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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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1975년의 오슬로. 킬러 올라브 요한센은 보스인 호프만으로부터 아내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받지만 언제나처럼 묵묵히 임무에 임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품어선 안 될 감정을 품게 됐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맙니다. 어느 밤, 무엇 하나 추억할 것도, 간직할 것도 없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기로 한 올라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누구를 죽일 것인지,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어디로 도망칠 것인지...

 

블러드 온 스노우2015년 출판사에서 보내준 교정지를 읽고 줄거리 하나 없는 짧은 서평만 남겼던 작품입니다. 이후 정식 출간된 책을 받았지만 다시 읽을 생각을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거의 7년 만에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주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직후에 출간된 미드나잇 선과 함께 오슬로 1970 시리즈로 불립니다. 두 작품 모두 1970년대의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스릴러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그 어떤 스탠드얼론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풍미가 넘쳐나는 작품들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단 분량입니다. 매번 600~700페이지가 예사인 요 네스뵈가 200페이지에 불과한 스릴러를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만에 집필을 끝냈다는 점은 가히 전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심을 담아 해석하자면 그만큼 밀도도 높고 빈틈도 없으며, 주인공과 이야기를 향한 작가의 몰입도가 엄청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출판사 소개글대로 그 짧은 분량 속에서도 고독한 분위기의 하드보일드에서 하드코어 스릴러로, 그리고 슬픈 로맨스로끊임없이 몸을 바꿉니다.

 

두 번째로 눈길을 끈 건 지독히도 시니컬하거나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는 인상을 풍기는 요 네스뵈답지 않은 문장들입니다. “마음껏 망가지려고 작정한 듯 펄프 픽션이 갖는 싸구려 정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개는 막장 같고, 분위기는 선정적이고, 피가 튀는 장면에서도 어쩐지 실소를 금할 수 없다옮긴이의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니컬함과 싸구려 정서가 묘하게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빈틈 하나 없는 냉정한 킬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모지리같은 주인공 올라브는 그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범한 운전엔 재주가 없어서 도주차량 운전도 못하고, 은행강도는 적성에 맞지 않으며, 셈이 약해 마약 판매 일도 못하는데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매춘부 관련 일도 하지 못하는 게 올라브의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오슬로 마약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호프만의 신뢰를 받는 킬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만의 특별하고 전문적인 재능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재능의 뿌리는 (요 네스뵈 주인공들의 공통점 중 하나인) 저주받은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난독증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도 정작 원작의 지루한 부분들을 해체하고 대신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취미 역시 고독한 킬러인 그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킬러로서의 삶을 폐기하고 선택한 금지된 사랑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7년 전에 교정지를 읽고 쓴 짧은 서평에 영화 ‘L.A 컨피덴셜과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이 연상됐다. 한겨울 오슬로의 뒷골목을 무대로 한 비정한 액션과 애틋한 로맨스의 조화랄까?”라는 문구가 있는데, 딱 이만큼이 스포일러 없는 소개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자신이 죽여야 할 보스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킬러라는 카피와 조합하면 누구나 대략적인 줄거리는 쉽게 연상할 수 있겠지만, 요 네스뵈가 그렇게 허술하고 뻔한 이야기로 마무리했을 리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래 기억에 남을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블러드 온 스노우를 그저 그런 킬러 스릴러로 예단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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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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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 위스콘신에 살던 18살 앨리스 리와 호주 여성 36살 루비 존스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한날 뉴욕에 도착합니다. 앨리스가 절망뿐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과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뉴욕에 왔다면, 루비는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를 사랑했다가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자 불안감과 우울함을 못 이기고 도망치다시피 뉴욕으로 왔습니다. 화려한 대도시 뉴욕에서 상반된 행보를 보이던 두 사람은 한 달 후 기구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침, 허드슨 강 자갈밭에서 괴한에게 무참히 살해된 앨리스의 사체를 루비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루비는 경찰이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한 그 소녀가 누군지, 왜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던 건지 알아내지 않곤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집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종국엔 그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네 이름은 어디에는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로 볼 수 없는, 여러 장르가 복합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범인은 누구?”보다 피해자는 누구?”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데다, 살해된 앨리스의 영혼1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사랑과 영혼스타일의 판타지가 전개되기도 하고, 사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루비가 위안을 찾기 위해 가입한 소모임 데스클럽멤버들의 대화는 마치 죽음에 관한 에세이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판에 범인을 찾아내는 미스터리가 전개되긴 하지만, 살해당한 앨리스의 영혼이 바랐던 건 범인 찾기가 아니라 내 이름이 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 미스터리 자체가 이 작품의 결정적 서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거의 100% 경찰이나 탐정이 신출귀몰하고 사악한 범인을 찾는 것이 기본 틀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소품이나 단역, 즉 범인의 잔혹한 범행수법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특히 계획범죄가 아닌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엔 이름이나 나이 등 한두 줄의 정보 외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 앨리스의 영혼과 그녀의 사체를 발견한 루비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피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네 이름은 어디에는 무척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갖더라도 주인공인 앨리스가 어차피 살해될 것이란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를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단돈 600달러와 카메라만 갖고 뉴욕에 도착한 18살 앨리스가 새로운 삶의 단초를 찾아내고 난생 처음 행복이란 걸 맛보는 초반을 읽을 땐 더는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루비가 큰 충격과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그녀의 분투가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해졌고, 소멸되지 못한 채 루비 곁에 머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앨리스의 영혼이 애틋했던데다 루비가 가입한 데스클럽멤버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도 눈길을 끌어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소설이자 거리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넓게 보면 이 작품은 성별을 떠나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작가가 곳곳에서 사회적 약자이자 성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인 여성을 강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 논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과 함께 남성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보는 방식을 다룬 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과 달리 네 이름은 어디에는 좀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란 뜻입니다.

