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괴담 스토리콜렉터 10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는 호러 소설 작가다. ‘는 꽤 오랜 기간 괴담을 수집해왔기에 종종 자신이 겪은 괴이한 일을 들려준다며 그 해석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이번에 는 다섯 명의 사람에게서 기이한 체험담을 듣는다. 일곱 살 때 시골집에 보내져 일곱 밤을 집안에 갇힌 채로 보내면서 겪어야 했던 이상한 체험, 남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와 담임교사의 이야기, 어느 무명작가가 종교 단체 시설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다 경험한 설명할 수 없는 일화, 할머니의 부탁으로 타지의 저택을 찾았다가 알 수 없는 것을 불러내고 만 으스스한 일, 그리고 비 오는 날마다 나타나 괴담을 들려주는 한 가족을 만난 이의 고백 등이 그것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호러 세계를 구축해온 미쓰다 신조의 신작입니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한국에 출간된 21편 중 딱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나름 마니아라고도 자처할 만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읽은 작품들은 살짝 범작에 가깝다는 인상만 받아서 우중괴담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엿볼 수 있듯 현실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현상과 그것이 몰고 온 공포가 미쓰다 신조 스타일의 서사를 통해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 자신이 라는 화자로 등장하며, 그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체험담을 바탕으로 쓴 네 편의 이야기와 그 네 편을 아우르는 마무리 편까지 모두 다섯 편의 호러물이 수록돼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 본인을 작가이자 화자인 나로 설정한 작품이 여럿 있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독자가 느끼는 공포를 작가이자 화자인 나도 동일한 심정으로 겪는다는 점입니다. “괜히 이 이야기를 읽었다가 밤에 화장실도 못 가는 거 아닐까?”라는 일반독자의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괴담 수집가이면서도 정작 누군가에게 괴담을 들을 때면 모순된 감정에 빠지곤 하는 작가이자 화자인 나의 심정이 훨씬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기대와 불안이 반반이었다. 전자는 어떤 괴이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그리고 후자는, 그 괴담이 뜻밖의 앙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었다.” (p334)

 

수록작 가운데 타인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초등학생과 그의 담임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예고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야기 자체도 서늘하고 소름 돋지만 막판 반전과 함께 미스터리 요소도 잘 갖추고 있어서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재미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이한 저택에서 1주일의 은거를 견뎌야했던 소년이 마물과 마주치게 된 이야기를 다룬 은거의 집과 자기도 모르게 봉인된 마물을 풀어놓은 탓에 끔찍한 공포에 빠지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부르러 오는 것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도조 겐야 시리즈작자미상’-‘사관장’-‘백사당으로 이어지는 작가 시리즈’, 그리고 궁극의 호러물인 노조키메를 좋아하다 보니 대체로 눈높이도 높아지고 호러의 강도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 나머지 그의 다른 작품들이 다소 싱겁게 느껴진 게 사실인데, ‘우중괴담은 굳이 분류하자면 딱 그 중간쯤 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미쓰다 신조 입문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지만, 제대로 된 섬뜩함을 맛보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만 9년 동안 한국에 감감 무소식인 도조 겐야 시리즈인데, 내년에는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
야요이 사요코 지음, 김소영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직 변호사인 이모부가 공원에서 살해당한 뒤 수사가 미궁에 빠진 상태에서 이모를 만난 유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모는 양아들인 시후미를 범인으로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절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며 유키에게 시후미가 범인이 아니란 걸 입증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탐정사무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유키는 시후미의 주변을 조사하면서 예상 밖의 단서들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또 다른 죽음 혹은 사건들이 시후미 주변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죽음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사고로 처리됐지만 유키는 탐문과 조사 끝에 이면의 진실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그리고 20여년에 불과한 시후미의 삶이 놀랍도록 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로 들어찼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집니다.

 

