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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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중년여성 오시타니 미치코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사망 직전 고향 친구인 유명 연극연출가 아사이 히로미를 만난 것이 확인됐지만 그 외에는 단서도 동기도 알아낼 수 없어 수사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는 인근에서 일어난 노숙자 사망사건과의 연관성을 밝혀내지만 두 사망자 사이의 연결고리는 오리무중일 따름입니다. 사촌형이자 니혼바시 경찰서 형사인 가가에게 자문을 구하던 마쓰미야는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기이한 달력 - 니혼바시 일대 12개의 이름이 적혀 있는 - 이야기를 꺼냈다가 가가의 표정이 굳는 걸 보곤 놀랍니다. 20여 년 전 집을 나간 뒤 고독사한 어머니 유리코의 유품 속에 똑같은 메모가 있던 걸 기억해낸 가가는 경시청 상부의 허락을 받고 수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라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가가 형사 시리즈10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또한 시리즈 중간중간 언급됐던 가가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어서 그를 지켜봐온 팬이라면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어머니 유리코는 가가가 12살 때 집을 나간 뒤 소식을 끊었습니다. 경시청 수사1과에 근무하던 20대 후반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지 16년 만에 낯선 사람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홀로 유골을 수습했던 가가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들인 자신을 조금이라도 기억은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두 살인사건의 범인 혹은 피해자가 어머니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가가는 경시청의 수사를 돕는 형태로 어머니의 흔적을 쫓기 시작합니다. 평소보다 더 집요하고 꼼꼼하게, 하지만 평소와 달리 폭주하기도, 흥분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수사의 1차 목표는 아무런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살인사건 피해자의 접점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인 유명 연극연출가 아사이 히로미와 피해자들 사이의 접점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무려 30년 전의 일까지 조사해야 하는 탓에 마쓰미야를 비롯한 경시청 수사팀의 탐문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습니다. 탐문 상대 대부분이 희미한 기억 외엔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가가는 그들의 진술 속에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위화감을 포착하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앞선 시리즈들에서 늘 그랬듯 가가는 사소한 단서와 평범한 진술 속에서 진실과 진상을 알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피살된 자의 달력과 어머니의 유품 속 메모에 같은 필체로 적혀있던 니혼바시 12개 다리 이름의 미스터리를 파악함으로써 단번에 수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합니다.

 

불과 2년 반 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감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형사로서의 가가의 능력이 최대치로 발산되는 가운데 사건의 중심에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놓여있다 보니 그 어떤 작품보다 몰입감도 높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한 작품을 연상시키는 살인사건의 진상 역시 비극의 강도가 대단해서 개인적으론 그의 미스터리 가운데 베스트로 꼽아도 손색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은 시리즈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만 제대로 맛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라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이 남았겠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아쉬움 - 더는 가가 형사의 활약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 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시리즈 전체를 순서대로 다시 읽으면서 일곱 번째 작품인 붉은 손가락에서 이제야말로 가가의 전성시대가 시작됐구나!”라고 감탄했고, 실제로 그 뒤로 나온 세 작품은 하나 같이 가가의 매력이 만발했던 작품들이라 아쉬움은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지만, 가가의 퇴장은 너무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게 9년 전이니,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쯤 가가는 40대 중반이 돼있을 것입니다. 성격상 관리직이 되진 않았을 테니 여전히 현장을 뛰고 있는 가가를 그린 열한 번째 작품이 지금 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니면 외전으로라도 좋으니 언젠가 꼭 한 번은 가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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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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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니혼바시 다리 한가운데 있는 기린의 날개 동상 앞에서 발견됩니다. 피해자의 소지품을 갖고 있던 유력한 용의자가 도주 중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경찰은 일찌감치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심증 외에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납니다. 하지만 니혼바시 경찰서의 가가 형사는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파트너이자 사촌동생인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마쓰미야와 함께 니혼바시 인근을 집요하게 탐문하던 가가는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내곤 충격적인 진실을 밝혀냅니다.

