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스토리콜렉터 79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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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떠나는 게 좋아. 그리고 집 뒤로 펼쳐진 사사 숲에는 절대로 가면 안 돼!

 

다른 시리즈를 읽지 않아서 캐릭터들이 어떤 느낌인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유마’는 애틋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비해 감이 좋고 논리적이다. 아이답게 철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특하다기보다는 가여운 마음이 먼저 든다. 하지만 그런 내 느낌과는 별개로 유마 캐릭터는 내가 내민 손이 민망할 정도로 적어도 나보다 몇 배는 강한 캐릭터이다.

 

폐소공포증이 있어 동굴탐험은 꿈도 꾸지 않는 나로서는 유마가 나무 굴속에서 벌이는 추격전 장면에서 숨 가쁨과 폐소공포증이 숨 가쁜 느낌이 생생할 정도로 들려왔다. 독자로서의 내가 그 폐쇄된 공간에서 공포에 질려 있는 와중에 주인공은 성장하고 변화하여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결말로 나아간다.

 

항상 묘하게 으스스했다. 휑뎅그렁해서 어쩐지 오싹했다...... 우리 가족 외에 또 누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부터 귀신은 무섭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건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도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본인도 스스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복잡한 심리와 계산이 낳은 공포가 한 밤의 어둠보다 깊다. 이 소설도 얼핏 집이라는 ‘공간’이 사건의 배경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집보다는 집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고 주인공 유마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변칙적인 요소들로 작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영향들을 모두 그러모아 유마는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게 되는데, 문화의 탓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구성인지 주로 남성 캐릭터들에만 집중되고 여성캐릭터들의 존재는 배경 처리인 듯 수동적이다.

 

아버지가 쓰고 싶었던 건 순문학이었다. 지금도 순문학이 무엇인지 유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컨대 관능소설은 여기 포함되지 않을 터였다.

 

첫 번째 남성캐릭터인 친아버지 세토 마사오. 추구했던 순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의문사로 사망한다. 관능소설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만은 담당했으나 실패한 인생에 가깝다. 유마에게는 창의적인 직업을 가졌던 아버지로서 동경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소설을 써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훌륭한 직업이라 할 수 있지. 반대로 그러지 못하면 아무리 창조적인 일이라 해도 직업이라 할 수 없어.

 

두 번째 새아버지 세토 도모히데. 무역회사 중역으로 성공한 인물의 예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며 유마의 친부를 폄하하고 유마와 어머니 관계를 악화시키는 역할이다. ‘혈육, 친자식’에 애정과 집착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 성격으로 유마를 진심으로 가족으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며 장기 출장에 임신한 아내만을 데려가는 경악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잘된 일 아니냐. 발음은 똑같지만, 우리 성씨에는 ‘처세’라는 뜻도 있거든. 너도 장차 처세에 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세 번째 삼촌 세토 도모노리. 실질적 관계를 맺지 못한 두 사람의 아버지들과 달리 유마가 적극적으로 따르는 남성 어른이다. 하지만 허세가 가득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서 사기꾼의 기질도 많은 듯하다. 의부와 친형제이지만 소위 말하는 인생에서 실패한 형편이고 의외로 유마는 그의 실패한 처세에서 배워서 성공하게 되니 어쩌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랄 수 있다.

 

미처 읽지 않은 작가의 전작들에는 악령에 씌어 꼭두각시가 된 심성이 나약한 인간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마가]를 읽고 나면 그 소설들은 전혀 무섭지 않을 듯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귀신에게 이용당하기는커녕 귀신을 악용하는 짓들을 자행하는 귀신보다 섬뜩하고 잔인한 인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인간은 욕심이 많고 혹은 욕심이 많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짜증스럽게도 나쁜 머리가 발달했지만 다행이 끝까지 완벽하진 못하고 실수를 해서 범죄를 들키게 된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하니 소설이라지만 참……. 가독성이 좋아서 별 불만이 없었는데 마지막 반전 “헉!” 덕분에 손발이 시리고 뒷목이 서늘하다. 독특하고 흥미롭고 지루할 틈 없는 소설이다.

