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유발자들 - 인간 심리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소셜미디어의 뒷이야기
맥스 피셔 지음, 김정아 옮김 / 제이펍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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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면 저커버그를 위시한 실리콘밸리의 개객끼들,,, 하는 감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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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연에서 진행 중인 하루키 강의 덕에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근 20년만에 다시 읽었다. (최근에 김난주씨 개정판이 다시 나왔는데 역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색하다. 작품에서는 세계의 끝에 대비해서 원더랜드가 현실 역할을 하지만, 독자에게는 원더랜드 역시 판타지이기 때문에 김진욱판의 ~. ~. 로 끝나는 다소 연극적인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 김난주 판은 ~.~. 같은 구어체를 쓰는데 오히려 멋이 없는 것 같다. 박사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경어체가 헷갈리게 쓰였는데... 초벌번역인가?.. )

 

20년전에 읽을 때는 소설의 거울구조부터 야미쿠로라는 존재까지(한동안 지하철 탈 때 저기 너머에 야미쿠로가 있어 하고 느낌이 남달랐다. 스크린도어가 생기기 전 일이다) 기발한 재기가 넘치는 인디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아이디어에 닳은 지금 독자가 보면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 때는 원더랜드를 창조해 낸 하루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재밌었고, 세계의 끝은 약간 지루했다.(재독할 때는 원더랜드 편만 체리피킹하듯 읽었었다.) 그런데, 최근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하루키가 의외로 불교적 관점에 익숙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집안이 승려 집안이고 아버지는 승려가 될 뻔한 국어교사다. 하루키가 승려집안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유하기는 하지만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 서의 책무가 있다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아니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서 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저 먼 아래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양이를 버리다 중)


 

대안연에서 강의하는 김응교 선생님는 하루키를 무의식을 다루는 작가로 보는데 , <고양이를 버리다> 의 이 대목은 나에게 칼 융식의 무의식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에고와 무아를 떠올리게 한다. ‘나라는 우연한 사실’, ‘빗방울이 에고라면 광활한 대지는 에고를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하루키는 곧 사라질 빗방울을 공허하게 바라보기보다 한없이 애틋한 마음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뭐 이런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의 묘사는 하루키가 이해한 무아와 해탈의 이미지 아닐까? 세계의 끝에서 사람들은 마음과 희노애락을 잃어버리고 평정한 평화상태에 머문다. 여기에는 죽음도 고통도 없지만, 행복도 없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물론 문지기는 제외하고, 아무도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아무도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도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 모두가 만족해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어, 왜라고 생각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건 잘 알아"라고 나는 말했다.

이 도시의 완전함은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성립되는 거야.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각각의 존재를 영원히 늘어진 시간 속으로 끼워 넣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거지. 먼저 그림자라는 자아의 모체를 벗겨 내어, 그것이 죽어 버리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림자가 죽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별문제가 없다구. 그날그날 생기는 사소한 마음의 거품 같은 것을 퍼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퍼낸다구?"

거기에 대해서는 좀 있다가 말하지.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나한테 이 도시에는 싸움도 미움도 욕망도 없다고 했지? 그건 그것대로 좋아.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싸움과 미움과 욕망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반대의 것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지. 그건 기쁨이고, 행복이고, 애정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비애가 있음으로해서 기쁨이 생기는 거야.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그리고, 물론 애정에 대한 것이 있지. 네가 말하는 그 도서관 여자 일만 해도 그래, 너는 물론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 마음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그녀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런 영원한 삶을 너는 원하고 있는 거야? 너 자신도 그런 허깨비가 되고 싶다는 거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도 그 친구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 영원히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야.”

(세계의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 중)

 

여기 등장하는 그림자의 말은 사람들이 불교에 딴지를 걸 때 흔히 하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평정한 삶은 희노애락이 없는,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이나 아모르 파티같은 명제는 불완전하고 유한하지만 생기있고 약동하는 삶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삶에 맞서지 못하는 소심함과 유약함으로 비춰진다. 그림자는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하며 속세적인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일본의 어떤 승려는 절망과 행복이 짝이라는 그림자의 통찰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수행을 하기 위해 태국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흙길을 몇 시간이나 맨발로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도 낙()도 아닌 극히 평상시 감각이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습니다. 가끔 드물게 뾰족한 돌조각 같은 것을 밟았을 때 고()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바삭한 모래땅에 들어갔을 때는 '어쩜 이렇게 아프지 않은 다정한 모래일까라고 작은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걷기가 두세 시간 지났을 무렵부터 길에 흩어져 있는 돌을 밟을 때마다 아픔의 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밟을 때마다 고가 생기고, 그 발을 지면에서 올리면 일순간이나마 '~' 하고 낙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思考)가 만들어낸 사기입니다.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모래땅을 밟아도 낙도 고도 아닌 감각을 느꼈을 뿐일 텐데, 고의 척도가 듬뿍 고여 있은 후의 경우만 '! 행복' 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한 번 한 번, 그때그때 고가 줄어드는 것으로 인해 ''의 환각이 생기는 순간을 명상대상으로 진지하게 계속 관찰하면 '! '이라고 하는 것은 고가 줄었을 때에 느끼는 착각일 뿐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실감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낙이 없어도 고는 존재하지만, 낙이라는 것은 고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그냥 신기루라고나 할까요. 이제부터가 불교의 안목입니다. '어쩜.... 은 신기루니 실은 인간이란 '' 만 느끼고 사는 건가? 일체개고(皆苦)라고 충격적으로 실감하면 낙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압도적으로 얕아집니다. (이치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으니 안돼!)