 

누가 범인?”에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소설 속에서 소품이나 도구로 등장했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일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상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범죄 피해자를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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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 그녀가 사라진 밤
리사 주얼 지음, 이경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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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대 미혼모인 탈룰라가 친구 스칼렛 자크가 사는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에서 열린 심야 풀 파티 이후 연인이자 아이 아빠인 잭과 함께 실종됩니다. 탈룰라의 어머니 킴은 백방으로 두 사람을 찾지만 다크 플레이스 사람들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운데 경찰의 수색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2018, 런던에서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발표해온 소피는 교장이 된 연인 숀을 따라 소도시의 사립기숙학교 메이폴 하우스에 옵니다. 새 환경에서 신작을 준비하려던 소피는 관사 뒷마당에서 발견한 물건1년 전 실종된 탈룰라-잭 커플과 연관 있음을 알게 된 뒤로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사건에 몰입합니다. 탈룰라의 어머니 킴을 도와 조사를 하던 소피는 의외의 장소에서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을 포착합니다.

 

두 달 전 출간된 리사 주얼의 엿보는 마을’(Watching You, 2018)확장된도메스틱 스릴러, 즉 가족이나 연인을 넘어 고급주택단지 주민들 여러 명이 얽힌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면, 가장 최근작이자 그녀의 19번째 작품인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The Night She Disappeared, 2021)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미혼모 탈룰라의 이야기와 함께 음울하고 끔찍한 역사를 지닌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의 감춰진 비밀을 30대 여성 추리소설가 소피가 추적하는 정통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2016년에서 출발하지만 탈룰라와 잭의 실종 전후를 다룬 2017년과 유력한 물증이 발견되면서 수사가 재개되고 추리소설가 소피가 조사에 나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2018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사건 자체는 두 사람의 실종이 전부로 외견상으론 무척 단순합니다. 하지만 실종 직전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탈룰라와 잭의 갈등, 대저택 다크 플레이스에 사는 카리스마 소녀 스칼렛과 그녀를 추종하는 친구들의 방종, 계층도 성격도 전혀 다른 탈룰라와 스칼렛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사이가 되기까지의 미묘한 과정, 실종사건에 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끝까지 입을 다무는 풀 파티 참석자들의 수상한 태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1년 넘게 분투하는 어머니 킴의 절망, 그리고 이사오던 날 관사 뒷마당에서 발견한 수상한 메시지와 물건때문에 1년 넘게 미제상태인 실종사건에 개입하게 된 소피의 사정 등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복잡하게 전개돼서 이야기의 볼륨감은 가공할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어지간한 벽돌책보다 더 두툼하고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란 점입니다. 제각각의 사연과 뚜렷한 개성을 지닌 그녀들은 모든 남성캐릭터들을 압도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 자신감과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인물도 있지만,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삶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각각 사건 해결사, 사건의 주인공,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조연들로 활약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노골적으로 여성중심서사를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곳곳에서 힘과 매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사건 자체도 단순하고 진실을 밝히는 단서와 과정도 그리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반전을 내포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알맹이는 두 사람이 실종된 이유는 무엇인가? 실종 전후 사정은 어떠했는가?”라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심리스릴러의 미덕과 함께 리사 주얼의 주 특기인 도메스틱 스릴러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엿보는 마을을 읽기 전만 해도 고만고만한(?) 도메스틱 스릴러 작가라고 오해했지만, 1999년 이후 20편 가까운 스릴러를 펴낸 베테랑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고, (두 작품밖에 못 읽었지만) 사건 못잖게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그려내는 필력에 또 한 번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후 출간될 그녀의 작품들도 계속 관심을 가질 생각인데, 최근작 위주로 먼저 출간되고 있지만 초기작들 역시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만한 작가가 이렇게 뒤늦게 한국에 소개됐다는 건 여전히 의아한 일이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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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불짜리 속편 미스터리
