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범생이’들에게는 ‘범생이 콤플렉스’가 있다. 나도 남들처럼 ‘멋진 유소년기의 신화’ 또는 ‘나는 이렇게 삐딱한 사고뭉치였어. 그래서 세상을 뒤흔들게 될거야’라는 이야기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왜 이렇게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만 할까?]


박창식 기자가 쓴 <쿨하게 출세하기>의 한 대목이다. ‘범생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낸, 그리고 ‘범생이’들이 모인 소굴에서 대학을 다닌 나는 기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난 고교 때까지 특별히 ‘개겼다’고 할만한 사건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성적이 떨어진 걸 비관해서 샴페인 한두잔을 마신 게 내 음주의 전부였고,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본 적도, 패싸움 같은 데 관여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을 내 동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과거를 치장하기 바빴다.

-수업시간에 담을 넘었다; 어쩌다 한번 넘었겠지.

-음주를 상습적으로 했다; 두세번 먹은 걸 그리 표현한 게 아닐까.

-수업 시간에 딴짓만 했다; 음, 이건 머리가 좋다는 얘기로 들린다.


아무리 치장해도 그들의 무용담은 좀 약한 감이 있다. <조용한 가족>의 감독인 김지운의 무용담이다.

“친구들과 여관에 들어앉아 고스톱을 쳤어요. 그러다 밤을 샜고, 아침 8시부턴 교복 입고 계속 쳤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 ‘무용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범생이’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는 건 그리 맘 편한 일은 아니다. 몇 명은 노는 애들이 있어야 상대적으로 안심을 할텐데, 얘네들은 맨날 도서관에 쳐박혀 공부만 하고, 그러면서 내숭만 떤다. 수업을 들을 때는 “하나도 못알아듣겠다”고 하고, 시험 전에는 “공부 하나도 안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망쳤다”고 죽상이다. “잘릴 것 같다”느니 “난 이제 끝이다”며 난리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 20개쯤 틀린 내가 위로를 했겠는가. 하지만 막상 성적이 나오면 그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이상하다... 내가 왜 2개나 틀렸지?”

성적순으로 배열된 점수표의 밑바닥에서 내 이름을 찾곤 하던 내게 그들은 충고한다.

“야, 너도 공부 좀 해!”

하나도 못알아듣겠다는 애부터 망쳤다, 잘릴 것 같다고 했던 이와 내게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얘가 모두 같은 애라니 놀랍지 않는가? 내 아래학년 얘기지만, 학사경고를 받을 거라고 늘어지게 걱정을 하던 한 친구는 나중에 알고보니 전과목이 A+였단다.


속이고 또 속이는 생활, 이게 바로 범생이들과의 학창 생활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낭만이 있고, 친구들과의 우정이 싹튼다. 그들은 지금, 내 좋은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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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10-2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안했다면서..질문하면 다 알려주는 녀석들;
"그건 말이지~어쩌고 저쩌고..."
"야 너 뭐냐;"


sweetmagic 2004-10-28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딱한 사고뭉치가 ‘멋진 유소년기의 신화’ 라니.... 거참.....
전 범생이가 삐딱선 보다 좋습니다. 놀아라 놀아보지 놀아보는게 어때 하고 골려주면 제대로 객기부려 제대로 망가지거든요. ㅎㅎㅎ ...물귀신 매직.

진/우맘 2004-10-28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지대로 찍었습니다.
세태가 반영된 거 아니겠습니까? 옛날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달리기는 못했는데, 요즘은 공부 잘하는 애가 얼굴도 이쁘고 달리기도 일등인데다가 노래까지 잘 하니....
뭔가 좀 '놀아 본' 아우라 없이는 멋진 사람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려...^^

비로그인 2004-10-2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못 노는 제가 사람 대접 못 받는 게 당연하군요...큭... 전 MT 같은걸 젤 싫어했고(집단으로 노는 거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어서-_-), 술도 대학 와서 학생회 선배들에게 배웠고(술 엄청 쎈 사회대 선배들에게 배웠는지라, 1학년 때 한동안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살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진 노래방도 혐오했고(컴컴하고 콱 막힌 공간, 음침하고 퇴폐적이지 않나요? -_-) 노래방과 같은 이유로 극장도 못 들어갔고;;;

암튼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전 잘 노는 사람들이 무지 부럽답니다. ;;;

하얀마녀 2004-10-2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대배치 받고 나면 고참들이 입대하기 전에 뭐했냐고 이것 저것 물어봅니다. 대부분 고참들이 '넌 도대체 뭐했냐? 공부한 것도 아니고 논 것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쩝...

sooninara 2004-10-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도 못하고..범생이도 못되고..놀기에도 딸리고..난 왜 살까요???

sweetmagic 2004-10-2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님 저랑 같이 범생이 찌르미나 해요....ㅎㅎㅎ

sooninara 2004-10-2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르미라..어딜 찌르나요? 혹시 떵침?