 

여기는 유마가 알고 있는, 이른바 자연의 숲이 아니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완전한 자연 상태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렬한 원시성이 느껴졌다. 인간의 존재 따윈 애초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로 가득했다. 유마가 아는 숲과는 명백히 다른 공간이었다. 이계, 다시 말해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성급하게 발을 들이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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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쉽고 그럴싸한 요리책 - 파워블로거 벨루가가 알려주는 간단하고 맛있는 레시피
최해정 지음 / 미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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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법이나 요리법을 열심히 찾아본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는 지라 상대평가는 어렵지만, 이 책의 엄청난 분량의 요리법들에 한번 놀라고, 많은 요리법이 어쨌든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로 쉽다니!’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뚝딱! 뚝딱! 요리가 완성되어 차려지는 속도가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것만은 명백하다. 경력이 오래된 파워 주부님들에게는 감히 한 말씀도 올릴 수 없지만 특히 집 안에 퍼지거나 머무는 음식 냄새 양념 냄새에 인내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로서는, 그런 점들도 고려한 간단 깔끔 뚝딱 조리법들이 가장 반가웠다. 더 큰 장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색과 모양이 내공이 깊은 요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직 몇 개 따라 해보지 못했지만, <꽁치 무조림>이란 명칭을 보시라! 담음새도 요리 실력만큼 좋으신 듯 내공 가득 뚝배기에 담겨 있다. 생선 손질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일이 아니면 엄두가 안 나는 처지라 통조림을 활용한 생선요리라면 1차 안심! 그리고 가을 겨울 무가 한창 맛있는 지금 절대 지나칠 수 없는 메뉴이다. 코다리 무조림을 먹어도 무조림만 먹는 나로서는 귀한 생선 요리이자 반가운 메뉴이다. 벨루가님이 만드신 것을 시식해보지 못해 맛을 제대로 따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충분히 맛있었으니 1차로서는 성공!^^ 실패 없는 기본 조리법을 바탕으로 해서 양념을 아주 조금씩 달리하면 독자 개인의 입맛을 찾아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두번째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들기름 느타리 가지찜>. 들기름 소비량이 끝없이 늘어나는 내 입맛이 슬슬 심각하게 걱정되는 시점이긴 하지만, 역시 늦가을 반찬 메뉴로 참 좋을 듯하다. 가지는 여름 내내 너무 많이 먹어서, 버섯 3종과 약간 분량씩의 색색 채소들을 채 썰어 곁들였더니 버섯의 졸깃하고 들기름의 부드러우면서도 향긋한 조화가 채수의 향과 더불어 정말 좋다. 화력 조절과 요리 시간만 잘 지키면 정말 맛있는 일품 요리를 완성시킬 수 있다. 대단하신 벨루가님!

 

그리고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흐리고 젖은 일요일, 메뉴 중에 궁금증을 자아내던 <모듬찌개(모둠인지 모듬인지 확실히 모르겠어서, 벨루가님과 출판사가 ‘모듬’이라 기록하셨으니 따라 표현합니다)>를 시도해보았다. 그 결과! 이럴 수가……. 지난 주 친구가 꼭 먹고 싶다고 해서 음식 맛 깔끔하기로 유명한(종목 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심지어 건강식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한다.) 송탄부대찌개 전문점에서 먹은 부대찌개 전골과 충격적으로 유사한 맛이 났다.

 


음……. 그래서 건강식?! 아무튼 앞으로도 이 명칭만은 오래도록 사랑하고 애착을 유지할 듯하다. <모듬찌개> 이 얼마나 영리한 명명인가. 이 흥분을 잊지 않는다면 재료들을 달리한 모듬찌개 시리즈가 얼마나 갈 수 있나 기록해보고도 싶다. ^^

 

 

뜻밖에 선물을 주신 벨루가님의 요리책 출간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함께 보내 주신 우드스푼……. 너무나 예술적인 공예 기술을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어 장식으로 모셔둘 듯합니다.

추후에 시도해본 요리 중 재미난 일, 감동 받은 일 뭔가 나눌 얘깃거리가 있으면 다시 올려 보겠습니다.

