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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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일요일 오후였다. 

1시 32분. 

날씨는 조금 흐림.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시간. 

1시 33분이 되기도 전에 잊어버릴 의미 없는 한때였다.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이쪽 편에 두 명, 건너편에 네 명. 일곱 명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27초 후에는 초록불이 켜질 테고, 이쪽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저쪽 사람들은 왼쪽으로 엇갈리듯 도로를 건널 거였다. 

 20초, 5초 후에는 보행 신호의 초록 불이 점멸 신호로 바뀔 테고, 다시 15초 후에는 이쪽 신호에 불이 들어올 거였다. 건너편에 묘한 생물  마리가 어슬렁 거리는  발견한  그때였다. 

 비둘기.

어떤 이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공포로, 어떤 이에게는 놀잇감으로, 어떤 이에게는 먹이.. 흠흠, 흔한 도시의 비둘기  마리였다.

 산만하게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도는 비둘기들. 흔히 보이는 비둘기인데 묘하게 시선이 갔다. 

'먹이라도 찾은 건가?'

 보행 신호가 켜졌다. 차들이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 기다리던 이들은 건너기 시작했다. 

'음?' 

 비둘기 한 마리의 움직임이 변했다. 

길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렇게 보였다. 

 오른쪽에서 앞으로, 앞으로. 종종 거리는 걸음으로 건너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럴 리가?'

길을  건너고도 비둘기에게서 시선을  수가 없었다. 

중앙선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비둘기는 길을 건넜다.   

보행 신호가 꺼졌다.

솔직히 놀랐다. 스쳐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 싶었다. 

그 설마였다. 

'신호를 받아서 길을 건너는 비둘기라니.'

  놀랐다. 

비둘기는 새다. 새는 난다. 새에게는 날개가 있다. 나는  새다.

'모처럼의 날개를 쓸모없게 만들다니.'

또 한 번 놀랐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의외성'이었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멍청함'이었다.

지금 새삼스럽게 놀라워하게   하나  있다.

'신호를 받아서 건너는 비둘기  마리가 뭐라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넋 놓고 쳐다볼 정도로 놀랐던 걸까?'

모를 일이다.


 꾸준히 참여하는 독서 모임이   있다.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독서 모임 전부 같은 책을 읽고 모이는 형태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보통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된다.

 번째는 비슷한 부분, 표현에 공감하고 닮은 생각을 떠올린다는 거다. 

나이도, 성별도, 상황도 저마다이건만 유사성은 언제나 드러난다.

 번째는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는 거다. 같은 작품을 읽었는데 어떻게 그럴  있을까 싶을 만큼 다르다. 

  

 첫 번째와  번째는 모순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나' 유사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있을  없는 일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런 것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오해하고 후회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에 있어서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오직 신만이 '옳고 그름'과 '알고 모름'에서 자유롭다. 신이 모든  알고,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전지전능을 말하려고 하는  아니다. 흔히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이라는 개념이 신에게는 없을 것이기에 자유롭다는 거다.


 <풀베개>는 나쓰메 소세키 장편 소설 가운데서 가장 회화적인 작품이다. 

색채, 정경의 묘사, 인물의 행동. 

날씨와 풍경, 계절까지 눈으로 보듯 그려낼  있을 만큼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득하다. 

묘사만 기가 막혀서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울리게  거다. 

문장마다 섬세한 사유가 차고 넘친다.  놀라운 건, 표현 자체만 두고 봤을  어렵거나 난해한 부분이 거의 없다는 거다. 쓰는 사람도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이도 즐기며 읽을  있는 이야기.

그게 <풀베개>다.


 페이지를 인용한다.

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중략)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가까운 이웃들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옮겨 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일 뿐이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욱 살기 힘들 것이다.
<풀베개> 

소세키가 이야기 속에 그려낸 100년  일본에서도 일본이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한 이들이 있었나 보다. '보통 사람들', '이웃들'이 만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나 보다. 소세키는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가까운 이들, 보통의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모르는 이들, 낯선 사람들이 만든 세상살이는 쉬울  같으냐고.

