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된 여자 케이스릴러
김영주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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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확인한 날, 수완은 무대에 오를 날만 고대하며 버텨오던 극단에서 잘린 것은 물론 남자친구에게 전셋집 보증금을 사기 당한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수완 앞에 재벌가 며느리 경진이 나타나 놀라운 제안을 한다.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 줄게요. 대신 죽은 내 여동생 남경으로 살아줘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수완은 남경으로 변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수완은 곧 경진의 요구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경진의 계획. 수완은 이 연극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자주 이용되던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독자(혹은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거짓 가면을 쓴 채 유유히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행보도 흥미롭고, 언제 그 가면이 벗겨질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스릴 넘치는 긴장감도 좀처럼 외면하기 힘든 관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만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좀 심하게 말하면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 언급이 어렵다 보니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다소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 수 있습니다.)

 

수완이 잠시의 갈등과 저항 끝에 경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초반부까지만 해도 과연 언제까지 수완이 거짓 가면을 쓰고 남경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가 이 작품의 기둥 이야기로 보였고, 덕분에 기대감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경은 이미 죽은 인물이라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짠~ 하고 나타날 일도 없으니 수완의 새 인생은 그만큼 더 강렬하고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완이 미처 새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톤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중반부터 경진과 그녀의 남편을 둘러싼 (현재와 과거에 걸친) 불륜, 욕망, 시기, 질투가 전면에 포진되더니 이내 살인과 납치 등 서스펜스 스릴러가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수완 대신 경진이 주연 자리를 차지하면서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의 이야기라는 당초의 설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까지 갖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결여되거나 안이하게 설정된 대목과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그저 이야기를 크고, 세고, 독하게 확대시키는 데만 열중한 듯한 작가의 과욕이 여러 차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에게 가짜 인생을 부여해놓곤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와는 별로 연관 없는 딴 이야기로 몰아간 느낌이랄까요? 앞서 언급한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라는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왜 경진은 수완을 콕 찝어 죽은 동생 역할을 하게 만들었나?”인데, 너무 빨리 읽었거나 명백히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수완이 남경과 닮았기 때문에? 단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떠오르는 동기도 없습니다. 중반 이후 경진이 가장 집착한 부분은 수완의 임신혹은 눈엣가시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인데, 이 두 가지 모두 왜 남경의 대체인물이 필요했는가? 또 그것이 반드시 수완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진이 필요에 의해 수완을 이용했다.”라고 묘사하는데, 필요가 뭔지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매력적인 출발을 보인 초반부 전개와 수완의 캐릭터에 비해 엉뚱한 방향으로 확장돼버린 뜬금없는 서스펜스 스릴러는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아 보인 작가의 필력 때문에 아쉬움이 배가된 게 사실인데, 이야기의 볼륨감을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크고, 세고, 독한 설정들대신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에게 집중한 간결하고 선명한 설계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제 나름의 확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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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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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이른바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1부인 잘 자요, 엄마2010년에 출간됐으니 무려 11년 만인 셈인데, 원래 잘 자요, 엄마는 완결된 이야기였지만 개정판(2018) 준비 과정에서 시리즈 구상이 이뤄졌고, 그로부터 거의 3년 만인 2021년 봄에 하영의 두 번째 이야기가 독자들 앞에 선을 보인 것입니다.

 

이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주인공 하영과 의붓엄마 선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잘 자요, 엄마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너무 많아서 서평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참 난감한 게 사실입니다. 다만, 출판사가 공개한 선에서 잘 자요, 엄마의 내용을 포함하여 간략하게만 정리해보면...

 

희대의 연쇄살인범 이병도의 면담을 맡게 된 덕분에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범죄심리학자 선경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데려온 전처의 11살 딸 하영을 맡게 되면서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평범한 소녀가 아닌 하영의 존재는 선경에게 공포심마저 갖게 만듭니다. 결국 하영-선경-이병도가 극적으로 갈등하고 충돌한 끝에 사건은 끔찍하게 마무리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소시오패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번에는 5년이 지난, 즉 극도로 예민한 나이에 이른 16살의 하영을 통해 완성 직전의 소시오패스가 겪게 되는 내적 갈등과 딜레마를 그리고 있습니다.

 

선경은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자신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하영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이 갑작스레 꺼내든 강릉으로의 이사와 전학 문제로 신경이 곤두섭니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날이 서있던 하영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작 강릉으로 이사한 뒤엔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다시금 피어오르는 소시오패스의 본능으로 인해 누구보다 잘 적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학한 학교에서 벌어진 집단 괴롭힘과 실종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합니다.