 

<번뇌 리셋> (코이케 류노스케,불광출판사)

 

 

<바가와드기타 강의>(북튜브)의 저자 김영은 신비주의 강의에서 고통과 짝지워진 행복과 차원이 다른 희열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희열은 욕망의 충족이나 자아가 아니라 명상이나 요가같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의 말은 이런 희열을 이해하지 못한 말 아닐까? 하루키는 불교의 무아와 해탈을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루키는 설혹 불완전한 자아와 삶이라 할지라도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마음이라는 것은 당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건가 보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 때 당시에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이해할 때도 있어. 그러면 대개의 경우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버리지.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거야.“

마음이라는 것이 무척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고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음이란 너무나도 불완전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흔적을 남기지. 그리고 우리들은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거야.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을 더듬듯이 말이지."

그것은 어디에 닿을까요?"

나 자신에게 닿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때로는 어둡다고 할지라도, 어떤 때에는 새처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영원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아코디언의 울림 속에조차, 나는 내 마음을 잠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등장하는 대지와 빗방울의 비유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등장한다.

 

"정말로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그녀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건 아직 몰라"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꼭 할 수 있어. 난 알아. 틀림없이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낼 거야."

"당신은 강물 속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가려내려고 하는 거라구요."

내 말을 들어 봐. 마음이라는 것은 빗방울과는 달라. 그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과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만약 당신이 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나를 믿어 줘. 나는 반드시 당신의 마음을 찾아낼 거야.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고, 또 모든 것이 다 없어. 그리고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어.”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문장처럼 하루키는 자신의 고유한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과 삶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하루키는 삶의 의욕을 꺾지 않는다. 하루키의 이런 태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니체식의 적극적으로 허무를 끌어안는 허무주의같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루키가 독자들을 절망시킬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아무리 무거운 주제로 글을 써도 독자들이 기꺼이 그의 작품을 읽는 이유이다. 그렇게 많이 카프카적 내용을 서술한 뒤, 그는 여기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으로 카프카에 수정을 가한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를 알려 주었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는 아니라고 보충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라는 것은 다시 세계를 세워가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초로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세계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분석 중

 

 

이 도시가 설령 내 눈으로 보았을 때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나는 틀림없이 저 문지기조차도 그리워할 것이다. 그도 역시 이 도시의 단단한 쇠사슬에 엮여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무언가가 강하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고, 사람들은 그저 거기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이다. 나는 이 도시 안의 모든 풍경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 수 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랑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더 나아가 양자오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분석하는데 비슷한 문장은 원더랜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책임이라는 것을 느껴."에서 특히나 계속 살아가야 하는 책임과 운명적인 조건에 저항하는 책임은 지난 30년간 하루키 소설이 단 한순간도 등한시한 적 없는 주제이다. 그는 다양한 소설에서 다양한 수법과 방향으로 이 주제를 탐색해 왔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 과거의 기억에 대한 책임, 명령에 따른 것에 대한 책임, 환상과 꿈에 대한 책임, 나아가 운명과 숙명적 태도에 대한 책임이었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

 

내게는 책임이란 게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사람들과 세계를 내팽개쳐 두고 가버릴 수는 없단 말이야. 네겐 미안하다고 생각해, 정말 잘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고, 너와 헤어지는 건 고통스럽기도 해.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해. 여기는 바로 나 자신의 세계야. 벽은 나 자신을 둘러싼 벽이고, 강물은 내 속을 흐르는 강물이고, 연기는 나 자신을 태우는 연기라구.”

