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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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정작 남편은 불륜 중이고, 조산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지만 성취감도 보람도 느끼지 못하며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하라 사에. 그리고 어려서부터 엄마의 지독한 통제와 간섭에 큰 상처를 입은 탓에 혼전 임신으로 낳은 딸을 소중히 키워온 가시와기 나쓰코. 두 사람의 관계는 절친 이상의 특별함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것처럼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늘 함께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사에의 남편 다이시가 실종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까지 한국에 출간된 7편 중 6편을 읽었을 정도로 아시자와 요는 저의 관심작가 중 한 명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이야미스(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교묘하게 파헤쳐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의 대표 작가라고 돼있는데, 개인적으론 정통 이야미스와는 살짝 결이 다른, 애틋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이 더 인상적인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또 작품마다 다양한 스타일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특정 장르만 추구한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작가이기도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이 독특한 연작 괴담집이라면, ‘죄의 여백은 학교폭력과 복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는 일상에 깃든 농도 짙은 공포를 소재로 한 단편집입니다. 그런 아시자와 요가 이번에는 가족, 여성, 모성, 부부 등 가장 가깝지만 한없이 먼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관계를 소재로 지독한 심리극이자 반전 미스터리를 선보였습니다.

 

이야기는 사에와 나쓰코 두 사람의 시점에서 번갈아 전개됩니다. 남편이 회사동료와 불륜 중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며 오로지 아이를 갖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에에겐 오직 나쓰코만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탈출구입니다. 다른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을 돕는 조산원의 간호조무사라는 직업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에에게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자 고된 노동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에는 나쓰코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반면 엄마의 강압적인 통제와 지배에 질린 채 성장한 나쓰코는 혼전 임신으로 낳은 딸을 위해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이라고 기원하는 간절한 엄마이자 늘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사에에게 기꺼이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제공하는 넉넉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사에의 남편 다이시의 실종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이 사건은 대략 1/3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나머지 2/3는 사건을 대하는 사에와 나쓰코 두 사람의 불안과 공포와 의심, 그리고 막판 반전과 함께 밝혀지는 사건 이면의 진실과 진범의 정체 등으로 채워집니다.

 

사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부쯤 이 작품의 반전 중 한 가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살짝 위화감이 드는 대목들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반전을 눈치 챈다 하더라도 나머지 내용들이 예상대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작품은 미스터리 자체보다 인물들의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심리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누가, , 어떻게등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미스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하면서도 애틋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기곤 하는 아시자와 요 특유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다만, 이런 구조의 작품을 여러 편 읽은 탓에 신선함을 만끽할 수 없었다는 점,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여 온 아시자와 요가 이제는 다소 상투적이라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내세운 점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같은 소재나 주제라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롭게 보일 수도 있긴 하지만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은 왠지 익숙한 이야기의 재탕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다 보니 조금은 더 아쉽고 서운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시자와 요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나서 저와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색다른 괴담과 공포를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단편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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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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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에도시대의 괴담을 다루는 미야베 월드 2중에서도 가장 편수가 많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입니다.

 

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왔다. 이야기꾼이 한 명에, 듣는 이도 한 명. 하는 이야기는 하나뿐. (중략) 그 자리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만 그치고,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여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듣는 이는 받아든 무거운 짐을 흑백의 방에서만 듣고 잊는다.” (p 9)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 너무나 고통스럽거나 무서워서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 등 흑백의 방을 찾은 화자들의 사연은 듣는 것조차 사뭇 힘들고 괴로운 내용들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고.”라는 흑백의 방의 원칙은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화자는 이야기함으로써 고통과 번뇌를 버릴 수 있고, 청자(聽者)는 들어주긴 하지만 그것을 흑백의 방 밖으로 흘리지 않고 그대로 버릴 뿐입니다.