LAYLA 2004-10-2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마태우스님 친구들은 정말 표준 범생이네요. 범생이라는게 벗어버리고 싶어도 벗을수 없는,,,,,ㅠ (저도 범생이입니다..공부는 아니고 하하하 정말 찐하게 놀아본 무용담이 없거든요.:-) )

sweetmagic 2004-10-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올자~~~ 노올자~~~~ 공부 밖에 할줄 모르는 친구 꼬드겨 놀기 ! 일밖에 모르는 친구 꼬드겨 놀기 ~!!! 그래도 안 놀아 줌 똥침하고 도망가요~~ ㅎㅎㅎ

미완성 2004-10-2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억, 마태님은 덩말 마음도 좋으시죠.
그러고도 절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니..! 속좁은 저는 몇번쯤 삐쳤을텐데 말입니다.
에휴..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소심한 인생인지라 저 역시도 제대로 놀아본 기억이 없어서 슬프네요. 아아, 범생이도 아니고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고 그저 이쁘기만한 저는 어떡하죠? *.*

조선인 2004-10-2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왜 2개나 틀렸지... 정말 얄미운 대사네요. ㅎㅎㅎ

panda78 2004-10-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놀아 본 사람이 잘 노는 것 같아 요즘엔 잘 노는 사람이 쫌 부럽습니다. ;;;

연우주 2004-10-2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 조용히 보낸 게 아쉬워서 대학 때 좀 많이 놀았는데요. -건전하게..--; 놀다보니 노는 것도 지겨워서 이제 다시 방콕 모드랍니다.

플라시보 2004-10-2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고뭉치도 범생이도 아닌 심심하고 지루하기만 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수업을 꼬박꼬박 들었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기에 성적은 개판. 공부를 안했으면 어디가서 신나게 퍼 놀기라도 해야하는데 집구석에서 자빠져 자기만 했으므로 쟤는 왜 놀지도 않는데 공부도 못하나. 혹은 쟤는 왜 공부도 안하면서 집과 학교만 오가는 착실한 생활을 할까? 하는 의문의 중심점에 있었더랬습니다. 화끈하게 놀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했는데...(저는 님보다 더 심해서 등수 내려갔다고 샴페인을 마셔보는 정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꼴찌를 해도. 어..그렇구나 하고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잤지요. 그야말로 술은 대학생이 되고 처음 먹어 봤습니다. 흐흐)

비로그인 2004-10-28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생이들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지요 ^^

저처럼 말예요.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무척 범생이였던걸로 기억되는데 -_-; 지금은 어째...

노부후사 2004-10-2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입 시험 전날 열나게 고스톱쳤는뎅... ㅋㄱ

니르바나 2004-10-2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알라딘은 범생이판 같네요.
이 나라가 잘 굴러가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groove 2004-10-29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찐한 무용담이 많습니다. 나중에 차차 들려드릴께요 ㅋ

마태우스 2004-10-30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루브님/싫어요. 당장 들려주세요!
니르바나님/알라딘에 범생이가 많지만, 모두 서재질만 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잘 굴러가는데는 도움이 안된다는 게 제 생각입다
에피메테우스님/그날 따셨나요.....^^
고양이님/님의 미모가 님을 범생이로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플라시보님/하지만 님은 지금 어떤 범생이보다 더 멋지십니다.
우주님/우주님이 방콕하신다니 너무 슬퍼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판다님/전 미술 잘 아는 사람이 부럽던데......
조선인님/한대 쥐어박고 싶은 대사죠^^
사과님/님의 무용담을 읽다보니 "사과님도 한때 놀았구나" 싶었는데, 아닌가요?? 하여간...미모란 건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 법이니까 너무 속단하지 마시길^^
매직님/아, 님의 발랄함은 댓글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는군요. 매직님이 안계셨다면 제가 이렇게 서재질을 할 수 있었을까 싶군요
라일라님/인생은 길고, 놀 시간은 많습니다. 저 보세요. 대학 때부터 계속 놀고 있잖아요^^
수니친구/저랑 놀아요!!!
마녀님/군대에서는 뭔가 짜릿하고 자극적인 무용담이 필요한 법이지요. 워낙 심심한 곳이니깐요...
여대생님/그 대신 님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양의 책을 읽었지 않습니까. 그게 가장 남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대학에 다시 간다면 책만 읽을텐데..
진우맘님/소주 다섯병의 신화를 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