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 걸스
M.M. 쉬나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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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교살된 사체로 발견된 해먼드 사건을 맡은 매사추세츠 오크허스트 카운티 형사기동대의 경위 조 푸르니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현장 상황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성폭행이나 강도의 흔적도 없고 범인이 갖고 간 건 오직 희생자의 결혼반지뿐이며, CCTV에 찍힌 중절모를 쓴 용의자의 흔적은 호텔 인근에서 전혀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인 뉴올리언스에 왔다가 때마침 똑같은 형태의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조는 현지 경찰과 FBI에 공조수사를 요청하지만 연쇄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던 어느 날 조와 동료들은 범인과 피해자가 접촉한 경로를 알아내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까봐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워커홀릭에 타고난 현장 형사 체질인 조 푸르니에와 그녀의 동료들이 연쇄살인이 확실하지만 그 어떤 확증도 없는 난해한 살인사건들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댄싱 걸스의 뼈대입니다. 시작과 함께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이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곧이어 범인의 본명이 마틴이라는 점이 공개됩니다. 그가 희생자를 고르는 기준과 기이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살해수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이어 그의 오래된 트라우마와 범행동기가 설명됩니다.

초반부터 범인이 공개되면서 독자는 그를 쫓는 주인공 조 푸르니에의 동선과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녀는 좀 특이한 상황에 놓인 경찰입니다. 최단기간 형사 승진, 역대급 사건 해결률, 15년의 경찰 생활 중 세 번의 수상 등 탁월한 이력을 가진 덕분에 두 달 전 경위로 승진했지만 그녀에겐 승진을 받아들인 일이 너무나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타고난 현장 체질인 그녀는 밀려드는 행정업무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고, 당장이라도 강등을 요청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현장 수사를 지휘할 수 있게 된 해먼드 사건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기에 조는 전력을 다해 수사에 매진합니다.

 

사실 중반까지만 해도 조금은 지루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범인인 마틴은 유년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학대를 당하며 트라우마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살인에 대한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죽어 마땅한 여자들을 살해하는 전형적인 연쇄살인범입니다. 또 해먼드 사건을 수사하는 조와 동료들의 초반 모습은 거의 일지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묘사돼서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마틴이 자신의 챕터에서 범행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한 이후 조의 수사과정이 그려지다 보니 독자입장에선 뒷북에 헛발질만 날리는 그녀가 그저 답답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챕터는 희생자 중 한 명이 화자를 맡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실은 독자 입장에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라 역시 지루함만 남긴 대목입니다. 경찰, 범인, 희생자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서 입체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정작 긴장감을 증폭시킬 만한 요소들이 결여된 느낌이랄까요?

 

만약 이런 전개가 반복되다가 조가 마틴을 체포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됐다면 별 3개 이상을 주기가 어려웠겠지만, 매력적인 조의 캐릭터와 막바지에 전개된 의외의 반전 덕분에 끝까지 읽어낸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연쇄살인범 혹은 희대의 소시오패스를 다룬 이야기들을 많이 읽었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 결말이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한 여운까지 남겨서 혹시나 하고 출판사 소개글을 찾아보니 조 푸르니에 시리즈는 현재 5편까지 나왔으며 댄싱 걸스는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4개라는 평범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댄싱 걸스에서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이야기도 궁금하고, 주인공 조 푸르니에가 과연 경위 계급을 내던지고 현장 형사로 돌아가 맹활약하게 되는지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5편까지 출간된 걸 보면 분명 그만한 힘과 매력을 지닌 게 분명해 보이는데, ‘댄싱 걸스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후속작에선 모두 만회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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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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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글래스 호텔1970년부터 무려 38년에 걸쳐 버나드 메이도프가 저지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사건(일종의 다단계 금융사기)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지만,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읽기 전엔 탐욕, 죄악, 사랑, 망상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서사시.”라는 홍보 카피가 살짝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내용과 형식 모두 독특한데다 조금은 난해하기까지 한 이 작품을 제대로 압축한 문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폰지 사기사건을 조사하여 악당과 배신자와 피해자를 규명하는 통속적인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그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속내,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란 뜻입니다. 미디어 리뷰 가운데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참상을 정교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인간이 도덕적 타락으로 매끄럽게 빠져드는 찰나를 포착했다는 설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표면적으론 약물에 중독된 폴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빈센트 이복남매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엔 원톱이든 투톱이든 확실한 주인공이 없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폰지 사기를 저지른 조너선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 폰지 사기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리고 만 사람들, 또 그들 주변의 지인 등 꽤 많은 인물들이 대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딱히 악당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 없는 것도 특징인데, 주범인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은 피해자를 등치는 사악한 악당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유혹에 넘어갈 법한 돈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지 못한 가련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또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기사건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지만, 정작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기사건과는 무관한)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개인사에 할애돼있습니다. 특히 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이라는 익숙한 전개 대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구성으로 이뤄져있는데, “상자를 잃어버린 퍼즐 같은 작품글래스 호텔의 이런 특징을 함축한 평입니다. 이 작품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특징 때문에 독자에 따라 제법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 인물 중 비중이나 역할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주범인 알카이티스의 트로피 아내가 된 빈센트입니다. 가난, 어머니의 실종, 정학과 가출 등 10대 초반에 온갖 불행을 맛봤던 빈센트가 5성급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다가 호텔 소유주인 알카이티스의 눈에 들어 대저택의 사모님이 된 뒤 돈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대목은 역설적이게도 무척이나 황홀하고 매력적으로 읽힙니다. 그녀가 누리는 행복은 알카이티스의 범죄수익 덕분이며 그 때문에 그녀를 사기사건의 종범(從犯)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운명처럼 찾아든 돈의 자유를 만끽했을 뿐인 무고한 희생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래스 호텔이 사기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기보다 빈센트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삶과 욕망을 그린 소설로 읽힌 건 바로 이런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그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선과 악, 죄와 벌이라는 이분법적인 서사 대신 사건에 말려든 사람들의 심리에 방점을 찍은 글래스 호텔이 난해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서사에 여러 번 당혹감을 느낀 게 사실이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린 걸 보면 분명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과 매력이 깃든 게 분명합니다. 다만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만큼 시간을 두고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찬찬히 만끽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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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어머니의 날 1 타우누스 시리즈 9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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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는 아니지만 타우누스 시리즈의 꽤 많은 작품이 그랬듯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홉 번째 작품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도 오래 된 과거 속 사건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19815,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잔혹하게 첫 살인을 저지르는 충격적인 프롤로그는 이후 이 소년이 성장하면서 저질렀을 수많은 참극이 이 작품의 메인 사건임을 예고합니다.