 

잘 자요, 엄마11살 하영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맹아기의 소시오패스였다면, 16살의 하영은 또 다른 자신의 자아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충돌하며 갈등하는 성장기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죽이지 않으면 계속 자신을 괴롭힐 것 같아서 뱀의 머리를 짓이기고 칼로 잘라내는 섬뜩한 면모를 갖고 있지만, 스스로의 폭발을 가까스로 제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 역시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아줌마선경에 대한 양가적 감정, 텅 빈 채 남아있는 유년의 기억들은 하영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만듭니다. 거기에 전학한 학교에서 마주한 실종사건까지 끼어들면서 하영의 몸과 마음은 지켜보는 독자마저 불안해질 정도로 지독한 혼란에 빠져들고 맙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영은 미스터리 해결사로서의 매력적인 모습을 특별한 간식처럼 내놓기도 합니다.

 

제목대로 이 작품에는 여러 사람들의 비밀이 등장합니다. 전작에서 하영과 선경만이 공유하게 된 이병도 사건의 비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거나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하영의 유년기의 비밀, 강릉으로의 이사를 강행한 남편의 비밀, 그리고 하영이 전학한 학교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의 비밀이 그것들입니다. 각각의 비밀은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영을 중심으로 내밀하게 연결돼있어서 어느 하나라도 폭발하는 순간 하영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도미노처럼 연이어 폭발하게 되는 파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비밀이 먼저 터질까, 그것의 후폭풍은 어디에 먼저 불똥을 떨어뜨릴까, 독자들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닥친 불온한 기운을 그린 심리스릴러에 가까워서 전작인 잘 자요, 엄마를 안 읽은 독자라면 다소 모호하게 읽힐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작가가 이런저런 부연설명들을 달아놓긴 했지만 잘 자요, 엄마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되기 때문에 전작을 안 읽은 독자에겐 그야말로 감질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잘 자요, 엄마의 엔딩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대반전이 숨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려면 어쩔 수 없이 잘 자요, 엄마가 선행필수라는 뜻입니다.

 

본 내용이 373페이지에서 끝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너무나도 짧은 분량입니다. 기초공사나 다름없는 초반부 심리스릴러 서사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곤 때 이른 아쉬움부터 든 게 사실인데, 다 읽은 뒤에 다시 생각해봐도 적어도 100페이지 정도는 더 있었어야 16살 소시오패스 하영의 비밀과 갈등과 폭발이 제대로 그려졌을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373페이지에 실린 이야기들이 조금도 빈틈없고 정교하게 직조된 건 맞지만, 읽고 싶은 내용들이 한참 많이 남은 상태에서 마지막 장을 향해 속절없이 줄어드는 페이지는 말 그대로 아쉬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서 하영이 얼마만큼 성장한 상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완성된 소시오패스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게 됩니다. 충격적인 떡밥까지 제공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 만한 엔딩이 그려졌는데, 그저 바람이라면 하영과 선경의 마지막 이야기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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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들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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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말년을 보내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고문 경찰이 그가 과거 애용하던 고문 방법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다. 이어 부정부패와 비리를 일삼고도 교묘하게 법의 심판을 피해가며 호의호식하던 정치인, 기업인, 공직자들이 연이어 심판과 집행의 대상이 된다. 분노할 뿐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악인 처단이라는 과제를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집행해 나가는 집행관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의 다음 집행일지에는 과연 누구의 이름이 오르게 될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암행어사가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장면의 쾌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부정부패한 권력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뉴스 화면은 몇 번을 봐도 사이다 같은 느낌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예나 지금이나 심판대에 서는 죄인들은 실제 벌을 받아야 하는 자들 가운데 새 발의 피 만큼밖에 안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걸리더라도 무혐의, 집행유예, 특별사면 등 그들에겐 빠져나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남아 있고,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반인들은 그저 탄식 외엔 할 일이 없기 마련이며,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거나 더 큰 뉴스가 터지면 금세 잊게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집행관들에 등장하는 10여 명의 집행관들은 그런 부정부패한 권력자들을 직접 심판하고 응징하는 역할을 자처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각각 정보, 역사, 법률, 수사, 언론 분야의 전문가들인데, 하나 같이 부당하고 부패한 권력에게 극렬한 고통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거나 그들에게 맞서다가 삶 자체가 붕괴돼버린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집행관들의 타깃은 부와 권력으로 타인의 삶을 짓밟고 자신의 탐욕만을 채웠으면서도 기름장어처럼 법망을 유유히 벗어났던 일명 용서할 수 없는 쓰레기들입니다.