서평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용을 공개해도 좋을지 무척 애매해서 출판사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모두 찾아 읽었는데, 일단 두 소년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죽음이 잇달아 일어난다.”, “죄와 벌, 그리고 평생 끝나지 않을 첫사랑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를 기준으로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등장인물도 꽤 많고 사건도 여러 개인데다 묵직한 심리스릴러 서사까지 갖추고 있어서 농도와 밀도가 꽤 진하고 높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가족사, 비정상적인 인간관계, 한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시킬 정도로 잔혹했던 학대와 억압이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어서 유키의 조사가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독자는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속에 하나 둘씩 쌓여가는 기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에 방점이 찍힌 미스터리입니다. 특히 ?’를 알아내기 위한 유키의 조사는 짧게는 1년 전, 길게는 시후미가 중학생이던 10년 전까지 거슬러 오르는데, 그 과정에서 유키는 시후미가 유일하게 친구로 삼았던 한 인물을 알게 되고, 그들 사이의 우정 이상의 감정이 현재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어떻게?’라는 미스터리의 해법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낸 순간 유키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으며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팩트와 무관하게 진짜 가해자는 누구이고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 감히 누가 진실을 논할 것인가 등 신조차 단정할 수 없는 난제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미스터리답지 않게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비극을 암시하는 시적 언어로 지어진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 이 작품은 독자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감정을 남겨놓습니다. 그래선지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내면이 훨씬 더 기억에 깊게 각인되는데, 아마 이 지점에서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미련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탐문을 벌이는 유키의 행보는 아날로그 시대의 탐정을 떠올리게 하는 미덕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걸 기억하는 말 많은 관련자들에 의지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품고 있습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뼈대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과 이미지를 통해 잔혹하지만 서정적인 미스터리를 자아냈습니다. 아마도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개성은 바로 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취향에 잘 맞는 서사는 아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독특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가 형사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편당 50페이지 안팎에 불과해서 복잡하거나 정교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수록작 모두 가가 형사의 매력과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미스터리를 잘 담아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도 가가 외에 극소수라 대부분 가가와 범인의 ‘2인극이라 할 수 있고, 범죄 역시 흉악함보다는 그 이면의 사연들이 더 강조되는 일상 살인미스터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수록작들의 얼개를 대략 살펴보면, 사회적 명성 때문에 저지른 치명적인 거짓말 하나가 어떤 비극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모두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지만 실은 그 이면에 가족 혹은 부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가가의 추리를 통해 폭로하는 차가운 작열’,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건 어머니의 비극이란 소재 때문에 범행의 진실이 드러났을 때 더욱 더 소름을 돋게 만든 2지망’(개정판 제목은 두 번째 꿈’), 남편의 학대에 절망한 아내가 마지막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아이러니한 비극에 마주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룬 어그러진 계산’, 친구의 교통사고에 의심을 품은 가가가 자신이 목격한 작은 단서들을 통해 친구 부부의 내밀하고도 서글픈 사연을 파헤치는 친구의 조언이 수록돼있습니다.

 

사회적 명성이라는 허상을 다룬 표제작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를 제외하곤 모두 가족 혹은 부부의 갈등이 범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살인을 야기한 갈등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다 육아의 책임까지 떠맡은 전업주부의 일탈이라든가 아내를 도구로 여기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려는 집착에 가까운 교육열 등이 갈등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트릭 자체를 강조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향이 상대적으로 짙어보였습니다.

 

언제나처럼 가가는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역자 후기)을 발휘합니다. 결정적인 단서와 증거보다 담배 냄새나 샴푸 냄새, 싱크대의 유리컵이나 벽에 걸린 초등학생의 그림 같은 일상 속 흔적들이 더 큰 추리의 단초들입니다. “모든 건 현장에 있다.”는 교훈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 덕분에 마치 일선 형사들을 위한 교과서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반전도, 복잡한 미스터리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감을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편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이 작품을 통해 가가 형사와 처음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지만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일곱 편 가운데 쓰리왕국을 읽었고 교단 X’는 도중에 포기했는데, 비교적 쉽고 선명한 서사의 쓰리외에는 읽을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혼돈만 가중되는 경험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탓에 책장에 보관 중인 악과 가면의 룰은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기약 없이 방치해 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미궁8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약간의 기대를 품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절반,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절반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엄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빠, 사춘기의 성적 욕망을 여동생에게 푸는 아들과 오빠를 피해 다니는 딸. 묘하게 뒤틀린 가족이 집에서 죽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22년이 흐른 지금, 살아남은 딸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는 설정만 보면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예단하기 쉽지만, 을 테마로 인간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그려온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단순히 누가 범인? 진실은 무엇?”을 넘어 한껏 일그러진 여러 인간의 심리와 그들이 느낀 출구 없는 미궁의 공포에 방점을 찍습니다.

 

어릴 적부터 음울함에 휩싸인 채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을 만들기도 했던 신견은 30대 법률사무소 직원이 된 지금, 겉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온통 위악만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바에서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나에가 22년 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된 신견은 미궁에 빠진 그 사건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추리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밀실상태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이 신견의 추리로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견은 사나에로부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그녀의 가족사와 함께 범행 당일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언뜻 앞뒤가 잘 맞아 보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위화감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사나에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만난 이유를 듣곤 충격과 안도감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자고 생각했다. 내 존재의 경향과 반대되는 짓을 해보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항상 건전하게 살라고? 뭘 위해서?” (법률사무소 직원 신견)

 

나를 소유해줘. 당신 것으로 만들어.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죽여도 좋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좋아.” (22년 전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나에)

 