앞으로의 더 많은 승승장구를 늘 응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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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똥
유은실 지음, 박세영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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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 작가가 목도한 한 장면이 작가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새롭게 쓰게 했다. 「강아지똥」을 읽어 주던 부모가 아이에게 “똥도 이렇게 쓸모가 있는데 너는 공부를 못하니 똥보다 못하다.”라고 말했던 것. 작가는 ‘똥도 쓸모 있다.’라는 50년 전 가장 진보적인 메시지가 어른의 입맛에 맞춰 변질되어 이 시대 어린이들에게는 ‘쓸모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라는 메시지로 전해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그리고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자 하는 「강아지똥」의 참뜻을 더욱 잘 전하고자 『송아지똥』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성찰이 권정생 선생의 문학 정신을 직접적으로 계승한다.”

 

이토록 차분하고 다정한 이야기.

 

이야기의 힘을 맹신하는 나로서도, 이런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나면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하고 안정이 되는 효과를 바로 누리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유은실님의 그림은 바라볼수록 도저히 평면 그림 캐릭터일 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생동감과 생명력과 섬세함과 그리운 손길이 느껴진다. 한 장 한 장 감동적인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오래 전 권정생님의 [강아지똥]... 벌써 50여 년이 지났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하긴 우리 집에서도 3대째 각자의 추억이 있으니 그 세월이 맞긴 하다. 오랜만에 [강아지똥]을 읽고 깔깔거리던 꼬맹이들 기억도 다시 나고 [송아지똥]을 읽고 이번에 다 같이 첫 장부터 막 웃었던 기억이 보태져서 기쁘다.

 

예전엔 묶어서 생각을 정리해보진 못했는데, 이제 보니 [강아지똥]과 [송아지똥] 이야기는 모두 태어나고 살다 죽은 그 평생의 과정을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길어야 한 계절을 사는 송아지똥이 그 짧은 시간을 어떻게 멋지게 살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보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어려운 일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겨내기도 하고. 꼭! 반드시! 대의를 위해 희생을 하거나 훌륭한 일을 성취하지 않고도 서로가 존재만으로 귀하다는 생각을 품어주는 이야기. <태어난 모든 것은 귀하다>

 

리듬감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길어야 한 계절을 살 수 있다는 걸.

내가 태어난 세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 짧은 똥생을 생각했다. 짧은 만큼 멋지게 살고 싶었다.

두 권을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죽고 난 후 남는 것은 귀하게 쓰일 것인지 쓰레기 더미일지... 생각이 길게 이어진다. 비 오는 일요일, 꼬맹이들과 한 자리에 모여 오늘까지의 우리들 ‘인생’에 대한 생각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

 

다음은 우리 집 꼬맹이들과 내가 한 장면씩 뽑은 인상적인 내용이다. 단지 인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찬찬히 다시 읽을수록 무척 슬프고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송아지가 잡힌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도.

마음이 아팠다.

“잡혀가는 건 슬퍼.”

“똥또로롱, 그래도 도망쳐 봤잖아. 도망쳤으니까 잡힐 수도 있는 거야.”

리듬감이 말했다. 듣고 나니 위로가 되었다.

나를 낳아 준 송아지가 한 번은 도망쳐 본 거니까.

  

“...... 이 세상에서는 모두 서로 도와줘?

“음...... 모두 그러지는 않아.”

“그럼, 그냥 가만히 있어?”

“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짓도 해.”

“그게 뭔데?”

“괴롭히는 거.”

 

<감나무가 존댓말을 거절하는 인상적인 장면> 존댓말은 나이가 어떻든 서로 존중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이상한 아이’나 ‘이상한 반려동물’이란 없고 실체는 ‘이상한 부모’나 ‘이상한 반려인간’만 있을 뿐이듯이, 존댓말과 반말에 대한 숙고는 이 책을 읽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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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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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32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35

 

페이지 수에 연연하고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은 아니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무게감과 그에 비례하는 기대감은 기분 좋게 묵직하다. 노벨상에 수상 작가에 대한 기대감도 더해져서 장대한 서사의 이야기가 장쾌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116편의 단편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큰 이야기로 완성된 책이었다. 물론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과 인물들과 사건들이었는데, 시간적 배경도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데, 그 모든 다채로운 시공간들에서 다채로운 사건들이 다른 생각을 더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몰입하게 만들고 저항 없이 전개를 순순히 따라가게 한다.