피살자의 정체나 살해방법 때문에 전국이 떠들썩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검찰 입장에선 정체불명의 살인범들이 사회적으로 적잖은 호응과 찬사까지 받는 일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난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야. 불타는 정의감 때문도 아니지. 굳이 말하자면...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분노를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 (p161)

 

작가는 집행관들의 리더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동기를 설명합니다. , 어설픈 정의감이나 영웅심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이유, 즉 분노를 실천에 옮기겠다는 의지가 집행관들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작가가 집행관들의 동기를 엄청난 대의나 정의로 포장했더라면 오히려 현실감 없는 판타지에 머물렀을 텐데,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동어반복처럼 순수한 분노와 실천의지를 거듭 강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고 선명한 이야기 덕분에 페이지는 술술 잘 넘어가지만,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기대만큼 탄탄하진 않았습니다. 조직의 운용이나 전략, 신입 집행관의 포섭 등 여러 면에서 집행관들의 행동은 허술해 보였고, 지지부진한 수사로 비난받던 검찰이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고 용의자들을 특정하는 과정 역시 다소 안이하고 편리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의 힘은 물론 집행관들의 매력까지 떨어뜨린 더 큰 이유는 더 이상 공분하기 어려운 집행대상자들의 고만고만한 캐릭터입니다. 물론 집행대상자 모두 정말 나쁜 놈들이긴 하지만 첫 타깃이었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처럼 보편적인 분노를 자아내지도 못했고 더 나쁜 놈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까지 들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렉 허위츠의 살인위원회가 떠올랐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팀은 자신의 7살 딸을 살해하고도 법망을 피해나간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살인위원회의 멤버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후 위원회의 심판에 의해 유죄로 단정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맡습니다. , ‘살인위원회는 개인적인 범죄지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흉악범들을 집행대상으로 삼은 덕분에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했지만, ‘집행관들은 어느 지점부터인가 그들만의 집행에 매몰되어 독자의 공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는 정의 실현을 졸필(拙筆)로나마 구현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울러 암세포 같은 인간쓰레기들을 철저하게 응징하고 싶은 바람도 부인할 수 없다.”작가의 말은 충분히 공감도 되고 픽션으로서의 매력도 한껏 지닌 일성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분노와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주장만 넘쳐나고 스토리는 허약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탄탄한 문장과 필력을 보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나 차기작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행관들이 조금만 더 현실적이었더라면, 조금만 더 독자의 공분을 부추길 수 있는 설정이었더라면, 조금만 더 미스터리와 스릴러 코드를 정교하게 다듬었더라면, 이란 아쉬움이 드는 건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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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케이스릴러
고도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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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판결을 앞둔 희대의 연쇄살인범, 염석희. 그녀가 저지른 17건의 살인 자백을 유도하는 범죄심리 전문가, 심수영. 구치소 안에서 마지막 살인 계획을 세우는 석희와 그녀의 무모한 계획을 막아야 하는 수영의 숨 막히는 심리 대결. 두 여자의 목숨을 건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대략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구도와 적잖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라 제대로 소개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 읽은 뒤 다시 보니 너무 빈약한 탓에 오히려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실제 작품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먼 엉뚱한 소개글처럼 보인 게 사실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는 선에서 조금만 더 소개를 해보면...

 

체포된 이후 내내 진술을 거부하던 연쇄살인범 염석희는 심리상담사 심수영에게 기괴한 제안을 합니다. 자신이 낸 문제를 풀면 그간의 살인사건에 대해 진술하겠다는 것입니다. 애초 염석희의 상담을 맡게 된 과정도 석연치 않았지만 심수영은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상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염석희 사건에 자신의 딸 영지까지 휘말리는 사태에 이르자 심수영은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영지를 구하기 위해 사건의 한복판에 뛰어든 심수영은 염석희가 저지른 17건의 살인사건의 실체와 그녀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궁극의 목표를 깨닫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10대 때 저지른 첫 살인부터 염석희의 단 하나의 살인 동기는 복수입니다. 평균 1년에 두 건 정도의 살인을 저지른 셈인데, 그만큼 완벽하고 정교한 계획에 의해 차근차근 복수를 진행시켜왔다는 뜻입니다. 염석희는 구치소에 갇힌 상태에서도 18번째 목표물을 향한 살인계획을 빈틈없이 진행시킵니다. 그녀의 복수심은 그만큼 강렬하고 집요하다는 뜻입니다.

