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풀 플레이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권도희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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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2월 아일랜드 더블린. 19살의 프랭크 매키와 로지 데일리는 끊임없는 폭력과 암울한 미래밖에 남지 않은 고향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떠나 잉글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야반도주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당일 밤 로지는 약속장소인 16번지 폐가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프랭크 홀로 고향을 등집니다. 그로부터 22년 후, 유능한 잠복수사관이 된 프랭크는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막내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습니다. 16번지 폐가에서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혼자 잉글랜드로 갔다고 여겼던 로지가 페이스풀 플레이스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프랭크는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망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랭크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한국에 소개된 타나 프렌치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살인의 숲’(2007)2010년에 출간됐으니 12년 만에 한국 독자와 재회한 셈인데, 뒤늦게라도 그녀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20년 전 숲에서 두 친구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살인사건 전담반 형사가 되어 다시금 그 숲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를 다룬 살인의 숲과 마찬가지로, ‘페이스풀 플레이스역시 22년이라는 짧지 않은 간극을 두고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과 비극으로 점철된 가족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페이스풀 플레이스’(Faithful Place)는 주인공 프랭크가 19살까지 나고 자란 작은 동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긍정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한 이름과는 달리 폭력과 욕설, 시기와 질투, 이간질과 염탐으로 물든 데다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사람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22년 전 이 시궁창과도 같은 페이스풀 플레이스와 폭력적인 부모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프랭크와 로지의 꿈이 산산조각 나면서 모든 비극은 잉태됐고, 22년 동안 외면했던 가족과 고향을 다시 마주한 프랭크는 두 번째 지옥을 예감하면서도 로지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시궁창에 발을 들입니다.

 

22년 전 실종된 로지의 진실과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실은 이 작품의 중심서사는 애증으로 얼룩진 프랭크의 가족사입니다.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폭력으로 해소한 아버지, 정신적인 폭력으로 자식들을 압박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꼭 닮은 권위적이고 냉소적인 큰형 등 프랭크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22년 전 그로 하여금 첫사랑 로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로지의 여행 가방이 발견되면서 피할 수 없는 재회를 하게 된 프랭크와 그의 가족 사이엔 조금의 감동도 눈물도 없습니다. 오히려 폭발 직전의 팽팽한 긴장만 어른거립니다. 아내와 이혼한 뒤 9살 딸과 1주일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프랭크의 현재 처지도 불행까진 아니어도 신산 그 자체입니다. 과거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 그리고 두 가족 사이에 낀 프랭크의 복잡다단한 감정은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입니다.

 

로지의 실종과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은 중후반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의 힘을 발휘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22년이라는 세월의 두께, 한없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애증의 가족사, 그리고 어떤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암울한 미스터리는 반전 이상의 힘과 여운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혼자 다 짊어져온 프랭크의 삶은 아주 약간의 희망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는데, 그래서인지 이후 타나 프렌치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어느 작품에서라도 한번쯤은 꼭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며, 형사 한 명이 각 작품에서 주요 수사관으로 활동한다. 주인공은 다른 작품에서 보조 인물로 출연하는 식으로 각 작품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또 이 작품의 후속작인 브로큰 하버시크릿 플레이스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아쉽게도 프랭크가 주인공인 작품은 아닌 듯 하지만, 카메오처럼이라도 잠깐 만나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The Likeness’도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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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티켓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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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천연두로 부모를 잃은 16살 잭 파커와 여동생 룰라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친척집으로 가던 중 은행을 털고 도주하던 강도들과 마주칩니다. 할아버지는 숨지고 여동생 룰라가 강도들에게 납치됐지만 그 누구도 잭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런 잭에게 손을 내민 건 거구의 흑인 추적자 유스터스와 난쟁이 총잡이 쇼티. 잭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땅 문서를 내걸며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동생 구출작전에 새로운 삶을 꿈꾸는 매춘부, 전직 현상금 사냥꾼인 보안관, 유치장 요강 청소담당인 흑인, 그리고 성질 고약한 멧돼지가 가세하면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추격전이 텍사스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납치된 여동생 구출하기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16살 소년인데다 구출을 위해 조직된 팀원 면면이 어딘가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처음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서부극 정도로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빅 티켓은 걸쭉하고 노골적인 음담패설,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폭력, 총잡이가 활약하던 서부시대와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묘하게 겹친 19세기 말 미국의 혼란 등 날것 같은 잔혹함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추격전 자체도 흥미롭지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인물 하나하나의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선교사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16살 잭은 사건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주님의 계획대로 이뤄진다고 믿으며 살인을 죄악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비롯한 온갖 불법을 저지르게 되자 단단했던 종교적 신념이 무너지면서 크나큰 혼란에 휩싸입니다.