 

뭐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예술이라면 살 맛을 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인용된 <고양이를 버리다>의 문장은 하루키라는 작가의 고갱이 아닐까? 거기에는 에고와 무아, 불완전함과 완전함의 비유와 대립이 느껴진다. 사실 대양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비의 이미지는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익숙한 것이다. 결국 하루키는 세계의 끝은 욕망이 사라진 종교적 해탈의 이미지로, 원더랜드는 세속적인 삶으로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에고와 삶을 고양하고 싶었던 걸까? 이건 순전히 나의 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하루키의 무아와 해탈에 대한 거친 해석이다. 아닐 수도 있다. 뭐 누구든 자신에 대한 애착이 있고, 삶의 역동성을 원하니까. 득도도 하지 못한 내가 하루키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여러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박사는 세계의 끝에는 주인공이 상실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설정은 여러 맥락을 고려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샤프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은 애초에 왜 세계의 끝을 의식의 핵으로 가지고 있었던 걸까? 세계의 끝이 주인공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건 환영일 텐데 주인공은 그 세계에 왜 책임감을 느끼는 걸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는 또 다른 변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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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는 유튜브의 추천 영상 배지가 "이들을 그런 여정으로 인도"한다고 지적했다. 또 유튜브의 추천 엔진을 "극도로 노골적인 아동 포르노로 가는 입문 약물"이라 불렀다.

엿먹어라 유튜브

 조시 홀리는 청문회에서 우리 기사를 언급하며 "이 기사는 역겹습니다. 하지만 더 역겨운 것은 유튜브가 여기에 아무 조처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비난했다.


근까 엿먹으라고...유튜브...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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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 16세기의 격동하는 삶과 죽음, 명예와 수치
조엘 해링톤 지음, 이지안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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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차별을 극복하려 했던 한 사형집행인의 삶을 통해 본 역사 여행.재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묘사한 근세초기는 헨젤과 그레텔과 빨간 모자가 등장하는 듯한, 자력구제가 원칙인 서부개척시대같은 세계다. <사건파일>처럼 프란츠 슈미트가 처리했던 중세의 범죄리스트도 길티 플레져 같은 흥미를 돋군다. 요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은 편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신분과 계급 차별이라는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이 사형집행인은 어떤 포지션을 취했을까? 뭐 지금도 결국 계급사회니까 묘하게 공감이 된다는 자조적 자기비하 . 근데 3만원은 좀 비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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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어느 술집. 친구인 두 남자가 내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내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제이, 오른쪽은 콜린이다. 나와 동일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윤리철학 교수가 된 콜린은 내 몸과 같은 몸이 존재하지 않을 더 나은 사회를 옹호한다. 두 사람은 나를 사이에 두고 이 견해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이건 흔한 일이다. 주장의 내용도,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 내가 잊히는 것도 그렇다.

... 나는 여전히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드디어 콜린이 입을 열었다. “맞아. 근데 그건 뻥이잖아" 맥주잔을 내려다보던 제이가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 부모가 일부러 귀먹은 아이를 출산했다면 감옥에 보내야 해. 법을 만들어서 임신한 여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장애 검사를 받게 하고, 만약 장애가 발견되면 강제로 낙태를 시켜야 해. 그걸 거부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보내거나 벌금을 물리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제이가 말했다. 그는 콜린이 제시한 방안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차분하게 지적하고, 콜린에게 그 맥락에서 '장애'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네가 주장하는 건 우생학으로 회귀하는 거잖아.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

"!” 콜린이 손뼉을 쳤다. "우생학은 좋은 발상이었어. 윤리적으로 진짜 괜찮은 학문인데, 다만 그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거지.”

 

"내가 장애인인 건 알지?"

", 알아" 콜린이 대답했다.

"너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너는 이미 태어났잖아."

"하지만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내가 미리 발견되고 낙태되었을 거란 얘기지?"

". 네 몸은 네 삶을 더 힘들고 불편하게 만들잖아!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거야."

"내 삶의 전부가, 내 삶의 모든 측면이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니?"

"그걸 부정할 수 있어? 여기서 그게 논쟁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

“ ...저항이 힘이라거나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건 다 지어낸 이야기고 순전한 합리화잖아. 너는 네가 손에 쥐고 있는 형편 없는 패를 합리화하고 있는 거잖아."...

...콜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장애인은 아니잖아그랬다. 콜린은 내 몸과 같은 몸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그래도 최악은 면했구나.‘

 

                                                  -이지뷰티(클로이 쿠퍼 존스,한겨레출판사) -

 

 

우생 사상을 이야기할 때는 지금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차별' 문제, 그리고 그보다 앞서 장애인의 출생을 줄이려 하는 우생 사상적인 사고방식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 해야 한다고 봐. 그래서 우생 사상적인 사고방식에 관해 생각해보면... 딱히 내가 연구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우생 사상이 있지 않을까?"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답에 마음이 몹시 술렁거렸다. 그다음 말이 궁금해서 나는 시라토리 씨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가령 평소에 장애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가 태어날 때 조금쯤 장애가 있어도 어떻게든 된다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과연 자신의 아이가 무 뇌증이어도 괜찮다고 할까? 거기까지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우생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야.”