 

현재 벌어진 사건의 희생자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5월 둘째 주 일요일인 어머니날을 전후로 희생됐습니다.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은 익사당한 뒤 냉동된 채 랩으로 둘둘 말린 시체들을 보며 이 사건이 성범죄도, 묻지마 살인도 아닌, 철저하게 계획된 표적범죄임을 직감합니다. 시신들이 발견된 저택이 실은 오래 전 입양아들로 가득했던 점을 감안할 때 범인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다른 여자들에게 쏟아내고 있다는 점도 눈치 챕니다.

 

전작인 여우가 잠든 숲에서 경찰 옷을 벗고 싶을 정도로 큰 고통에 빠졌던 보덴슈타인은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현재 반장직에 복귀한 상태이고, 임시반장을 맡았던 피아는 그가 신뢰하는 보덴슈타인과 다시 한 번 파트너로 맹활약하는 중입니다. 다만, 쌩쌩하고 활력 넘치던 피아가

어느 새 50세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대목을 읽곤 잠시 서글픔을 맛보기도 했고(보덴슈타인은 무려 57세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건조한 분위기, 즉 기름기 하나 없이 수사 일변도의 진행에만 의존한 점 때문에 아쉬움도 느꼈지만(이 점 때문에 별 0.5개가 빠졌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고유의 숨 가쁜 속도감과 팽팽한 긴장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별개의 서사처럼 전개되다가 메인 사건에 합류하게 되는 조연들의 이야기도 매력적이었는데, 특히 동성애인이던 엥엘 과장(피아의 상관)과 킴(피아의 여동생)의 갈등이 엉뚱하게 피아에게 불똥이 튀면서 수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스토리는 메인 사건 못잖게 호기심과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전작인 여우가 잠든 숲이 보덴슈타인 반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번 작품은 피아와 그 주변 인물들이 맹활약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눈앞에 어른거리는 인물 중 한 명이 범인인데, 작가는 수시로 다른 단서들을 내밀면서 독자들의 추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인데, 막판에 갑자기 등장하는 단서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독자 입장에선 작가와 벌이는 추리 대결의 맛을 한껏 맛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장년의 대열에 들어선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이야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타우누스 시리즈가 시간을 거스르는 소재를 통해서라도 계속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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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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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에서 12세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이 격추당한 비행기에서 비상 탈출한 뒤 태평양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그들은 12세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삼아 생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 두 패로 갈라지고 맙니다. 랠프는 집단의 규칙을 정하고 봉화를 통한 구조요청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애초 랠프가 대장이 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소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무인도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끝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형태에 이르고 맙니다.

 

(서평에 앞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파리대왕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다른 출판사 혹은 다른 번역가의 작품을 찾거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는 점입니다. 1999년에 1쇄가 나왔고 제가 읽은 건 2015년의 66쇄인데, 어설픈 직역 혹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번역으로 무려 16년 동안 66쇄까지 찍었다는 게 (출판사의 명성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년들이 할아버지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한 독자의 비판은 형편없는 번역의 문제를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실은 이보다 심각한 대목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작품이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그저 씁쓸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뒤늦게 읽게 됐습니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괴물이 돼버리고 마는 이야기라는 어설픈 정보만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설정인데다 명품 고전에 대한 지적 허영심까지 더해져 나름 큰 기대를 가진 작품입니다.