백인+흑인+코만치 인디언 혼혈인 유스터스는 흑인과 거지와 무법자의 시신을 묻고 수고비를 받는 천민이지만, 간간이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술에 취하면 피아를 구분 못하고 총질을 해대는 게 문제지만, 뛰어난 추적꾼의 기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난쟁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끝에 어린 시절 서커스단에 버려졌던 쇼티는 그곳에서 세상과 문학과 사격술을 배운 독특한 인물입니다. 핸디캡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정찰병과 탐정을 거쳐 뛰어난 현상금 사냥꾼이 됐지만, 밤마다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고 항상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탐독하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합니다.

16살 잭의 동정을 책임진 매춘부 지미 수는 새로운 삶을 위해 매춘굴을 도망쳐 나온 뒤 잭의 팀에 합류한 당차고 활달한 인물입니다. 매춘부가 될 당시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선지 강도들에게 여동생을 납치당한 잭에게 큰 위안과 힘이 돼주기도 합니다.

 

잭 일행의 추격전은 피비린내 그 자체입니다. 가는 곳마다 강도 일당이 저지른 참혹한 살인 현장과 마주쳐야 했고, 일당을 숨기려는 자들과 예상치 못한 총격전을 벌이며 큰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추격전 위주의 액션물에 그치지 않고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희망과 체념을 골고루 채워 넣어 두텁고 탄탄한 서사를 구축합니다. 한편에선 현상금을 노리는 총잡이와 법적 절차를 무시한 교수형이 횡행하고, 다른 한편에선 금덩이 노릇을 하는 석유 유정탑과 부의 상징인 자동차가 혼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다채로운 캐릭터는 스토리 못잖게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특히 잭을 돕는 추적팀이 밑바닥 출신의 혼혈 흑인, 모든 이에게 손가락질 받는 난쟁이, 돈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매춘부로 구성된 점은 뿌리 깊은 차별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특별하고도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적잖이 발견된 오타와 간혹 이해가 잘 안 되는 번역 때문에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빅 티켓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흥분을 안겨준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휴스턴 크로니클은 “‘톰 소여의 모험의 어두운 버전과 코엔 형제 영화처럼 느껴진다.”라는 평을 남겼는데, 만일 이 작품이 코엔 형제에 의해 영화화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코엔 형제가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려한 볼거리와 독특한 서사를 맛볼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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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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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추리소설 전문서점을 운영하는 40대 맬컴 커쇼는 어느 날 FBI 요원 그웬 멀비의 방문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맬컴이 오래 전 블로그에 올린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란 포스팅을 그대로 모방한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녀의 추측 때문입니다. 실은 그 포스팅은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다룬 여덟 편의 추리소설을 소개한 것으로 당시 맬컴이 일하던 서점의 홍보를 위해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웬의 주장대로 누군가 현실 속 완벽한 살인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본인이 살인용의자 혹은 공범으로 의심받게 될 상태에서 맬컴은 그웬과 함께 일련의 살인사건을 하나하나 조사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에 출간된 피터 스완슨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는데, 매번 데뷔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맞먹는 작품을 기대했다가 다소 아쉬움만 느끼곤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서사 대신 늘 새로운 설정을 추구하는 점은 높이 평가해왔고, 그래서 이번 신작 역시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고전 추리소설 팬들을 위한 오마주라는 출판사 소개글이었습니다. 처음엔 이야기 자체가 고전적이란 뜻으로 해석했는데, 읽어보니 애거서 크리스티를 위시한 황금시대(1920~30년대) 작품부터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에 이르기까지 미스터리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봤거나 필독서 목록에 올려야 할 명작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맬컴이 작성한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 등장하는 애거서 크리스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아이라 레빈, 도나 타트 등 가장 독창적이면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살인을 그려낸 당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초반부만 해도 맬컴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다소 엉뚱한 추측과 개연성 없는 추리를 펼치는 FBI 요원 그웬 멀비를 과대망상증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를 과정에 끼워 맞춘 듯한 그녀의 추리는 무리수로 보였고, 단지 서점 홍보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올렸던 맬컴이 엉뚱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자) 가운데 맬컴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던 여성이 거론되자 맬컴은 그웬에겐 밝히지 않은 자신의 은밀한 과거를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과 그웬이 편의상 찰리라고 별명 붙인 그 연쇄살인범이 어쩌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더 이상의 줄거리 소개가 쉽지 않은데, 초중반에 폭로되는 결정적인 변곡점(맬컴의 은밀한 과거)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 뒷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변곡점으로 인해 맬컴은 찰리라 별명 붙인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유일한 아군이던 그웬마저 그를 돕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맬컴은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지만 결국 독자와 함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으며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된 수많은 고전 가운데 제대로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됩니다. 가장 자주 언급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ABC 살인사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은 워낙 어릴 적에 청소년 버전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는데, 그래도 맬컴의 입을 통해 설명된 정보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줄거리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새삼 꼭 한 번 다시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는데 나머지 고전들 역시 기약할 순 없어도 필독 목록에 꼭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에는 몇몇 고전에 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으니 그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맬컴의 은밀한 과거, 블로그 포스팅을 모방한 연쇄살인범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중간중간 ?”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위화감 가득한 서술 등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꽤 입체적인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서사에다 복잡하고 몽환적인 심리스릴러의 면모까지 갖춰서 풍성한 볼륨감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만, 팽팽한 긴장감과 막판 반전에 대한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엔딩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나름 몇 가지 반전이 일어나지만 이야기의 구도 상 모든 걸 뒤집는 짜릿하고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진 못합니다. 오히려 심연에 가까운 고통스럽고 씁쓸한 맛이 더 강하게 남는다고 할까요? 지금까지의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과는 완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 건 맞지만 여전히 죽마사에 눈높이가 맞춰진 저로선 도리 없이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주저 없이 달려들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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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의 다이어리