위악에 사로잡힌 채 22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 신견과 사건 이후 내면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사나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시종 기묘한 공포와 섬뜩한 이물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타인의 일그러진 마음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거기엔 희망이나 긍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의심, 증오, 욕망, 비관, 공포,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온통 오염된 듯한 두 사람에게 해피엔딩이란 가당치 않은 일로 보이고, 미스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어느 새 관심사에서 멀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길고도 긴 악몽 한 편을 꾼 듯한 으스스함이 전신을 지배합니다. 24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몇 배는 되는 듯한 서사에 억눌린 기분도 함께 말입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기승전결이라는 평범한 구조와도 거리가 멀어 독자 입장에선 결코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어느 작품보다 높은 몰입감과 만족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아쉬움을 느낀 제 경우엔 책장에 방치된 악과 가면의 룰을 읽을 일이 더더욱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저 언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그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명 소설가와 신예 시인의 결혼식을 앞두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신랑의 집에서 한 여성이 자살한다. 신랑은 매니저와 함께 시체를 그녀의 집으로 옮기는 등 필사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감추려 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그 자신이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독살당하고 만다. 여동생을 향한 뒤틀린 사랑으로 인해 질투에 눈이 먼 신부의 오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살로 몰고 간 신랑에게 증오심을 불태우는 신랑의 매니저, 한때 죽은 신랑과의 결혼을 꿈꿨다가 배신당한 편집자. 이들 모두 그를 죽이고 싶어 했고, 스스로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독약을 건넸는지가 모호한 가운데, 가가 형사는 특유의 냉정하고 빈틈없는 추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다섯 번째 작품인 내가 그를 죽였다는 전작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남녀의 애정 문제가 살인사건의 저변에 깔려 있고, 용의자는 극소수(전작은 2, 이 작품은 3)이며,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군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아 독자와의 추리대결! 궁극의 범인 찾기 소설로 불린다는 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말미에 추리과정을 설명하는 봉인 해설이 수록돼있지만, 후룩후룩 읽은 독자라면 그 해설을 읽고도 범인을 바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느 대목을 다시 읽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가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교묘하고도 감쪽같이 매복시켜놓았습니다.

 

자살로 추정되는 사건과 독살이 분명한 사건 등 두 개의 죽음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유명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호다카 마코토가 결혼식장에서 독에 의해 사망하자 경시청 수사1과가 수사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마코토와 연인관계였던 준코가 자신의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자 관할서인 네리마 경찰서의 가가 형사가 투입됩니다. 용의자를 세 명으로 압축시킬 수 있었던 건 마코토를 죽인 독약이 평소 그가 지니고 다니는 필 케이스(휴대용 알약통)에 들어있었고, 결혼식 당일 그 필 케이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게 단 세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용의자 세 명이 한 챕터씩 1인칭 화자를 맡아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마코토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 심정을 자신이 화자를 맡은 챕터에서 절절하게 풀어놓습니다. , 마코토가 죽은 뒤에는 모두 내가 그를 죽였다.”라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내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담당편집자, 유키자사 가오리)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나는 꼭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매니저, 스루가 나오유키)

내가 준 독에 의해 그 녀석이 죽어가던 광경은 지금도 눈꺼풀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신부 미와코의 오빠, 간바야시 다카히로)

 

말하자면 세 명의 용의자는 자신이 마코토를 죽였다고 확신하면서도 가가의 집요한 탐문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에 처한 셈입니다. 누가 범인이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가는 집요한 탐문을 통해 세 용의자의 허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냅니다. 한때 모든 가설이 장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가가는 누구든 허투루 여겼을 게 분명한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특정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당신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 작품의 막을 내립니다.

 

근친상간, 증오, 배신감 등 어둡고 음습한 감정을 품은 용의자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라든가 사소한 단서들과 평범한 진술 속 허점을 파고들어 범인을 찾아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단번에 완주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와 함께 독자의 자발적인 추리를 이끌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필력도 여전합니다.

다만, “독자와의 추리대결!”이란 형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진범 찾기에 참여하겠지만,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숨겨놓은 단서는 너무나 미시적인 것이라 알고 나면 다소 허탈해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독자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홀려놓곤 약간 모호한 정보를 결정타 삼아 범인을 특정한 건 반칙으로 여겨질 여지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가가 형사 다시 읽기가운데 이제 절반을 마친 셈인데, 3편인 악의를 제외하곤 오래 전 기억과 마찬가지로 다소 평범한 미스터리로 읽혔습니다. 가가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기억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후기작들(구체적으로는 시리즈 7붉은 손가락부터 마지막 편까지)이라 지금까진 예열 단계라고 생각해왔는데, 다음 작품인 거짓말 딱 한개만 더는 단편집이라 기억이 더욱 애매모호해서 예열의 마지막 편이 될지 진면목의 첫 편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대감을 갖고 조만간 달려볼 예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