 

이 특이한 괴담 자리는 애초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인 17세 소녀 오치카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괴로운 기억을 품은 채 고향을 떠나 친척의 가게인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오치카는 이 세상의 온갖 기구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며, 상처 입은 마음을 봉합하고 그 흔적을 안고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눈물점부터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청자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청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세 번째 작품을 맞이했지만 도미지로는 여전히 어리숙하고 순진할 뿐입니다. 더구나 이번 수록작 세 편 모두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이라 도미지로는 때론 대놓고 놀라거나 화자 앞에서 구토를 하는 등 숙맥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사위와 등에

저주에 걸린 누나를 구하려다 그 자신이 저주에 걸려 오직 신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노름의 마을에 끌려간 11살 소년 모치타로는 언젠가 현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고용일꾼처럼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파국뿐입니다. 그날 이후로 모치타로는 웃는 방법을 잃은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왔습니다.

 

질냄비 각시

거친 강물을 오가는 나룻배 선장인 기요마루와 누이동생 오토비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질냄비로 인해 운명이 뒤바뀌고 맙니다. 그 질냄비 안에는 상상도 못할 기이한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입동 아침, 연못에서 건져 올린 시체가 되살아나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시체의 공격을 받은 인간은 시체와 똑같이 괴물이 돼버립니다. 17살 소년 신고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인간이 아닌 자들과 대적합니다. 하지만 기괴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무수한 인간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자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주사위와 등에는 스토리는 전혀 다르지만 미야베 월드 2미인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한 색감과 이세계 시공간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질냄비 각시는 전형적인 괴담이지만 거친 강물과 그곳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의 마력이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미야베 미유키 표 좀비물입니다. ‘미야베 월드 2외딴집괴수전이 저절로 생각나는 작품이기도 한데, 스케일이나 여운 등 모든 면에서 두 작품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또한 괴물과 나쁜 정치는 사람의 목숨을 뿌리째 베어내는 것으로는 똑같은 해악이다.”라는 작품 속 한 줄에서 감지할 수 있듯 흥미로운 사회파 호러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다분히 후쿠시마 오염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다음 편에는 오염된 바다를 그린 사회파 호러를 기대하며라는 삼송 김사장 님의 편집자 후기는 시원한 사이다처럼 읽혔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은 저의 최애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은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다음 작품인 9권이 일본에서 예약판매 중이라 2024년 봄쯤에는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라는 편집자 후기를 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뜰 따름입니다. 아홉 번째 작품에선 미시마야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 청자였던 오치카의 출산, 오랜 시간 집을 나가있던 장남 이이치로의 복귀, 차남이자 현재 청자인 도미지로의 신상 등 미시먀야 전반에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과연 어떤 괴담들이 흑백의 방을 서늘하게 만들지, 그 괴담들이 미시마야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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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소리를 듣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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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인 19세 소년 류타는 어느 날 자기 눈앞에서 손목을 그은 소녀 유리코와의 인연 덕분에 고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류타는 또래인 다이고와 가까워지고, 그가 숙식을 해결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활용품점 겸 심부름센터 달나라에 드나듭니다. 