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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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글래스 호텔1970년부터 무려 38년에 걸쳐 버나드 메이도프가 저지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사건(일종의 다단계 금융사기)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지만,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읽기 전엔 탐욕, 죄악, 사랑, 망상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서사시.”라는 홍보 카피가 살짝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내용과 형식 모두 독특한데다 조금은 난해하기까지 한 이 작품을 제대로 압축한 문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폰지 사기사건을 조사하여 악당과 배신자와 피해자를 규명하는 통속적인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그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속내,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란 뜻입니다. 미디어 리뷰 가운데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참상을 정교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인간이 도덕적 타락으로 매끄럽게 빠져드는 찰나를 포착했다는 설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표면적으론 약물에 중독된 폴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빈센트 이복남매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엔 원톱이든 투톱이든 확실한 주인공이 없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폰지 사기를 저지른 조너선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 폰지 사기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리고 만 사람들, 또 그들 주변의 지인 등 꽤 많은 인물들이 대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딱히 악당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 없는 것도 특징인데, 주범인 알카이티스와 그의 수족들은 피해자를 등치는 사악한 악당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유혹에 넘어갈 법한 돈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지 못한 가련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또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기사건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지만, 정작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기사건과는 무관한)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개인사에 할애돼있습니다. 특히 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이라는 익숙한 전개 대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구성으로 이뤄져있는데, “상자를 잃어버린 퍼즐 같은 작품글래스 호텔의 이런 특징을 함축한 평입니다. 이 작품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특징 때문에 독자에 따라 제법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 인물 중 비중이나 역할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주범인 알카이티스의 트로피 아내가 된 빈센트입니다. 가난, 어머니의 실종, 정학과 가출 등 10대 초반에 온갖 불행을 맛봤던 빈센트가 5성급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다가 호텔 소유주인 알카이티스의 눈에 들어 대저택의 사모님이 된 뒤 돈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대목은 역설적이게도 무척이나 황홀하고 매력적으로 읽힙니다. 그녀가 누리는 행복은 알카이티스의 범죄수익 덕분이며 그 때문에 그녀를 사기사건의 종범(從犯)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운명처럼 찾아든 돈의 자유를 만끽했을 뿐인 무고한 희생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래스 호텔이 사기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기보다 빈센트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삶과 욕망을 그린 소설로 읽힌 건 바로 이런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그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금융사기를 다룬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선과 악, 죄와 벌이라는 이분법적인 서사 대신 사건에 말려든 사람들의 심리에 방점을 찍은 글래스 호텔이 난해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서사에 여러 번 당혹감을 느낀 게 사실이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린 걸 보면 분명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과 매력이 깃든 게 분명합니다. 다만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만큼 시간을 두고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찬찬히 만끽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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