은 소금과 후추’(흑백 인종을 일컫는 속어)라며 조소를 보내다가 이내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폭력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잠시 후엔 피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악몽을 경험하게 됩니다. S. A. 코스비의 폭력 묘사는 그리 잔혹한 편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마치 직접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래선지 아이크와 버디가 거침없이 응징을 가하는 장면들은 사이다 같은 통쾌함과 함께 그들의 꺼지지 않을 분노를 100%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피와 살점이 튀는 폭력을 동반한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복수의 여정을 통해 나이 든 두 남자가 많은 것들을 깨달으며 변화하는,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아이크와 버디는 아들들의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깊은 회한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자책감과 죄책감에 짓눌렸던 초반과 달리 두 사람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아들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들이 남긴 손녀 아리아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지만 이제는 아들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가슴 속에 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폭력적이지만 감동적인 스릴러라는 평단의 호평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S. A. 코스비의 최근작은 2023년에 출간된 ‘All the Sinners Bleed’입니다. 두 편의 전작이 모두 호평을 받았으니 빠르면 올해 안에 한국에 소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성까지 가미한 유려한 문장과 묵직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스릴러 서사까지 겸비한 S. A. 코스비의 신작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사족으로... ‘검은 황무지와 달리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에선 적잖은 오타가 눈에 띄었습니다. 한참 몰입해있던 중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오타 때문에 한숨이 나곤 했는데, 단순히 옥의 티라고 보기엔 좀 과한 편이었습니다. 출판 과정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오타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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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창자 명탐정 시리즈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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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에는 출판사가 공개하지 않은 초반 내용이 약간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라와타(はらわた, 창자)라는 별명을 가진 21세의 하라다 와타루는 명탐정 우라노 큐의 조수입니다. 전국 경찰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우라노는 오카야마 현의 작은 마을 기지타니의 절 간노지에서 일어난 방화 및 집단사망사건 조사를 부탁받습니다. 하지만 우라노가 급히 오사카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와타루는 홀로 사건을 조사하는 처지가 됩니다. 며칠간 추리와 탐문을 거듭한 와타루는 나름 살인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고 범인을 지목하지만 오사카에서 돌아온 우라노에 의해 그의 추리는 부정당합니다. 문제는 우라노의 관심이 범인의 정체보다 그가 벌인 전대미문의 행위와 그것이 야기할 끔찍한 사건들이란 점입니다. 우라노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의 줄거리에 관해선 극히 일부만, 그것도 무슨 얘긴지 짐작하기 힘들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지 않으면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인상비평밖에 할 수 없는데, 문제는 독자에 따라 그 부분을 스포일러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그러면서 이 작품에 대해 구미가 당길 정도로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와타루가 다루는 네 개의 사건이 단편 형식으로 수록돼있는데, 위에 정리한 줄거리는 그중 첫 번째 작품인 간노지 사건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믿기 힘든 상황과 연이은 대량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게 나머지 세 작품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와타루를 충격에 빠지게 한 건 그 사건들이 과거 20세기의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최악의 사건들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는 점, 그리고 범인들 역시 짧게는 20년 전, 길게는 80년 전에 사건을 일으켰던 바로 그 범인들이란 점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와타루 앞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로 출발했다가 순식간에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로 급변하지만 그 해법과 마무리는 다시 본격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통해 이미 시라이 도모유키의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충분히 맛봤지만 명탐정의 창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특수설정 하에 본격과 호러가 기괴하게 얽힌 복합 미스터리라는 흥미로운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 속 최고의 명탐정이 비현실 속 최악의 살인마와 대결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도 흥미롭지만 명탐정과 조수가 벌이는 추리 대결은 본격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직 미숙하긴 해도 명탐정의 조수 3년차인 와타루는 번번이 추리를 부정당하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갈 길을 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진짜 명탐정으로 거듭나는 희열을 맛보기도 합니다.

시라이 도모유키의 전작들이 특수설정은 빛나지만 다소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느낌을 줬다면 명탐정의 창자는 와타루의 성장과 활약, 그리고 복잡하긴 해도 정교하게 짜인 본격 미스터리의 서사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힌 작품입니다. 물론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야말로 이 작품의 특수설정의 백미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읽은 뒤 특수설정 자체도 그리 끌리지 않았고 저와는 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해서 직전 작품인 명탐정의 제물은 출간소식을 듣고도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여전히 시라이 도모유키가 제 취향과 조금은 거리가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명탐정의 창자같은 작품이라면 특별한 간식처럼 가끔은 읽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최애 작가 중 한 명인 요코미조 세이시와 그가 창조한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그리고 본격 추리가 가미된 일본 공포의 원점이라는 평을 들은 팔묘촌이 자주 언급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팔묘촌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명탐정의 창자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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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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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샘프턴의 외진 곳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범인은 피해자들의 가슴을 열고 무자비하게 심장을 뜯어낸 뒤 그것을 택배상자에 담아 가족이나 직장으로 보냅니다.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의 헬렌 그레이스 반장은 첫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언론에선 피해자들이 성매매 도중 살해된 사실을 지적하며 잭 더 리퍼에 대한 역습’, 즉 매춘부가 성매매 남성들을 단죄하는 사건이라고 보도하는 가운데 헬렌과 수사진은 좀처럼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한편 1년 전 해결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헬렌은 수사 외에도 경찰 내부와 언론 등 사방에서 가해지는 공격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니미니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는 영국의 여형사이자 심각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광적인 오토바이 마니아라는 점에서 안젤라 마슨즈가 창조한 걸 크러쉬 형사킴 스톤과 무척 닮은꼴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이니미니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은 탓에 그 후 헬렌이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매매 남성 연쇄살인을 해결하는 게 헬렌의 가장 큰 미션이며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헬렌을 향한 유무형의 날선 공격들입니다. 새로 부임한 총경 세리 하우드는 헬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공을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관료 빌런입니다. ‘이니미니에서 헬렌 못잖게 큰 트라우마를 얻은 찰리 브룩스는 1년 만에 경찰에 복직하지만 한때 롤 모델로 삼을 정도로 추앙했던 헬렌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물론 그녀가 자신의 복직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곤 어떻게든 공을 세워 그녀에게 한 방 먹일 각오를 다집니다. 또한 특종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좀더 많은 살인이 벌어져도 좋다고 여기는 악질 기자 에밀리아 개라니타는 전작에 이어 헬렌과 수차례 충돌을 거듭하는데 이번에는 그녀를 완전히 망쳐놓을 작정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수시로 넘습니다.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무려 121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그만큼 빠른 템포와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자신을 향한 악의에 찬 공격들까지 방어해야 하는 헬렌의 위기가 더욱 숨가쁘게 느껴지는 건 이런 짧고 빠른 호흡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나 배경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영미권 스릴러의 특징이지만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독자를 조급하게 만들 정도로 딱 필요한 요소들만 언급하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킵니다.

 

개인적으론 연쇄살인사건보다 헬렌이 겪는 시련들이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건 자체가 덜 흥미로웠다는 뜻입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면 그만큼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도 함께 고조돼야 하는데, 이 작품 속의 연쇄살인은 동어반복 같은 지루한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는 나름 반전의 맛을 전해주긴 하지만 무게감이나 진정성 면에서는 약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전작인 이니미니가 워낙 세고 독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게 아쉬움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엔 이니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이니미니를 읽지 않으면 여러 가지 팩트와 인물들의 심리 등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기도 합니다. 헬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인물 대부분이 이니미니속 사건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급적이면 이니미니를 먼저 읽은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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