리처드 폴 에번스 지음, 이현숙 옮김 / 씨큐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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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처처는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로맨스를 맛본 적도 없고 가족의 사랑조차 결핍된 인물입니다. 어릴 적 형의 죽음 이후 우울증이 극심해진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쫓기듯 집을 떠났고, 제이콥 자신도 16살 때 영문도 모른 채 한밤중에 어머니에게 내쫓겼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제이콥은 어머니의 부고와 함께 그녀가 살던 집을 상속받게 됐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호더(hoader, 저장강박증 환자)였던 어머니가 남긴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치우면서 제이콥은 평생을 품어 온 의문 왜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일까? - 을 떠올립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물건들을 치우던 제이콥에게 레이첼이란 여성이 찾아옵니다. 한때 이 집에서 살았던 자신의 생모를 찾으러 왔다는 레이첼에게 제이콥은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장르물 편식이 심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로맨스 소설이지만 크리스마스 소설의 제왕”, “고전적인 로맨스의 탁월한 재해석이란 외신의 평가를 보니 왠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연상시키는 설정인 것 같아 관심이 생긴 작품입니다. 자신을 내쫓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회한에 잠기는 베스트셀러 작가 제이콥과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뒤 뒤늦게 자신의 생모를 찾아 나선 레이첼의 조합은 로맨스 소설의 정석에 가까운데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여러 모로 러브 액츄얼리와 닮은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묶어준 건 레이첼의 생모 노엘이 남긴 다이어리입니다. 노엘은 피치 못할 이유로 임신한 상태에서 제이콥의 가족과 함께 지냈었고, 당시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절절하게 다이어리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노엘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은 제이콥의 아버지뿐입니다. 레이첼을 위해 오래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만나야만 하는 제이콥과 생모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빠진 레이첼은 서로 복잡한 심경으로 긴 여정에 나섭니다. 그 여정은 두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 기회를 선사하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당혹스런 상황과 마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해피엔딩은 절대 쉽게 그들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수년 전에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의 이야기를 쓰도록 내버려뒀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요.” (p288)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는 달달한 로맨스이자 가슴 아픈 상처 극복기이자 누군가에게 억눌리고 빼앗겼던 자신을 되찾는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끝내 화해의 손을 내미는 전통적인 가족 서사가 가미돼서 자칫 뻔한 로맨스가 될 뻔한 이야기를 한결 두텁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잘 만들어진다면 러브 액츄얼리못잖은 따뜻한 로맨스가 돼줄 것 같습니다. 또 이 작품은 노엘 4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확장될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넘어선 새로운 로맨스 스토리가 기대되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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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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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 콤비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여덟 번째 작품으로 보덴슈타인의 개인사와 직결된 사건을 다룹니다. 50대 중반의 보덴슈타인은 경찰로서의 사명감도, 의욕과 열정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더는 참혹한 사건과 마주치기 싫어졌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평온한 삶을 위해 안식년 휴가를 신청합니다. 다만 그의 진짜 속내는 피아에게 반장직을 물려준 뒤 영원히 경찰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명이라 여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덴슈타인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유년기를 보냈던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 곳곳에서 일주일동안 하루 한 건 꼴로 벌어진 살인사건들이 42년 전 11살이던 자신이 겪은 악몽과 직결돼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보덴슈타인은 러시아 출신의 소중한 친구와 자신이 직접 기르던 새끼 여우를 잃었는데, 그것이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 못잖게 잔인하고 비열했던 루퍼츠하인의 10대 패거리의 소행임을 짐작하긴 했어도 11살의 보덴슈타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경찰마저 부실한 수사 끝에 유력 용의자의 자살 시도를 끝으로 유야무야 마무리하고 말았는데, 42년이 지난 현재 그 사건의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끔찍하게 살해당하자 보덴슈타인으로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깃든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은 그의 수사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만 흘러가고, 과거의 악몽에 깊이 사로잡히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결국 피아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에야 보덴슈타인은 사건의 윤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고, 현재의 참극의 근원이 된 42년 전의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무척 많은 인물과 복잡하게 꼬인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제 기억에 따르면) 이번 작품처럼 본문 앞에 인물표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보덴슈타인이 의심하는 42년 전 10대 패거리만 9명인데, 당시 그들의 부모는 물론 현재 그들의 자식들까지 3대에 걸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복잡한 결혼 관계까지 맺어진 탓에 독자 입장에선 인물별 족보라도 메모해놓지 않으면 읽는 내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많은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것은 독자뿐 아니라 피아를 비롯한 강력11반 모두에게도 곤혹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비밀을 공유한 채 서로 연대하고 비호하면서도 뒤로는 경계와 의심, 비난과 질투를 숨기지 않는데다 혈연과 결혼으로 엮인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의 수많은 토박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42년 전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직감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잖은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막판 반전과 함께 진범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단 한 순간만 바꿔놓는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루퍼츠하인에서의 수십 년에 걸친 여러 참극들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악마적이기까지 했던 10대들의 잔학성과 추악하고 더러운 어른들의 욕망에서 비롯됐고, 마치 신이 짜놓은 듯한 거짓말 같은 우연이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었는데, 이런 방식의 결론은 타우누스 시리즈를 통해 꽤 익숙해진 서사이긴 하지만, ‘여우가 잠든 숲은 보덴슈타인 개인의 삶이 직접 투영됐기 때문인지 여느 작품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습니다.