 

기린의 날개는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긴 가가 형사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이자 가가 형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다음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그야말로 가가의 매력이 한참 물이 오른 상태에서 시리즈가 종료된 탓에 지금까지도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졸업에서 대학생 탐정으로 등장했던 가가는 기린의 날개에선 인간적으로 성숙한 것은 물론 경찰로서의 능력도 최고치를 찍습니다. ‘조용한 반골이라고 부를 만한 그만의 물러서지 않는 고집은 사건을 얼른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상부 관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누구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게 분명한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끝내 진실을 파헤쳐냅니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참혹한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가가가 아니라면 끝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겉모습은 위압적이지만 조금만 얘기를 나눠보면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남자,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 관할서를 전전하는 자유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단서와 말 한마디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집중력과 추리력, 집요함과 끈기로 똘똘 뭉친, ‘진짜 이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경찰의 표본.”

 

시리즈를 읽으면서 메모해놓은 저만의 가가 인물평입니다. 픽션의 주인공이라 가능한,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캐릭터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를 통해 그에게 이웃의 친근한 형사같은 사실감 넘치는 매력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가를 돕는 천우신조들 - 기막힌 타이밍에 그에게 전달되는 정보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목격자들의 신비한(?) 기억력과 진술 등 - 이 간혹 그 사실감에 작은 흠집을 내곤 하지만, 그 천우신조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가가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해서 특별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습니다.

 

시리즈 명품 중 하나인 붉은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기린의 날개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사건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다 읽은 뒤 복기해보면 오히려 미스터리 자체보다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크고 작은 비극들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걸 깨닫게 되는데, 이는 비단 가가 형사 시리즈뿐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중년남자의 기이한 행동들, 유족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용의자로 몰린 채 의식을 잃은 남자의 연인의 슬픔 등 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사연은 냉정하지만 따뜻한 형사 가가의 매력과 잘 어우러져 이야기의 힘을 몇 배는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픽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고르는 건 바로 이런 매력에 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 MD 최원호의 소개글은 120% 이상 동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유의 인간미를 품은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범죄 트릭은 주역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깝다. 살인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슬픈 이야기와 함께 부조리한 압력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성의 힘 같은 드라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나선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오래 전 집을 나간 뒤 홀로 삶을 마감한 가가의 어머니의 사연이 미스터리와 연결돼서 무척 큰 여운과 인상을 남긴 걸로 기억합니다. 가가의 매력과 시리즈 특유의 서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고 할까요? ‘기린의 날개의 뒷맛을 좀더 오래 만끽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가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허겁지겁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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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진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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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혹은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은 기타모리 고의 가나리야 시리즈입니다. 단번에 시선을 잡아 끈 제목에 홀려 읽은 시리즈 첫 편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포함 모두 세 작품이 출간됐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뒷골목 맥주바 가나리야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가 단골손님들의 삶의 비애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여섯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딱히 음식이나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잔혹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부드럽고 달달할 게 99% 확실한 소프트 미스터리를 멀리 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그런 제가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읽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전적으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직전에 출간된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그 전에 읽은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각각 4.5, 5개의 높은 평점을 준 바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겐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는 뜻입니다.

 

출판사가 명명한 이 작품의 장르는 미식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 순수한 일상 속 사연들을 다루고 있으니 더 엄밀히 얘기하면 미식 일상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인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인 나가에와 그의 아내 나기사,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초등학생 다이와 사키 등 모두 여섯 명이 등장합니다. 두 부부는 번갈아 자기 집에서 술과 음식을 곁들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나쓰미-나가에-나기사는 대학시절부터 절친이자 술친구였고 후일 나쓰미가 겐타와 결혼한 뒤에도 이 특이한 술자리는 지속됐습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10여년의 공백이 있었고 이제 예비중년이 된 그들은 다시금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이 곁들여진 소소한 즐거움을 되찾게 됐습니다.