이언 랜킨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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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한국에 소개된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는 오토 펜즐러가 을 주제로 엮은 미스터리 앤솔로지 1편입니다. ‘백만 불짜리 속편 미스터리는 그 두 번째 작품(원제 Bibliomysteries Vol. 2: Stories of Crime in the World of Books and Bookstores)으로 이언 랜킨을 비롯한 여섯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존 리버스 시리즈로 익숙한 이언 랜킨과 가짜 경감 듀로 이름만 들어본 피터 러브시 외에는 모두 생소한 작가들이었지만, ‘책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명쾌한 미스터리를 고전적인 분위기에 담은 왕비에게 헌정한 초판본’, 엎치락뒤치락 연이은 반전에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재미까지 갖춘 크리스티 컬렉션 미스터리’, 600년 동안 전설로만 회자되던 제프리 초서의 미발견 원고를 소재로 한 사자의 책’, 그리고 환상특급 혹은 괴담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는 그것들이 보인다’, ‘백만 불짜리 속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관한 소고등 여섯 편 모두 다양한 장르 속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여섯 편 중 네 편이 희귀 초판본 또는 미발견 원고를 소재로 삼고 있어서 미스터리의 재미를 더욱 배가시켰는데, 미스터리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초판본, 영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미발견 원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불태워 없앤 걸로 알려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초고 등이 그것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학구적 열망에 몸이 달아 이성을 잃는가 하면, 누군가는 내가 아는 나, 내가 믿는 가치, 내가 발붙인 세계를 몽땅 집어삼키는”(역자 후기) 그것을 읽은 뒤 파국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에 관한 미스터리 앤솔로지는 장르물 독자에겐 호기심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형식입니다. 좀더 익숙한 작가들이 라인업에 포진됐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 작품이 아니면 만나볼 수 없었던 미지의 작가들을 알게 된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오토 펜즐러가 계속 ‘Bibliomysteries series’를 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간된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2015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페이스 오프처럼) 주제가 꼭 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 하에 모여 협업을 이룬 앤솔로지라면 역시 무조건 반갑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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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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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는 안정된 수입과 고급 주택을 둔 가장으로, 겉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인물이지만 정작 본인은 조금도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릴 적부터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사진은 그저 호사스런 취미로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 베스와의 결혼생활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벤의 자괴감은 점점 더 최악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느 날 아내 베스가 이웃남자와 불륜관계임을 눈치 챈 벤은 늦은 밤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날 밤에 벌어진 비극을 기점으로 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신간이나 근간도 아니고 12년 전에 출간된 작품이라 별 의미 없는 조언이겠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물론 책 뒤표지의 짧은 홍보카피조차 보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변곡점들이 모두 노출돼있어서 엔딩만 빠진 스포일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만큼 서평을 쓰는 일이 곤혹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고, 위의 줄거리 외에 달리 이 작품을 소개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뒤 작품 활동은 주로 영국에서 하고 있는 더글라스 케네디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곳은 프랑스라고 합니다. 이 작품의 프랑스판 제목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인데, 다소 직설적이지만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굴곡진 삶을 잘 대변하고 있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꿈을 접은 채 살아가던 한 남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생 최악의 사건을 겪은 뒤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손에 넣은 삶이 평탄하게 이어질 리는 없습니다. 벤이 올라탄 삶의 롤러코스터는 최대치의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그를 쉴 새 없이 극과 극의 상황 속에 내던지곤 합니다.

 

사실, 극과 극의 상황이 이 작품의 뼈대이자 가장 큰 변곡점들인데, 스포일러 때문에 일일이 소개할 수 없는 건 이 작품을 직접 읽어본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의 힌트라고 해봐야 줄거리에서 언급한 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됐다.” 정도인데, 아마 이쯤만 해도 이 작품의 대략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야기가 무척 빠르고 긴장감을 놓기 어려운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연이어 벌어져서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점, 그리고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주인공이지만 어떻게든 그가 위기를 헤치고 성공과 행복을 손에 넣길 바라게 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란 건 확실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 있긴 합니다. 처음 읽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라 그의 성향이 원래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거의 일지에 가까운 디테일한 묘사들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대목이 꽤 여러 곳 있었습니다. 꼭 필요한 부분들 - 가령, 벤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진에 관한 기술적 설명들 - 은 아무리 자세하더라도 이해가 됐지만, 몇 줄로 요약해도 충분한 장면들에까지 과도하게 분량을 할애한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1997년에 출간된 작품임을 감안하더라도 벤이 도주, 인멸, 위장, 위조 등 난이도 높은 장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이 너무 쉬워 보여서 사진작가를 꿈꾸던 변호사가 아니라 베테랑 스파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과 함께 책장에 오래 방치돼있던 위험한 관계도 곧 읽을 예정인데, ‘빅 픽처의 아쉬움을 상쇄시킬만한 더글라스 케네디만의 진짜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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