 

그러다보니 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 된다. 어쩌면 등장인물들과 시공간들이 여행지들이고 작가가 독자들을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하는 장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사는 일이 지속적인 이동이고 시공간을 차지하고 떠나는 일이고 다른 이들의 시공간과 교차하는 일이고 운이 좋으면 시공간이 확장되기도 하는 것이고 보면, 살아가고 살아온 일 전체가 ‘방랑’이자 ‘여행’이라 할 법하다는 늦은 깨달음이 들었다.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19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은 문명화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 82

 

그녀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내게 설파했다. 그녀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는 정착민들은 순환적 시간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길 원하는데,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며, 배아 상태로 쪼그라들어서 성장과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82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 여행지로 들어가는 여정이지만, 그곳의 시공간은 또한 다른 누군가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내 일상의 떠나 다른 이들의 일상을 엿보고 다른 세상의 단면들을 만나러 자신의 시공간과 일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나’의 여행기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저 넓은 세상에서 멈춤 없이 일어나서 늘 가득한 에피소드들을 내가 그 때 그것에서 경험해보는 것일 뿐이다. 그런 경험은 떠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의 방랑 혹은 여행은 순환을 계속되는 것일지도.

 

여행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욕망입니다. 바로 이 욕망이 인간에게 이동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고 어딘가로 향하려는 성향을 일깨웁니다. 욕망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진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애매해지고 수수께끼 같아집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목적지에 다다르거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118~120

 

무(無)에서 온 사람에게는 모든 이동이 다 귀환인 법이었다. 공허만큼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은 없기에. 136

 

삶이 이동이라면 죽음은 그 이동의 멈춤일 것이다. 심장이 움직이는 동안 열심히 방랑하고 여행하며 풍경과 이야기들을 보는 것, 가능하다면 사고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전환하는 것. 처음에 가졌던 의문과 어리둥절함의 원인이었던 116편이라는 단편들의 구성이 이제와 보니 세상의 경계들과 물리적 이동 시공간들로서 여행지들인 것도 같다. 그래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는 일은 기억도 상상도 기분도 움직이고 사유하는 여행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어느 여행지에서 경계에서 더 오랜 방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물리적 여행과 마찬가지로 몰랐던 새로운 세상의 여러 모습들과 마주하게 되고 마음이 정지하거나 이동하기도 한다. 사고도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랑해져서 과거에 이해할 수 없다고 버티던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이해하게도 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지인이 내게 말하길 그는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뭔가 새롭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다른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곁에 없으면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과연 진정한 순례자가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251

 

고대의 순례자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장소를 목적지로 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성함을 체험하고 정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지가 아니라 죄 많은 장소를 여행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사막이나 황무지를 여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활기 넘치고 생산적인 장소를 여행한다면요? 264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280

 

다시 한 번 새삼 경계를 수없이 뛰어 넘겨주는 이런 한 권의 책을 만나 경외심이 든다. 매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창작이란.

 

자꾸만 평온과 무탈과 안전한 일상에 심신이 더 의존하게 되는 상황에서 가끔은 머리를 곧게 들고 책이든 물리적 시공간이든 자주 방랑하는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391~392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미소에는 일종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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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sis 2019-11-3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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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log.kyobobook.co.kr/kiyukk/1975267
http://www.bnl.co.kr/blog.do?b=4608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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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수
이현 지음, 김소희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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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꼬맹이들과 나는 이형 작가님의 열렬한 팬이라서 고대하던 [푸른 사자 와니니 2]편을 행복하게 읽고 언제 다시 신간 소식을 들으려나 풀이 죽어 있다가, 뜻밖에! 빠른 출간 소식과 그 내용이 초능력 남매에 대한 것이란 소개 글을 보고 전체 내용을 모르면서도 다 같이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다.

 

형은이는 왼손으로 물풍선의 멱살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기다란 막대를 잡고 있었다. 막대, 그것도 묵직한 쇠막대였다.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칠해진 쇠막대에 수박 두통은 됨직한 돌덩이가 달려있었다. 상가 뒤편 주차장 입구에 있는 주차 금지 표지판이었다. 남자 어른도 두 손으로 붙잡고 질질 끌어서 옮겨야 할 만큼 무거운 거였다. 그런데 형은이는 그걸 빗자루라도 되는 듯 가볍게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33-34

 

표지 그림을 보고 궁금했던 점이 설명이 된다. 토르 망치도 아닌 것이 사나워 보이는 저건 무얼까 궁금했는데 주차 금지 표지판!ㅎㅎ

 