다이고를 고용한 사장 할머니는 고집쟁이에 안하무인이지만 류타는 달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다이고와 친해지고 조금씩 은둔형 외톨이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달나라에 의뢰 들어온 괴팍한 사건들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그러던 중 11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가족 몰살사건과 연결되고 맙니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 용의자로 몰렸다가 자살하고 만 한 남자의 어머니, 그리고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져있는 경찰을 지켜보며 류타는 이제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있지 않은 오래 전 사건에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연작단편집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로 처음 만나 홀딱 빠진 뒤로 어리석은 자의 독’, ‘전망탑의 라푼젤’, 그리고 밤의 소리를 듣다까지 한국에 출간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은 모두 읽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어둡고 불길하면서도 애틋함이 녹아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적인 서사 때문에 매번 긴 여운을 느끼며 책장을 덮곤 했습니다. 하지만 밤의 소리를 듣다는 기대했던 우사미 마코토 특유의 맛을 제대로만끽하지 못한 탓에 처음으로 평점에서 별 1개를 빼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중반쯤을 지날 땐 우사미 마코토 작품에 별 3개를 줄 수밖에 없는 건가?”라는 불안함까지 들었던 게 사실인데, 중반 이후에야 기대했던 분위기와 서사가 펼쳐지면서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은 역시 우사미 마코토!”라고 할 만큼 매력적입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한데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죽음에 너무 친숙해져 버린 은둔형 외톨이 류타가 습관성 리스트 커터’, 즉 수시로 손목을 긋는 여학생 유리코와 대면하는 장면은 우사미 마코토 특유의 분위기가 진하게 배어 있어서 이후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하지만 유리코에 이끌려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교 야간부에 들어간 뒤로 류타의 행보는 그저 그런 일상 미스터리속 캐릭터가 되고 맙니다. 또한 자신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다이고와 친해지고 달나라에서 소소한 미스터리들을 해결하면서 그동안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는 전형적인 청소년 성장물의 주인공으로도 보입니다. 사실 이 지점을 읽을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그저 그런 일상 미스터리들이 중반 이후에 펼쳐질 류타의 진짜 미션, 11년 전 가족 몰살사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재료들로 밝혀지긴 하지만, 우사미 마코토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녀의 진면목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11년 전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우사미 마코토는 자신의 장점과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운명, 악연, 악의, 회한, 죽음 등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들을 류타와 여러 조연들을 통해 진하고 농밀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밤의 소리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여러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이 결코 과장이 아님은 바로 이 지점부터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미스터리의 클라이맥스가 다소 설명적인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 대목에서 독자의 관심은 누가 범인?”보다는 류타와 여러 조연들이 감내해야 할 가혹한 운명에 쏠려 있기 때문에 크게 거슬려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에 아쉬움도 남긴 했지만 그래도 머잖아 또다시 그녀의 새 작품 출간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 작품이 아쉬웠음에도 불구하고 우사미 마코토의 매력을 제대로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어리석은 자의 독소녀들은 밤을 걷는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이 10여 편에 이르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드러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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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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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지금까지 책으로 읽지 않은 건 20여 년 전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너무나도 인상 깊게 봤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불문하고 먼저 인상 깊게 보고나면 다른 매체로는 도무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곤 하는데, ‘비밀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려가며 봤을 정도로 영화가 매력적이어서 그동안 계속 원작을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지 20년도 넘은데다 왓차에 올라온 비밀의 포스터를 보니 새삼 원작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좋아하는 번역가 양윤옥의 번역으로 2021년에 재출간됐음을 우연히 알게 돼서 큰맘 먹고 원작 읽기에 나서게 됐습니다.