 

난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그러다 의외로 내가 그 잘못된 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지. 나 같은 사람밖에 할 수 없는 일을. 괴물사냥. 괴물은 괴물이 잡아야지.” (p233)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독특하고, 살인사건의 구도도 여러 가지 면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 코드가 깔려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악의 집단은 사악함과 잔인함으로 똘똘 뭉친데다 뛰어난 지능과 폭력을 동원하여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 구축해왔습니다. 그에 맞서는 두 주인공 염석희와 심수영은 한편으론 적대적인 관계지만 한편으론 악의 집단에 맞서기 위한 위태로운 협력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녀들의 여정은 온갖 위기와 피비린내를 넘어 가까스로 결말에 다다르긴 하지만, 막판에 드러난 진실은 그저 무참할 따름입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하면 악을 향한 복수극이지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도 워낙 많고 그들 각자의 사연도 천차만별에 모호함 투성이라 읽는 동안 이야기 구도 전체가 한 눈에 쉽게 들어오진 않습니다. 대부분 중반 이후에나 독자에게 공개되는 각 인물들의 과거와 사연들은 그 전까지는 계속 ?”라는 의문만 자아내서 몰입에 꽤나 방해가 됐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함께 다소 불친절하고 겉멋에 치중한 듯한 작가의 멋부림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쉽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들, 리얼리티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과도하고 비현실적으로 강조된 스케일과 화려함, “?”라는 궁금함을 제 때 풀어주지 않고 혼자서만 진격하는 듯한 작가의 독주 등이 그것인데, 나름 복잡한 설정과 인물들을 큰 오차 없이 설계한 건 분명한 장점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허술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 읽은 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굳이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어 보인 염석희의 복수극도,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심수영의 기구한 사연도 숲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나무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식의 느낌을 받게 된 건 그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출판사가 줄거리 소개를 극도로 아낀 탓에 내용보다는 모호한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중반까지 누린 기대감과 만족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기교나 스케일보다 디테일과 리얼리티에 좀더 주력한다면 고도원의 다음 작품은 한국 스릴러의 새로운 기대주라는 호칭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필력에 관한 한 그런 기대를 가져도 충분하다는 확신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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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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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운 난설헌은 8살에 지은 백옥루 상량문으로 놀라운 재능을 세상에 알린다. 여자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지만, 아버지 초당 허엽과 오빠 허봉은 난설헌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15살에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녀의 삶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갈라서야 했던 사내 최순치, 똑똑하고 당찬 며느리를 지독히 혐오한 시어머니, 열등감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닫은 남편,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객사, 자식들을 앞세운 상실감까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 그뿐이었다. 규범의 족쇄와 규방 속 고통을 모두 끌어안았음에도 난설헌의 영혼은 시 안에서 자유로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주로 추미스(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에 집착하는 편이지만 나름 역사소설도 좋아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산북스를 통해 받은 난설헌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타이틀까지 갖추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졌던 작품입니다.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학생 시절에 배운 여성이 글 자체를 금지 당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빼어난 작품들을 남긴 천재 시인”, 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결혼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혹시나 소설적 허구의 산물은 아닐까, 싶어 인터넷에서 지식백과들을 검색해보니 거의 엇비슷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남긴 시 속에서 그녀의 삶의 모습들을 추정한 결과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허난설헌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무척 빈약했지만 작가는 거기에 탄탄한 허구와 상상을 덧붙임으로써 불과 27년이란 허난설헌의 짧은 생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특히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대목, 즉 가장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운명은 성별을 떠나 어느 독자에게든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삼종지도와 굴종만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지필묵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자신의 치마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숙명이 유독 허난설헌에게 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닌 천재적 재능 때문입니다. 8살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짓지 않았다면, 또 가족들이 그녀의 능력을 아끼고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허난설헌의 삶은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족쇄와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한 허난설헌의 의지를 집요하고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그녀의 아이러니함을 동정하지도 않고 가련히 여기지도 않는 일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허난설헌의) 시는 그 고단한 삶으로 인하여 더욱 처절하고 처연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된다.”라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은 작가의 그런 일관된 시선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존인물을 다룬 소설이다 보니 소설 자체에 대한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지만 한두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선, 예스러운 비유와 정갈한 고어(古語)가 넘쳐나는 문장들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허난설헌과 그녀 주변의 분위기를 사실적인 문장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지만 다소 난해하고 어지럽게 읽힐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존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나름의 기승전결을 바라는 독자가 많겠지만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삶의 기록에 더 가깝기 때문에 계속 오르막이거나 반대로 계속 내리막처럼 읽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적으론 분노와 슬픔만이 엇갈리는 이야기에 가끔 숨이 막히듯 답답함을 느끼곤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허난설헌을 모델로 삼되 조금은 통쾌하고 따뜻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100%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가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과 삶이 허구를 통해서라도 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인 정보 외에 허난설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역시 ‘100% 허구의 이야기에 대한 바람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허난설헌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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