처음엔 흔하고 익숙한 학교 폭력 일화가 계기인가 했는데, 유튜버인 물풍선이란 패거리 중 한 명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협박하는 내용이 나와서 갑자기 마음이 너무 무겁고 섬뜩했다. 불과 며칠 전 폭력적인 사적 관계로 인한 고통에 더해 온갖 인터넷상의 악플과 위협과 가해로 우울증을 겪고 끝내 세상을 버린 이가 떠올랐다. 이야기 전개와 결말과는 상관없이 이런 내용을 이야기 내용으로 웃어넘기지 말고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며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체적으로 엄청 재밌는 장편 소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전혀 유치한 내용이 없어 즐겁게 몰입하여 읽어 나갔다. 생생할 만큼 충분히 현실적이면서도 신날만큼 충분히 환상적이다. 권선징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영웅적인 인물이나 초능력자인 주인공이 능력을 발휘해서 악을 처단하는 내용 전개는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소재로서는 뻔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모든 약점들을 모은 이야기들을 이토록 재미있게 감칠맛 나게 버무려서 재밌고 통쾌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이 탁월한 작가의 탁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색다른 점은 마블과 DC의 배경이 아닌 사랑스럽고 귀여운 대한민국의 생활 밀착형 동네 어린이 영웅 캐릭터라는 것이다. 그에 더해 설화나 전래동화의 모티브를 활용한 점도 독특하고 반가운 일이다. 솔직하게 나는 전래동화를 정말 싫어했지만 말이다. 목욕하는 걸 훔쳐보고 옷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어린 자매가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가 재혼만 하면 아이가 학대당하고, 호랑이한테 엄마는 잡아먹히고 아이들은 도망가고 어린 시절 읽을 때마다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무시무시했다. 어쨌든 내 경험과는 별개로 전래동화들 중 엄청나게 힘이 센 오누이 이야기가 [전설의 고수]의 남매 스토리에 동기부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이야기 속 오누이 이야기는 대개 슬프게 끝납니다. 이들은 엄청난 초능력을 가졌지만 악당을 물리치지도, 영웅이 되지도 못합니다. 어른들로 인해 오누이는 무리한 내기를 하던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곤 했지요. 292

 

그렇다면 [전설의 고수]의 남매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다 읽기까지 나도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더구나 깔깔거리며 즐기기 좋은 전생과 환생이야기! 뭐랄까, 새삼스럽게 히어로물은 이런저런 중층적 문화 구조를 가진 한국형이 이야기꺼리가 젤 수다스럽고 재밌다는 새로운 발견이랄까, 싶은 감상이 들었다. 이현 작가님의 비범한 능력으로 이 모든 수다스러운 문화적 배경들이 자연스럽게!(놀랍게도ㅎㅎ) 이어지고 어우러져서 빈틈없이 탄탄한 구성을 만든다. 초반에 이 이야기 어디로 가나~ 싶은 우려가 살짝 들기도 했는데 기우였다. 초반에 충실히 깔아 주신 복선들이 깔끔하게 모두 잘 설명되면서 마무리되는 통쾌함! 어른들 마리 숙이게 하는 아이들의 엄청 귀엽고도 치밀한 추리 능력!

 

한편으로는 그러한 캐릭터 설정이 누구보다도 심각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씁쓸할 만큼 잘 반영하게 되는 장치가 된다. 학교 폭력, 미세먼지, 유튜브 및 SNS 남용 혹은 부작용, 몰래카메라, 아동 유괴. 끊임없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근절되지 않는 문제. 그래서인지 동화 속에서라도 불의를 응징하는 모습에서 현실에선 쉽지 않은 후련한 기분이 잠시 들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 제대로 된 예방과 처벌과 지원이 이루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끝까지 함께 응원하고 개선해야할 것이다. 더 이상 히어로나 영웅이 필요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현실 사회를 지향하도록!


마지막으로 분량이 넉넉한 장편이라 하마터면 우리 집 작은 꼬맹이는 즐겁게 완독하기 힘들 뻔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표정이 풍부하고 색채가 정감 있고 장면 묘사를 잘 보충해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되어 감사하고 더 재미있었다. 동화책을 읽었는데 만화책을 읽은 것도 같은 신나는 기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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