 

요즘의 6~12세라면 어른 뺨 칠 정도로 알 건 다 아는 나이지만, 이 작품이 집필된 1954년을 기준으로 하면 리더 역할을 하는 12세 소년이라고 해봐야 세상에 대해 이제 막 눈을 뜬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른 하나 없는 무인도에 고립된 그 또래 소년들이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투쟁을 벌이고 살인을 서슴지 않게 되는 과정은 도구와 불을 손에 넣은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주장하며 전쟁과 살상을 일으킨 먼 고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모르긴 해도 15세 혹은 그 이상의 소년들이었다면 이 작품이 안긴 충격과 의미는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랠프가 법과 규칙을 통해 집단을 조율하면서 분업과 협동으로 구조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라면, 자신이 대장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한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식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워주며 야만성과 본능에 호소하는 인물입니다. 애초 합리적인 대장 랠프에게 기울었던 소년들은 무인도라는 무자비한 환경에 시달리면서 점차 구조 자체보다는 잭이 제공한 기름진 멧돼지 고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국 잭이 소년들을 손아귀에 넣을 무렵에는 통제 불가능한 광기가 무인도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자기편이 아닌 자는 단지 갈등의 상대가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배틀 로열식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아직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한 무구한 소년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권력투쟁의 당사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워낙 독하고 센 서사를 많이 접한 요즘 독자에겐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야기인 게 사실이고, 기대보다 다소 싱거운 엔딩 역시 무척 아쉽긴 했지만, 아마 1954년의 독자들에겐 꽤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소설의 깊이와 무게감이 제대로 구현됐을지는 미지수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 생각입니다. 언젠가 다른 번역가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출간된다면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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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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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미국 남부 소도시에 자리한 리슐리외 호텔엔 괴팍한 독신녀 애들레이드 애덤스를 비롯 여러 장기투숙자들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부유한 미망인과 조카, 은행원, 갈등 중인 부부, 이혼한 요부,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딸, 그리고 바람둥이 영업사원이 그들입니다. 어느 날 1주일 전부터 호텔에 투숙해온 한 남자가 애들레이드의 스위트룸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그의 정체가 장기투숙객 중 한 명이 고용한 사립탐정으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곤 모두를 철저히 조사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과 투숙객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특히 모든 살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탓에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애들레이드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아칸소가 낳은 범죄소설의 여왕이란 극찬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아니타 블랙몬이 1920~30년대에 활동한 작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가 남긴 추리소설이 단 두 편뿐이기 때문입니다. ‘리슐리외 호텔 살인’(1937)돌아올 길이 없다’(1938)는 각각 2013년과 2016년에 미국에서 복간되면서 재조명됐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는 더없이 적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전 추리 잔혹코믹극이란 타이틀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가릴 수도 있어 보이는데, 분명 잔혹함을 상쇄하는 유쾌한 유머”, “긴장과 웃음이 교차하는 풍자와 반전”, 그리고 주인공인 50대 여성 애들레이드 애덤스의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가 빛나는 작품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믹극으로 분류하기엔 곤란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범행은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고, 용의자 취급을 받으며 호텔에 구금상태에 놓인 장기투숙자들 사이의 의심과 갈등은 어떤 진지한 미스터리보다도 무겁고 어두운 기운을 발산합니다.

 

리슐리외 호텔의 장기투숙자들은 결코 가난하거나 오갈 데 없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쪽이 더 많은데, 그런 그들이 연쇄살인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용의자로 몰려 호텔에 구금된 상황은 밀실이나 무인도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이 안에 범인이 있다!”라는 두려움은 늘 고상하게 모여 앉아 조식과 커피를 즐기던 그들 사이를 하루아침에 불신과 의심으로 갈라놓습니다. 또 첫 희생자인 사립탐정을 누가, 왜 고용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살해된 사체들이 발견되면서 경찰의 수사마저 장벽에 가로막히자 기약 없는 구금상태를 못 이긴 끝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리슐리외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에 머무는 주인공 애들레이드 애덤스입니다. 50대 중반으로 큰 덩치에 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녀는 노점에서 음식을 사먹은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가정교육을 제대로받은 미국 남부 숙녀임을 자부하는 인물입니다. 천박하거나 요염함을 감추지 않는 젊은 여성에겐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 젠틀하지 않은 남성들에겐 특유의 까칠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애들레이드는 탐정처럼 범인 찾기에 앞장서는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추리력을 통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까칠함 속에 깃든 의외의(?) 모성애와 인간미를 발휘하여 엔딩을 훈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합니다.

 

범인의 정체는 몇 차례의 반전이 거듭된 끝에 밝혀질 정도로 베일에 싸여있고, 살인사건의 진상 역시 겉으로 보였던 것과 달리 예상 밖의 동기를 품고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쉽사리 엔딩을 예상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의 분위기라든가 그 무렵의 다양한 세태도 별미처럼 맛볼 수 있어서 고전 미스터리의 향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기대 이상의 정취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의미나 맥락이 모호한 문장들 때문에 상황이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작가 특유의 스타일일 수도 있고 번역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읽지 않으면 두어 번은 되읽어야 할 대목들이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입니다. 다른 작가의 작품도 당연히 나오겠지만 가능하다면 아니타 블랙몬의 나머지 한 작품도 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 작품에서 애들레이드 애덤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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