 

이 모든 의도치 않은 불행의 시발점에 그 자신이 있었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보덴슈타인은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2p250)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폭발하고 오열하는 보덴슈타인을 보면서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큰 짐을 안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독자로선 갖가지 감정을 느끼며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인물과 방대한 서사를 정교하게 구성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막판의 비약때문이었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마지막 난관에서 발휘한 힘은 증거나 단서나 논리적 추리가 아니라 갑자기 하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전깃불처럼 번쩍 켜진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작 의심했어야 할 단서, 진작 캐물었어야 할 질문, 진작 고려했어야 할 인간관계를 다 놓친 후에야 갑작스런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진범을 외곽에 감춰놓았다가 느닷없이 무대 중심으로 끌어들인 느낌이랄까요? 차라리 쉽게 예상되더라도 좀더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 진범이었다면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막판의 비약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을 이미 읽긴 했지만, 경찰 옷을 벗으려던 보덴슈타인이 어떤 경위로 계속 강력11반에 남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루퍼츠하인을 떠나 연인의 품으로 날아간 보덴슈타인의 이후 행보도 궁금하고, 그의 후임으로 반장직을 임명받은 피아의 처지도 역시 궁금할 뿐입니다. 이제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잔혹한 어머니의 날한 편만 남았는데, 두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서라도 하루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9잔혹한 어머니의 날이후 2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202111월에 독일에서 시리즈 10‘In ewiger Freundschaft’(네이버 번역에 따르면 영원한 우정정도?)가 출간됐습니다. 전작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됐던 점을 감안하면 반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째든 올해 안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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