 

일곱 편의 수록작 모두 같은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와인, 소주, 사케 등 다양한 주종과 함께 로스트비프, 연어 술지게미 절임, 오징어내장구이 등 맛깔난 안주들로 채워진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화자인 나쓰미가 문득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립니다. 그 일들이란 가십거리에 불과한 사소한 것들이지만 모두들 그 뒷이야기 혹은 숨겨진 사연들을 제멋대로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쌍둥이 자매가 서로 다른 날 학원을 다닌 이유, 싱글맘인 후배 여직원이 뒤늦게 이상한결혼을 한 이유, 자녀를 1류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애쓰던 부모들이 맞이한 의외의 결과, 완벽한 스펙을 갖춘 남자가 이혼당한 이유, 감상문 숙제를 하기 싫어한 초등 3학년생의 기발한 노림수 등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흔한 사연들이 그 추리의 대상입니다.

 

미스터리의 소재를 제공하는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그리고 절친인 나기사는 속된 말로 아무거나 막 던지는역할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난상토론이 벽에 부딪힐 때쯤 대학시절부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뛰어난 두뇌를 샀다.”라는 말을 들어온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 나가에가 아무도 생각 못한 기발한 발상을 통해 진실을 추리해냅니다. 물론 사연의 당사자들이 그 자리에 없으니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수긍할 법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나가에의 추리는 왠지 심심하고 밋밋할 것만 같던 미식 일상 미스터리를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습니다. 주목할 일 없는 작은 단서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든지 의외의 역발상으로 사연 속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나가에는 그 어떤 범죄 미스터리 속 명탐정보다 뛰어난 매력을 발산합니다. 거기에 읽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술과 안주가 곁들여져 있으니 본격 식욕자극 미스터리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합니다.

 

저 역시 이번에 알게 됐지만 이 작품에는 전작이 있습니다. 2016년에 국내에 소개된 나가에의 심야상담소가 그것인데, 화자인 나쓰미와 안락탐정 나가에, 그리고 그와 결혼한 나기사가 대학생이던 시절 자신들의 술자리에 초대된 손님들의 사연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먼저 읽은 제겐 프리퀄이 돼버린 작품인데, 그들의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 역시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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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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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3편인 악의부터 7붉은 손가락까지 네리마 경찰서 소속이던 가가는 이 작품부터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깁니다. (시리즈 1졸업에선 대학생으로, 2잠자는 숲에서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으로 등장합니다.) 낯선 곳에 부임한 터라 스스로 신참이라 자칭하며 사건 수사와 함께 니혼바시의 곳곳을 익히고 배우는 모습이 함께 전개됩니다.

 

이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른바 신참이죠.” (p354)

 

첫 출간 당시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45세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사건과는 무관한 휴먼 일상미스터리처럼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모두 아홉 편의 연작단편이 실려 있는데, 범인을 체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마지막 편 외에 모든 수록작이 탐문 대상자인 니혼바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내밀한 사연이나 비밀을 가가 형사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탐문 대상자들만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본의 아니게 가가가 해결해주는 구조라고 할까요? 암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고민하는 아들, 호스티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남편 때문에 열받은 요릿집 여주인, 감당할 수 없는 고부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남자,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딸 때문에 격분한 아버지 등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목격자 또는 용의자인 탐문 대상자들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가가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합니다.

 

가가 씨는 사건 수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p278)

 

그렇다고 해서 가가가 살인사건 수사에 소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사에 집중한 덕분에 탐문 대상자들이 감추거나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그 해법과 조언을 진심을 담아 건네곤 합니다. 안 그래도 사소한 단서와 평범한 진술 속에서 진실과 진상을 알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가가가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신참의 자세를 성실하게 견지했기에 누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사연들을 눈치 챌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가가 센베이 가게 젊은 딸에게 가가 형사님! 또 땡땡이치는 거에요?”라는 정감어린 꾸중을 듣는 대목은 이 작품의 재미가 함축된 장면입니다.

