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연에서 진행 중인 하루키 강의 덕에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근 20년만에 다시 읽었다. (최근에 김난주씨 개정판이 다시 나왔는데 역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색하다. 작품에서는 세계의 끝에 대비해서 원더랜드가 현실 역할을 하지만, 독자에게는 원더랜드 역시 판타지이기 때문에 김진욱판의 ~. ~. 로 끝나는 다소 연극적인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 김난주 판은 ~.~. 같은 구어체를 쓰는데 오히려 멋이 없는 것 같다. 박사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경어체가 헷갈리게 쓰였는데... 초벌번역인가?.. )

 

20년전에 읽을 때는 소설의 거울구조부터 야미쿠로라는 존재까지(한동안 지하철 탈 때 저기 너머에 야미쿠로가 있어 하고 느낌이 남달랐다. 스크린도어가 생기기 전 일이다) 기발한 재기가 넘치는 인디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아이디어에 닳은 지금 독자가 보면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 때는 원더랜드를 창조해 낸 하루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재밌었고, 세계의 끝은 약간 지루했다.(재독할 때는 원더랜드 편만 체리피킹하듯 읽었었다.) 그런데, 최근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하루키가 의외로 불교적 관점에 익숙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집안이 승려 집안이고 아버지는 승려가 될 뻔한 국어교사다. 하루키가 승려집안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유하기는 하지만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 서의 책무가 있다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아니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서 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저 먼 아래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양이를 버리다 중)


 

대안연에서 강의하는 김응교 선생님는 하루키를 무의식을 다루는 작가로 보는데 , <고양이를 버리다> 의 이 대목은 나에게 칼 융식의 무의식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에고와 무아를 떠올리게 한다. ‘나라는 우연한 사실’, ‘빗방울이 에고라면 광활한 대지는 에고를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하루키는 곧 사라질 빗방울을 공허하게 바라보기보다 한없이 애틋한 마음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뭐 이런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의 묘사는 하루키가 이해한 무아와 해탈의 이미지 아닐까? 세계의 끝에서 사람들은 마음과 희노애락을 잃어버리고 평정한 평화상태에 머문다. 여기에는 죽음도 고통도 없지만, 행복도 없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물론 문지기는 제외하고, 아무도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아무도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도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 모두가 만족해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어, 왜라고 생각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건 잘 알아"라고 나는 말했다.

이 도시의 완전함은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성립되는 거야.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각각의 존재를 영원히 늘어진 시간 속으로 끼워 넣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거지. 먼저 그림자라는 자아의 모체를 벗겨 내어, 그것이 죽어 버리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림자가 죽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별문제가 없다구. 그날그날 생기는 사소한 마음의 거품 같은 것을 퍼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퍼낸다구?"

거기에 대해서는 좀 있다가 말하지.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나한테 이 도시에는 싸움도 미움도 욕망도 없다고 했지? 그건 그것대로 좋아.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싸움과 미움과 욕망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반대의 것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지. 그건 기쁨이고, 행복이고, 애정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비애가 있음으로해서 기쁨이 생기는 거야.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그리고, 물론 애정에 대한 것이 있지. 네가 말하는 그 도서관 여자 일만 해도 그래, 너는 물론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 마음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그녀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런 영원한 삶을 너는 원하고 있는 거야? 너 자신도 그런 허깨비가 되고 싶다는 거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도 그 친구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 영원히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야.”

(세계의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 중)

 

여기 등장하는 그림자의 말은 사람들이 불교에 딴지를 걸 때 흔히 하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평정한 삶은 희노애락이 없는,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이나 아모르 파티같은 명제는 불완전하고 유한하지만 생기있고 약동하는 삶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삶에 맞서지 못하는 소심함과 유약함으로 비춰진다. 그림자는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하며 속세적인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일본의 어떤 승려는 절망과 행복이 짝이라는 그림자의 통찰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수행을 하기 위해 태국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흙길을 몇 시간이나 맨발로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도 낙()도 아닌 극히 평상시 감각이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습니다. 가끔 드물게 뾰족한 돌조각 같은 것을 밟았을 때 고()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바삭한 모래땅에 들어갔을 때는 '어쩜 이렇게 아프지 않은 다정한 모래일까라고 작은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걷기가 두세 시간 지났을 무렵부터 길에 흩어져 있는 돌을 밟을 때마다 아픔의 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밟을 때마다 고가 생기고, 그 발을 지면에서 올리면 일순간이나마 '~' 하고 낙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思考)가 만들어낸 사기입니다.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모래땅을 밟아도 낙도 고도 아닌 감각을 느꼈을 뿐일 텐데, 고의 척도가 듬뿍 고여 있은 후의 경우만 '! 행복' 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한 번 한 번, 그때그때 고가 줄어드는 것으로 인해 ''의 환각이 생기는 순간을 명상대상으로 진지하게 계속 관찰하면 '! '이라고 하는 것은 고가 줄었을 때에 느끼는 착각일 뿐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실감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낙이 없어도 고는 존재하지만, 낙이라는 것은 고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그냥 신기루라고나 할까요. 이제부터가 불교의 안목입니다. '어쩜.... 은 신기루니 실은 인간이란 '' 만 느끼고 사는 건가? 일체개고(皆苦)라고 충격적으로 실감하면 낙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압도적으로 얕아집니다. (이치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으니 안돼!)

