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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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지만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일곱 편 가운데 쓰리왕국을 읽었고 교단 X’는 도중에 포기했는데, 비교적 쉽고 선명한 서사의 쓰리외에는 읽을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혼돈만 가중되는 경험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탓에 책장에 보관 중인 악과 가면의 룰은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기약 없이 방치해 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미궁8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약간의 기대를 품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절반,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절반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엄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빠, 사춘기의 성적 욕망을 여동생에게 푸는 아들과 오빠를 피해 다니는 딸. 묘하게 뒤틀린 가족이 집에서 죽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22년이 흐른 지금, 살아남은 딸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는 설정만 보면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예단하기 쉽지만, 을 테마로 인간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그려온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단순히 누가 범인? 진실은 무엇?”을 넘어 한껏 일그러진 여러 인간의 심리와 그들이 느낀 출구 없는 미궁의 공포에 방점을 찍습니다.

 

어릴 적부터 음울함에 휩싸인 채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을 만들기도 했던 신견은 30대 법률사무소 직원이 된 지금, 겉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온통 위악만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바에서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나에가 22년 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된 신견은 미궁에 빠진 그 사건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추리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밀실상태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이 신견의 추리로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견은 사나에로부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그녀의 가족사와 함께 범행 당일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언뜻 앞뒤가 잘 맞아 보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위화감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사나에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만난 이유를 듣곤 충격과 안도감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자고 생각했다. 내 존재의 경향과 반대되는 짓을 해보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항상 건전하게 살라고? 뭘 위해서?” (법률사무소 직원 신견)

 

나를 소유해줘. 당신 것으로 만들어.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죽여도 좋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좋아.” (22년 전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나에)

 

위악에 사로잡힌 채 22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 신견과 사건 이후 내면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사나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시종 기묘한 공포와 섬뜩한 이물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타인의 일그러진 마음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거기엔 희망이나 긍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의심, 증오, 욕망, 비관, 공포,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온통 오염된 듯한 두 사람에게 해피엔딩이란 가당치 않은 일로 보이고, 미스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어느 새 관심사에서 멀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길고도 긴 악몽 한 편을 꾼 듯한 으스스함이 전신을 지배합니다. 24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몇 배는 되는 듯한 서사에 억눌린 기분도 함께 말입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기승전결이라는 평범한 구조와도 거리가 멀어 독자 입장에선 결코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어느 작품보다 높은 몰입감과 만족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아쉬움을 느낀 제 경우엔 책장에 방치된 악과 가면의 룰을 읽을 일이 더더욱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저 언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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