 

평범한 가장 스기타 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됩니다. 한겨울에 일어난 비극적인 버스 사고로 인해 아내 나오코가 사망하고 딸 모나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나미가 의식을 되찾자 스기타는 감격하지만 이내 모나미의 몸에 깃든 영혼이 아내 나오코라는 것을 깨닫곤 경악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스기타는 딸의 몸에 깃든 나오코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동시에 스기타는 사고버스의 운전자 유족과 인연을 맺은 뒤로 사고 이면의 기구한 사연을 접하게 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연이지만 스기타는 그를 통해 버스 사고의 진실을 접하곤 말할 수 없는 회한에 잠깁니다.

 

11살 딸의 몸에 깃든 36살 아내의 영혼과의 동거는 스기타에게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안겨줍니다.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3, 즉 독자가 볼 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해프닝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함께 먹는 상대가 아내의 영혼이긴 하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외관은 11살 딸이기 때문에 잠자리를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귀여운 초등학생이던 모나미가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어느 새 자신이 나오코임을 잊은 듯 에너지 넘치는 10대의 모습을 보이며 남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스기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자아내는 장면들입니다.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닌,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닌 스기타의 처지는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나오코가 진심으로 모나미로서 새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자 스기타의 감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집착과 분노에 이릅니다. 더구나 나오코는 이제 스기타의 아내가 아니라 모나미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스기타는 더욱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몸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나오코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스기타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에 할애됩니다. 뜻하지 않게 10대로서 새롭게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나오코의 기대와 동요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집니다. 그런 면에서 비밀은 빙의를 소재로 한 극적인 가족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의 두 차례의 큰 반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특유의 충격과 감동이 곁들여져 있어서 똑같은 소재를 갖고도 이렇게 요리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 안정을 되찾은 듯한 스기타가 연이어 뒤통수를 맞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되는 건 사고버스 운전자의 유족과 스기타가 맺은 불편하면서도 운명적인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특별한 반전이나 사건을 포함하진 않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 작품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참사를 일으키고 본인도 현장에서 사망한 버스 운전자의 사연, 그의 유족이 감당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 유족과 이어진 또 다른 가족의 오래된 비밀은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이어지면서 따뜻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원작소설을 큰 폭으로 각색한 것 같습니다. 분명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다가 마지막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영화에 비해 원작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정제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새삼 왓차에 올라온 비밀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20여 년 전처럼 웃다가 주룩주룩하게 된다면 역시 제겐 소설 비밀보다는 영화 비밀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게 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다 읽고도 이 작품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나 인터넷서점에서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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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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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獨蘇)전쟁은 2차 대전 중이던 1941~1945년에 벌어진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돼있습니다. 4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은 900만 명, 소련은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이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소련의 여성 저격수 세라피마와 그녀의 동료들이 겪은 지옥도와도 같은 참상을 그린 반전소설이자 여성소설입니다.

 

주민 40여 명의 작은 마을 이바노프스카야가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18살 소녀 세라피마는 저격병 훈련교관 이리나에 의해 구조된 뒤 저격병 훈련을 받게 됩니다. 세라피마는 침략자인 독일에 대한 복수는 물론 어머니를 죽인 독일 저격수 한스 예거, 자신을 구해줬지만 어머니의 시신을 모욕하고 마을을 불태운 교관 이리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몰두합니다. 고된 훈련 끝에 저격병여단 제39독립소대가 된 세라피마와 동료들은 스탈린그라드 탈환 작전을 시작으로 죽음이 지천에 널린 전쟁에 투입됩니다.

 

나는 이리나를 따라 살인자가 되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살아가는 의미를 얻기 위해 복수를 갈망했다. 전부 틀렸다. 죽이기를 거절하고 살아가는 삶, 그쪽을 선택하는 길이 눈앞에 있었다.” (p509)

 

외교관을 꿈꿨지만 저격병이자 살인자가 되고만 세라피마의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그 어떤 픽션보다도 묵직하고 가슴 아프게 읽힙니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뒤 동료를 지키고 여성을 지키고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웃으면서 적병을 쏘고, 죽인 적의 숫자를 자랑하듯 떠벌리며 살인을 즐기는 괴물이 돼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이 아니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세라피마의 혼란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또한 저격 말고는 어떠한 능력도 없는데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마을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세라피마는 애초 자신이 왜 저격병이 됐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댑니다. 세라피마의 혼란과 회의와 절망은 너무나도 생생한 전쟁 장면 묘사 덕분에 마치 독자 자신이 겪는 것처럼 절절하게 피부에 와닿습니다. 새삼 전쟁의 비극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지독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말입니다.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 삶이 붕괴된 한 저격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여성소설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500명 이상의 여성 병사들의 증언을 읽고 그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작품에는 여성만이 감내해야 하는 전쟁의 참극이 다양하게 묘사돼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약탈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전쟁의 악마성은 80여 년 전에는 훨씬 더 날것 같은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짓밟히는 사람부터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연인이 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세라피마의 눈을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가한 갖가지 비극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물론 마녀부대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친 세라피마와 동료들 역시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에 수시로 내몰리곤 합니다. 그래선지 여성은 약자가 아니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격병이 됐다.”고 당당하게 밝힌 세라피마의 동료 샤를로타의 일성은 지금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참상, 그 안에서 똑같이 적군을 죽이고도 유독 살인자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저격수의 운명,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옥과도 같은 전쟁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한 소녀의 비극.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쟁의 또 다른 민낯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만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에 그려진 비극은 그 전쟁들 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작은 메아리에 불과하겠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가 전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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