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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미스터리 비평서에 있어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아왔던 줄리안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그 책을 보면 줄리언 시먼스가 '럼 펀치'의 엘모어 레너드나 '블랙 달리아'의 제임스 엘로이 같은 현대적인 작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란 다름아니라 형편없는 문장력 때문이다. 아무리 미스터리라고 해도 그렇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사회 하위 계층의 언어를 현실감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시먼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당연히 기울였어야 할 작가적 노력을 방기한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쉽고 간결한 문장이 좋긴 하지만 그저 작가 자신이 편하게 쓰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작품을 망치는 독(毒)일 뿐이라고 그는 전한다.

 

 

 

 

  하필 이 부분이 인상에 남았던 이유는 나 역시 현대 미국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주 마주치곤 하던 그 표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도 '뭐, 미스터리이니까!'하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시먼스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리 미스터리이더라도 일단은 글로 된 작품인 이상 문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미스터리를 읽을 때에도 문장을 신경쓰면서 읽게 되었다. '끝까지 연기하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 로버트 고다드는 그렇게 해서 발견하게 된 작가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고다드는 무엇보다 좋은 문장으로 나를 매료시킨 작가라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고다드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이 1986년이라 '블러디 머더'에서 언급되지는 못했지만 분명 시먼스 역시도 고다드를 좋아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고다드의 작품을 일컬어 '단숨에 읽기에는 너무 좋은 작가'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문장 때문이다. 만연체라서 의미를 파악하느라 여러 번 읽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심오한 은유와 상징들 때문에 멈춰서 시선을 송곳처럼 돌리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문장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어 십대 소년이 르느와르가 그린 독서하는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듯이 넋을 잃고 음미하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꾸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놀라운 은유나 심오한 상징도 없다. 단순하다. 평범하다. 그런데 왜 호들갑이냐고?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그렇다. 하지만 정작 고다드의 마법은 문장들이 모여있을 때 이루어진다. 아, 이걸 말로 설명하려니 정말 어렵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냥 예를 드는 게 낫겠다. 주인공 토비 플루어가 조지4세가 머물렀던 로열 퍼빌리언 궁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결국 헤어져버린 아내 제인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한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p.268)

 

 

 

 

 

 

 

 

 이런 식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장 하나하나는 색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읽으면 묘한 매력이 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문장인데도 여기에서 문득 시선이 멈추게 된다. 사실 토비가 '끝까지 연기하라'의 주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남의 아내가 되려하는 제인을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연기자로서의 자기 경력을 모두 희생해도 좋을 정도로 열렬히 말이다. 위의 말은 그 제인을 만나 한 차례 더 거부를 당한 뒤 나온 것이다. 애타게 되찾고 싶어하는 아내에게서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토비에게 아픈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그가 어느 정도로 제인을 놓쳐버린 것을 후회하는지 또는 지나가버린 과거를 얼마나 되돌리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읽는 독자는 그런 토비의 후회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게 고다드의 마법이다. 그의 문장들은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안으론 성게를 삼킨 듯 다시 게워낼 수 없는 날카로운 아픔이 있지만 문장들은 그런 내색없이 그저 먼 산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듯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한 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는 내내 질질 짜면서 두 눈에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보다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온다. 마치 세계가 반전된 것과도 같은 감각 속에서 그 무심함이 참음의 몸짓이었으며 결국 흘러내린 눈물은 그렇게 했음에도 새어나왔을 정도로 더욱 컸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더 깊이 다가온다. 완전히 홀딱 벗는 것 보다 반쯤 벗는 것이 더 에로틱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마치 비어있는 용의 눈에 점을 찍듯,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을 빼놓고 읽어보면 이 한 문장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무심히 붙은 마지막 문장이야 말로 사실은 마술사가 '프레스티지!'하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렇게 문장의 매력에 대해 말한다는 건 리뷰에게 좋은 도움이 못된다. 문장에 대한 선호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제임스 설터 가 그의 소설 '어젯밤'에 썼던 그런 문장 스타일을 선호한다. 로버트 고다드는 제임스 설터의 문장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한 번 더 체로 걸러내는 듯한 함축과 군더더기를 많이 덜어낸 담백한 맛이다. 하지만 설터의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고다드의 문장에 있어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소설의 줄거리를 분석하거나 등장인물들의 상징, 또는 추구하고 있는 주제를 말하는 게 낫다. 사실 그런 쪽으로 리뷰를 많이 써 왔기도 하다. 로버트 고다드의 이 책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연기 인생이든 사랑이든 모든 것에서 거부당한 주인공 토피 플로어가 결국은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빠졌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화하고 그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선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주제로 쓸 수도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말한 뒤에 주인공의 상황과 그의 도플갱어라고도 할 수 있는 범인의 설정을 통해 그것이 넌지시 토니 블레어가 추구했던 제3의 길의 사실상 실패를 은유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문장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고다드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의 매력 보다는 문장의 매력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다드가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하여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모든 것을 한 문장에 응축시켜 놓듯이 문장의 매력을 알리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는 보시다시피이다. 호응이든 비난이든 감수할 작정이지만 일단은 로버트 고다드가 이제라도 국내에 소개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좋은 문장이 가진 매력이 작품의 매력마저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지극히 호불호가 갈릴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는 문장이 마침 소설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나 역시 올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을 끝내려 한다.

 

 

 

 

 

 때때로 나는 통제력을 내려 놓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때 최고의 연기가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연기를 평가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그게 현실이다.(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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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3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제임스 설터 어젯밤,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체로 걸러내는듯한 -- 담백한 맛>이란 님의 말에 그만 꽂혔지 뭡니까.
꼭 읽어서 제 것화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친절한 리뷰 고맙습니다.^^*

ICE-9 2013-02-05 22:40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 좋은 말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제임스 설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팜므느와르님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Shining 2013-01-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가 아니라 문장이 좋은 미스터리, 라니. 이런, 읽지 않을수가 없잖아요ㅠ 전 최근에 로렌스 블록의 글을 좋게 읽었어요. 마초적이고 그렇게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들인데. 묘하게도 어떤 애절함이나 냉담함, 진실함 같은 것이 뒤엉켜서 이상한 감칠맛이 나더라구요(웃음). 아, 블러디 머더.. 추천받은 적 있는데 잊고 있었네요ㅠ 이번 기회에 읽어보겠습니다+_+

ICE-9 2013-02-05 22:44   좋아요 0 | URL
로렌스 블록, 저 역시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었을 때의 감흥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어요. 와! SHINING님과 같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니(더구나 메튜 스커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의 하나인데^ ^) 어쩐지 더욱 SHINING과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 '블러디 머더'도 정말 좋더군요. 미스터리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모범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

희선 2013-02-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은 미스터리군요 어떤지 보고 싶군요
저는 지금까지 이쪽 이야기 보면서 글이 안 좋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읽은 게 얼마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저한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런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겠죠

그런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경험이 많아야 할 텐데
별로 없어서 말이죠


희선

ICE-9 2013-02-05 22:49   좋아요 0 | URL
미스터리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대중 친화적이 되어야 하는 이상, 나올 수 있는 문장의 패턴들이 그리 다양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요. 아마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 작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 제약이 있고 또 그만큼 고민을 하게 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좋은 문장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다드를 꼭 좀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 희선님도 마음에 들어하시면 좋겠어요^ ^ 그리고 뭐든 경험이 필요한 법이죠. 양질전환이라는 말도 있듯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감식안 같은 것이 생길거에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경험이 많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