  

 <풀베개>는 어느 서양화 화공의 이야기다. 일본인 이면서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 

그림을 그리겠다고 화구를 챙겨 메고 산을 넘어왔으면서 실제로는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는 화공. 

붓으로 화폭에 풍경을 담기보다 펜으로 일본의 단가, 하이쿠를 읊는 화공. 

밖에서 보면 태평스럽기만 하고 전혀 화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화공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묘한 분위기와 행동을 거듭하는 나미라는 여성. 

 여성은 화공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자, 시와 그림의 주제가  '재료'다.

어떻게 사람을 '재료'라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대답은 '그럴  있다'다. 


인간,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도구로, 재료로 삼는 건 그릇된 일이다. 하지만 <풀베개>에서 화공이 거듭 강조하는 경지, '비인정(非人情)'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되는 자세다. 

곤란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에서조차  걸음 떨어져 객관화시키는 일.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신의 시선으로 시간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이 '비인정(非人情)'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접했을 가르침이다. '곤란함, 어려움에 함몰되어 당황하기보다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해결책이 보이기 마련이다라는 식의 가르침' 말이다.

간단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들어본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비인정(非人情)이라는 개념을 몰라도 <풀베개>를 읽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다. 

 <풀베개>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과도 결을 달리 한다. 줄거리에 얽매이기보다 작품  문장과 표현, 묘사를 즐기기를 바라며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든  페이지가  편의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면 그걸로  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몰인정한 게 아닙니다. 비인정(非人情)하게 반하는 겁니다. 소설도 비인정으로 읽기 때문에 줄거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겁니다. 이렇게 제비를 뽑는 것처럼 착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풀베개> 

  

소세키 작품에서는 드문 일인데, 작가가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줄거리 같은  아무래도 좋'다.

'제비를 뽑는 것처럼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재미를 즐겨달라. 

이렇게 해주기를 바란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다 보니 <풀베개>를 읽으며 느낀 감상을 구구절절이 적을 수도 없다. 

적을  없지만 이대로 끝내버리면 여기까지 읽은 이를 깜짝 놀라게 하고 말 테니,  곳을  발췌해 적기로 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는 눕든 일어서든 멋대로 하라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풀베개> 


앞서 태평해 보이는 화공의 이야기라고 적었던 걸 정정한다. 
인용한 '현재의 문명'은 100년도 더 된 과거의 '현재'다. 

현재의 '현재'와 다르지 않은 풍경, 과거의 '현재'보다 더 가혹할 현재를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놀라고 만다.

마치 "이것이 문명의 속성이다. 내가 소세키다."라며 무력시위라도 하는 듯하다. 

읽을 가치를 보장한다고,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재밌을 거라고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처음 <마음>을 읽은 날부터  편애하는 작가라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는 말할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 권해도 실패하지 않을 작가라고 믿는   되는 작가  하나 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이야기  무엇이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는 문장을 이끌어 냈는지, 읽은 의미가 있었는지 저마다의 대답을 들려줬으면 한다. 

 대답에 다시 한번 놀랄  있었으면 한다. 

함께 하면 즐거운  속에 같은 작품을 읽고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는 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나란 인간만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게 무엇에든 달관하기가 쉽지 않다. 

달관하기 쉽지 않은 인간이지만 묘하게도 책 이야기만은 달관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달관은 무척 달다.


 비인정(非人情)은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지만 소설이기에 조금은 차분히, 조금  깊이 받아들이고 생각할  있다. 

다른  아닌 이것이야말로 달관이 아닐지.


 좋은 이야기를 나눠주는 이는 언제든 환영이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와 누구의 이야기와 만나게 될지 벌써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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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1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에서 읽었는데, 《풀베개》는 실제로 잘 안쓰는 한자나 옛말 같은 것이 팍팍 들어있는,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도리어 일본인들한테는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헷갈리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