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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7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지금까지 책으로 읽지 않은 건 20여 년 전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너무나도 인상 깊게 봤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불문하고 먼저 인상 깊게 보고나면 다른 매체로는 도무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곤 하는데, ‘비밀’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려가며 봤을 정도로 영화가 매력적이어서 그동안 계속 원작을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지 20년도 넘은데다 왓차에 올라온 ‘비밀’의 포스터를 보니 새삼 원작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좋아하는 번역가 양윤옥의 번역으로 2021년에 재출간됐음을 우연히 알게 돼서 큰맘 먹고 원작 읽기에 나서게 됐습니다.
평범한 가장 스기타 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됩니다. 한겨울에 일어난 비극적인 버스 사고로 인해 아내 나오코가 사망하고 딸 모나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나미가 의식을 되찾자 스기타는 감격하지만 이내 모나미의 몸에 깃든 영혼이 아내 나오코라는 것을 깨닫곤 경악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스기타는 딸의 몸에 깃든 나오코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동시에 스기타는 사고버스의 운전자 유족과 인연을 맺은 뒤로 사고 이면의 기구한 사연을 접하게 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연이지만 스기타는 그를 통해 버스 사고의 진실을 접하곤 말할 수 없는 회한에 잠깁니다.
11살 딸의 몸에 깃든 36살 아내의 영혼과의 동거는 스기타에게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안겨줍니다.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 즉 독자가 볼 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해프닝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함께 먹는 상대가 아내의 영혼이긴 하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외관은 11살 딸이기 때문에 잠자리를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귀여운 초등학생이던 모나미가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어느 새 자신이 나오코임을 잊은 듯 에너지 넘치는 10대의 모습을 보이며 남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스기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자아내는 장면들입니다.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닌,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닌 스기타의 처지는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나오코가 진심으로 ‘모나미’로서 새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자 스기타의 감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집착과 분노에 이릅니다. 더구나 나오코는 이제 ‘스기타의 아내’가 아니라 ‘모나미’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스기타는 더욱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몸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나오코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스기타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에 할애됩니다. 뜻하지 않게 10대로서 새롭게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나오코의 기대와 동요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집니다. 그런 면에서 ‘비밀’은 빙의를 소재로 한 극적인 가족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판의 두 차례의 큰 반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특유의 충격과 감동이 곁들여져 있어서 “똑같은 소재를 갖고도 이렇게 요리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 안정을 되찾은 듯한 스기타가 연이어 뒤통수를 맞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되는 건 사고버스 운전자의 유족과 스기타가 맺은 불편하면서도 운명적인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특별한 반전이나 사건을 포함하진 않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非미스터리 작품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참사를 일으키고 본인도 현장에서 사망한 버스 운전자의 사연, 그의 유족이 감당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 유족과 이어진 또 다른 가족의 오래된 비밀은 스기타-나오코-모나미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이어지면서 따뜻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원작소설을 큰 폭으로 각색한 것 같습니다. 분명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다가 마지막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영화에 비해 원작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정제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새삼 왓차에 올라온 ‘비밀’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20여 년 전처럼 ‘웃다가 주룩주룩’하게 된다면 역시 제겐 소설 ‘비밀’보다는 영화 ‘비밀’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게 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다 읽고도 이 작품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나 인터넷서점에서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