 

<번뇌 리셋> (코이케 류노스케,불광출판사)

 

 

<바가와드기타 강의>(북튜브)의 저자 김영은 신비주의 강의에서 고통과 짝지워진 행복과 차원이 다른 희열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희열은 욕망의 충족이나 자아가 아니라 명상이나 요가같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의 말은 이런 희열을 이해하지 못한 말 아닐까? 하루키는 불교의 무아와 해탈을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루키는 설혹 불완전한 자아와 삶이라 할지라도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마음이라는 것은 당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건가 보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 때 당시에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이해할 때도 있어. 그러면 대개의 경우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버리지.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거야.“

마음이라는 것이 무척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고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음이란 너무나도 불완전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흔적을 남기지. 그리고 우리들은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거야.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을 더듬듯이 말이지."

그것은 어디에 닿을까요?"

나 자신에게 닿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때로는 어둡다고 할지라도, 어떤 때에는 새처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영원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아코디언의 울림 속에조차, 나는 내 마음을 잠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등장하는 대지와 빗방울의 비유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등장한다.

 

"정말로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그녀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건 아직 몰라"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꼭 할 수 있어. 난 알아. 틀림없이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낼 거야."

"당신은 강물 속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가려내려고 하는 거라구요."

내 말을 들어 봐. 마음이라는 것은 빗방울과는 달라. 그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과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만약 당신이 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나를 믿어 줘. 나는 반드시 당신의 마음을 찾아낼 거야.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고, 또 모든 것이 다 없어. 그리고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어.”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문장처럼 하루키는 자신의 고유한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과 삶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하루키는 삶의 의욕을 꺾지 않는다. 하루키의 이런 태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니체식의 적극적으로 허무를 끌어안는 허무주의같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루키가 독자들을 절망시킬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아무리 무거운 주제로 글을 써도 독자들이 기꺼이 그의 작품을 읽는 이유이다. 그렇게 많이 카프카적 내용을 서술한 뒤, 그는 여기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으로 카프카에 수정을 가한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를 알려 주었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는 아니라고 보충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라는 것은 다시 세계를 세워가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초로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세계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분석 중

 

 

이 도시가 설령 내 눈으로 보았을 때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나는 틀림없이 저 문지기조차도 그리워할 것이다. 그도 역시 이 도시의 단단한 쇠사슬에 엮여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무언가가 강하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고, 사람들은 그저 거기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이다. 나는 이 도시 안의 모든 풍경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 수 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랑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더 나아가 양자오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분석하는데 비슷한 문장은 원더랜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책임이라는 것을 느껴."에서 특히나 계속 살아가야 하는 책임과 운명적인 조건에 저항하는 책임은 지난 30년간 하루키 소설이 단 한순간도 등한시한 적 없는 주제이다. 그는 다양한 소설에서 다양한 수법과 방향으로 이 주제를 탐색해 왔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 과거의 기억에 대한 책임, 명령에 따른 것에 대한 책임, 환상과 꿈에 대한 책임, 나아가 운명과 숙명적 태도에 대한 책임이었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

 

내게는 책임이란 게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사람들과 세계를 내팽개쳐 두고 가버릴 수는 없단 말이야. 네겐 미안하다고 생각해, 정말 잘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고, 너와 헤어지는 건 고통스럽기도 해.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해. 여기는 바로 나 자신의 세계야. 벽은 나 자신을 둘러싼 벽이고, 강물은 내 속을 흐르는 강물이고, 연기는 나 자신을 태우는 연기라구.”

 

뭐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예술이라면 살 맛을 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인용된 <고양이를 버리다>의 문장은 하루키라는 작가의 고갱이 아닐까? 거기에는 에고와 무아, 불완전함과 완전함의 비유와 대립이 느껴진다. 사실 대양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비의 이미지는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익숙한 것이다. 결국 하루키는 세계의 끝은 욕망이 사라진 종교적 해탈의 이미지로, 원더랜드는 세속적인 삶으로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에고와 삶을 고양하고 싶었던 걸까? 이건 순전히 나의 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하루키의 무아와 해탈에 대한 거친 해석이다. 아닐 수도 있다. 뭐 누구든 자신에 대한 애착이 있고, 삶의 역동성을 원하니까. 득도도 하지 못한 내가 하루키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여러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박사는 세계의 끝에는 주인공이 상실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설정은 여러 맥락을 고려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샤프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은 애초에 왜 세계의 끝을 의식의 핵으로 가지고 있었던 걸까? 세계의 끝이 주인공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건 환영일 텐데 주인공은 그 세계에 왜 책임감을 느끼는 걸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는 또 다른 변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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