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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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 콤비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여덟 번째 작품으로 보덴슈타인의 개인사와 직결된 사건을 다룹니다. 50대 중반의 보덴슈타인은 경찰로서의 사명감도, 의욕과 열정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더는 참혹한 사건과 마주치기 싫어졌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평온한 삶을 위해 안식년 휴가를 신청합니다. 다만 그의 진짜 속내는 피아에게 반장직을 물려준 뒤 영원히 경찰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명이라 여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덴슈타인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유년기를 보냈던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 곳곳에서 일주일동안 하루 한 건 꼴로 벌어진 살인사건들이 42년 전 11살이던 자신이 겪은 악몽과 직결돼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보덴슈타인은 러시아 출신의 소중한 친구와 자신이 직접 기르던 새끼 여우를 잃었는데, 그것이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 못잖게 잔인하고 비열했던 루퍼츠하인의 10대 패거리의 소행임을 짐작하긴 했어도 11살의 보덴슈타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경찰마저 부실한 수사 끝에 유력 용의자의 자살 시도를 끝으로 유야무야 마무리하고 말았는데, 42년이 지난 현재 그 사건의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끔찍하게 살해당하자 보덴슈타인으로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깃든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은 그의 수사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만 흘러가고, 과거의 악몽에 깊이 사로잡히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결국 피아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에야 보덴슈타인은 사건의 윤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고, 현재의 참극의 근원이 된 42년 전의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무척 많은 인물과 복잡하게 꼬인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제 기억에 따르면) 이번 작품처럼 본문 앞에 인물표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보덴슈타인이 의심하는 42년 전 10대 패거리만 9명인데, 당시 그들의 부모는 물론 현재 그들의 자식들까지 3대에 걸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복잡한 결혼 관계까지 맺어진 탓에 독자 입장에선 인물별 족보라도 메모해놓지 않으면 읽는 내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많은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것은 독자뿐 아니라 피아를 비롯한 강력11반 모두에게도 곤혹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비밀을 공유한 채 서로 연대하고 비호하면서도 뒤로는 경계와 의심, 비난과 질투를 숨기지 않는데다 혈연과 결혼으로 엮인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의 수많은 토박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42년 전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직감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잖은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막판 반전과 함께 진범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단 한 순간만 바꿔놓는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루퍼츠하인에서의 수십 년에 걸친 여러 참극들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악마적이기까지 했던 10대들의 잔학성과 추악하고 더러운 어른들의 욕망에서 비롯됐고, 마치 신이 짜놓은 듯한 거짓말 같은 우연이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었는데, 이런 방식의 결론은 타우누스 시리즈를 통해 꽤 익숙해진 서사이긴 하지만, ‘여우가 잠든 숲은 보덴슈타인 개인의 삶이 직접 투영됐기 때문인지 여느 작품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습니다.

 

이 모든 의도치 않은 불행의 시발점에 그 자신이 있었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보덴슈타인은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2p250)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폭발하고 오열하는 보덴슈타인을 보면서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큰 짐을 안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독자로선 갖가지 감정을 느끼며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인물과 방대한 서사를 정교하게 구성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막판의 비약때문이었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마지막 난관에서 발휘한 힘은 증거나 단서나 논리적 추리가 아니라 갑자기 하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전깃불처럼 번쩍 켜진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작 의심했어야 할 단서, 진작 캐물었어야 할 질문, 진작 고려했어야 할 인간관계를 다 놓친 후에야 갑작스런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진범을 외곽에 감춰놓았다가 느닷없이 무대 중심으로 끌어들인 느낌이랄까요? 차라리 쉽게 예상되더라도 좀더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 진범이었다면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막판의 비약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을 이미 읽긴 했지만, 경찰 옷을 벗으려던 보덴슈타인이 어떤 경위로 계속 강력11반에 남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루퍼츠하인을 떠나 연인의 품으로 날아간 보덴슈타인의 이후 행보도 궁금하고, 그의 후임으로 반장직을 임명받은 피아의 처지도 역시 궁금할 뿐입니다. 이제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잔혹한 어머니의 날한 편만 남았는데, 두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서라도 하루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9잔혹한 어머니의 날이후 2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202111월에 독일에서 시리즈 10‘In ewiger Freundschaft’(네이버 번역에 따르면 영원한 우정정도?)가 출간됐습니다. 전작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됐던 점을 감안하면 반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째든 올해 안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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