 

에도 문화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동네 니혼바시라는 무대는 스토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정감어린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규슈의 히타(日田)인데, 시대물 배경으로도 손색없는 그곳의 조용한 정취가 무척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니혼바시 역시 곳곳에 노포가 자리 잡은 올디스 벗 구디스의 향기가 진한 곳으로 묘사돼있습니다. 그곳의 속살을 기웃거리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가가의 모습은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볼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주며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던 가가는 마지막까지 그다운 카리스마와 따뜻한 온기를 전해줍니다. 가가의 예리한 추리와 탐문 덕분에 범인은 체포되고 상부는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가가는 범행 이면의 진짜 사연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가가가 냉정한 형사지만 동시에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는 속 깊은 인물인지를 잘 그려냅니다. 그의 새 상사인 니혼바시 경찰서장은 이번에 좀 재미난 형사를 데려왔다. 머리는 좋은데 삐딱하고 고집이 세다.”라고 표현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형사들이 가가를 절반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 말미에 처음으로 가가가 왜 경시청에서 네리마 경찰서로 좌천됐는지 잠깐 설명이 됩니다. 살인사건 재판에서 변호 측 증인, 즉 범인을 비호하는 증언을 한 탓에 유족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좌천됐다는 점만 설명될 뿐 구체적으로 어느 사건인지까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가가가 유일하게 경시청 형사로 등장했던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추정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이제 가가 형사 시리즈 다시 읽기도 단 두 편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남은 두 편 모두 정통 미스터리와 함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전개되는데, 그래서인지 더는 가가 형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아껴 읽고 싶지만 니혼바시의 신참가가가 또 어떤 성장을 보였을지 궁금해서라도 조만간 두 편 모두 폭주하듯 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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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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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노모,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아내, 제멋대로인 중3 아들과 함께 사는 40대 가장 아키오는 퇴근 직후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당 한쪽에 어린 소녀의 사체가 비닐에 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란 사실을 아내에게 듣곤 망연자실해집니다.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아내는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다며 목에 가위를 들이대면서까지 반대합니다. 결국 아키오는 소녀의 시신을 유기하지만 다음날부터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아키오와 아내는 끝내 아들의 살인을 은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경찰을 속이기 위해 누구도 떠올리기 어려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붉은 손가락가가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가운데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2006년에 출간된 작품이 바로 다음 해 한국에 나왔으니 출판사가 최신간을 먼저 소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때까지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먼저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라는 밀실과 가족애라는 굴레’, 그 어두운 초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붉은 손가락은 어린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통해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의 민낯과 고통,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그립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던 아키오의 가족은 중3 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립니다. 이성과 상식이 남아있었다면 순리대로 처리했겠지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은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가족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현대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 고령화 사회의 노인 문제, 청소년 범죄 등 폭넓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는 옮긴이의 말대로 붉은 손가락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키오의 가족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 가가는 탐문과정에서 느낀 위화감과 잠깐 목격했을 뿐인 평범한 풍경 때문에 아키오의 가족에 주목합니다. 대단한 추리나 번득이는 혜안이나 천재적인 직감이 아니라 그야말로 관찰력의 힘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간다는 뜻인데,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붉은 손가락에선 그 능력이 진짜 형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성상 기계적으로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스스로 죄를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인상적인 태도를 취해서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듭니다.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가가의 가족사입니다. 관할서 형사인 가가의 파트너가 된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 슈헤이는 가가의 외사촌동생입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외삼촌, 즉 가가의 아버지 다카마사에게 큰 도움을 받은 마쓰미야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경찰까지 됐고, 현재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그를 극진히 간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가가가 아버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자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사 도중에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가가의 불행한 가족사, 특히 어머니의 가출과 불행한 죽음을 알게 된 뒤론 다카마사를 향한 가가의 감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마쓰미야는 가가와 함께 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살인사건 수사를 벌입니다.)

 

살인사건에 휘말린 붕괴 직전의 아키오의 가족과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힌 나머지 뿔뿔이 흩어지고 만 가가 가족의 이야기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에게 묵직한 인상을 남깁니다. 따뜻한 인성을 품었지만 냉철한 형사이기도 한 가가가 평소와 다른 태도로 사건에 임한 건 아마도 산산조각 난 아키오 가족에게서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가가는 네리마 경찰서를 떠나 니혼바시 경찰서에 몸담습니다. 그 첫 이야기가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인 신참자인데, 역시 붉은 손가락못잖게 매력적인 작품이라 오랜만에 다시 읽을 생각만으로도 기대감에 들뜨게 됩니다. 물론 가가 형사 시리즈가 이제 세 편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그만큼 커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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