"... 결국 장애에도 서열이 있고, 1단계는 괜찮지만 2단계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네."

"누가 무엇에 대해 얼마나 우생 사상을 갖고 있는지는 연구자가 아니니까 나도 모르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우생 사상이 있을 거야."

", 그런 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시라토리 씨에게도 우생 사상이 있어?"

", 있는 것 같아, 아니, 있었어. 나도 맹학교에 다닐 때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했거든. 예를 들어 전맹인 사람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거침없이 다니거나 생선 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먹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부러워했어. 그리고 그런 걸 못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맹인답지 않은 행동의 뿌리에 있었던 건 '장애가 없는 사람 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이라는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사상이었을지도 몰라."

... ", 그러니까 우생 사상이라니 당치도 않다고, 차별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 내게도 있다고 일단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20대 후반이었던 것 같은데, 전맹인 지인 중에 아무리 연습 해도 마사지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리고 빨래를 잘 널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도 전맹이니까 안 보이면 이렇게 연습해보라고, 그러면 잘할 수도 있다고 조언해주었는데, 그래도 그 사람은 못 했어. 그런데 애초에 '할 수 있다''할 수 없다'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아니잖아. 사실 마사지든 빨래 널기든 잘 못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어. 그게 20대 때였으니까 꽤 늦게 깨달은 거야.“

아아, 이 말이다. 이 말이었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는 '성장은 대단하다.' '편리해지는 것이 진보다.' '일하고 벌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같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이데올로기가 흐르고 있으며,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의 최소 단위는 개인의 '성장'이고, 이른바 '자립'은 일종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나도 어린 딸이 혼자 옷을 갈아입었을 때 박수를 쳤고, 혼자 책을 읽 었을 때 칭찬했다. 해냈구나. 대단해.

물론 성장은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일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 혹은 인간의 '능력'만 높이 평가하고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않는 사회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 며 행복하게도 하지 못한다. 이 사회에는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나 또한 어떤 사정으로든 일하지 못할 날이 언젠가는 거의 확실히 찾아올 것이다.

 

                -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가와구치 아리오, 다다서재) -

 

실제로 좋은 삶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하다. 그 속에 좋은 것들이 있지만 많은 게 빠져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내가 라파엘 전파의 미술을 잘 알지 못하거나 울타리 치는 법을 모른다고 해도 내 삶에는 아무런 타 격이 없다. 나의 삶은 이미 풍성하기 때문이다. 실없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신체장애가 일반적으로 잘 사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이유다. 장애는 우리가 소중한 일을 행할 수 없게 만들므로 어떤 면에서는 유해하다. 그러나 어차피 소중한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 가지 좋은 것들에서 소외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대부분의 장애에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보다 결코 나쁘지 않은, 때로는 더 나은 삶의 가치가 충분히 남아 있다....

  잘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는 너무 많은 다양성과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한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회복력이 좋은가를 보여주 연구들의 철학적 근거이기도 하다. 이런 연구들은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체로 결코 더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입증한다. 이 이야기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면 두 가지를 시작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왜 우리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 둘째, 장애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 ...신체장애가 고용,교육,사회적 기회에 대한 접근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집단권력에 달려 있다. 문제는 신체와 인공환경 사이의 부조화다. 그러나, 환경은 바뀔 수 있다.

 

                                               -라이프 이즈 하드(키어런 세티야,민음사) -

 

ps. 1. 한 가지 의문은 영화 <씨인사이드>의 주인공처럼 전신불수로 수십년을 살다 조력자살을 택하는 사람의 케이스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에도 키어런 세티야의 이야기가 적용될까?


2. <이지뷰티>의 저자는 자신이 장애에 관한 편견에 부딪힐 때마다 도망치던 중립의 방이 자기를 위축시키고 외부로부터 단절시키고 있다는 것을 비욘세콘서트를 관람 후 알게 된다. <눈이 보이지 않는..>의 전맹 시라토리 겐지가 택한 것은 미술관 관람이었다. <이지뷰티>를 읽고 나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게 정말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게, 호의 역시 차별과 편견이 되는 저자의 경험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에서 역시 전맹인 시라토리의 친구는 우리는 절대 남과 같이 될 수 없다며 장애인체험 같은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원하는 건 그냥 다가가서 같이 있는 것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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