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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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에서 12세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이 격추당한 비행기에서 비상 탈출한 뒤 태평양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그들은 12세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삼아 생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 두 패로 갈라지고 맙니다. 랠프는 집단의 규칙을 정하고 봉화를 통한 구조요청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애초 랠프가 대장이 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소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무인도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끝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형태에 이르고 맙니다.

 

(서평에 앞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파리대왕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다른 출판사 혹은 다른 번역가의 작품을 찾거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길 기다리는 게 낫다는 점입니다. 1999년에 1쇄가 나왔고 제가 읽은 건 2015년의 66쇄인데, 어설픈 직역 혹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번역으로 무려 16년 동안 66쇄까지 찍었다는 게 (출판사의 명성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년들이 할아버지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한 독자의 비판은 형편없는 번역의 문제를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실은 이보다 심각한 대목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작품이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그저 씁쓸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뒤늦게 읽게 됐습니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괴물이 돼버리고 마는 이야기라는 어설픈 정보만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설정인데다 명품 고전에 대한 지적 허영심까지 더해져 나름 큰 기대를 가진 작품입니다.

 

요즘의 6~12세라면 어른 뺨 칠 정도로 알 건 다 아는 나이지만, 이 작품이 집필된 1954년을 기준으로 하면 리더 역할을 하는 12세 소년이라고 해봐야 세상에 대해 이제 막 눈을 뜬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른 하나 없는 무인도에 고립된 그 또래 소년들이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투쟁을 벌이고 살인을 서슴지 않게 되는 과정은 도구와 불을 손에 넣은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주장하며 전쟁과 살상을 일으킨 먼 고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모르긴 해도 15세 혹은 그 이상의 소년들이었다면 이 작품이 안긴 충격과 의미는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랠프가 법과 규칙을 통해 집단을 조율하면서 분업과 협동으로 구조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라면, 자신이 대장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한 잭은 멧돼지 사냥을 통해 식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워주며 야만성과 본능에 호소하는 인물입니다. 애초 합리적인 대장 랠프에게 기울었던 소년들은 무인도라는 무자비한 환경에 시달리면서 점차 구조 자체보다는 잭이 제공한 기름진 멧돼지 고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국 잭이 소년들을 손아귀에 넣을 무렵에는 통제 불가능한 광기가 무인도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자기편이 아닌 자는 단지 갈등의 상대가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배틀 로열식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아직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한 무구한 소년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권력투쟁의 당사자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워낙 독하고 센 서사를 많이 접한 요즘 독자에겐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야기인 게 사실이고, 기대보다 다소 싱거운 엔딩 역시 무척 아쉽긴 했지만, 아마 1954년의 독자들에겐 꽤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소설의 깊이와 무게감이 제대로 구현됐을지는 미지수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 생각입니다. 언젠가 다른 번역가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출간된다면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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