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에 들어서자 평소에는 마냥 잊고 있던 당시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왔는데, 그 기억이 다음 기억을 부르고 또 뒤를 이어 또다른 기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에 반쯤 머물러 있고나머지 반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 P96
자연스럽게 저는 벗 없이 살아가는 일에 적응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더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만나지 않는 일을 더 좋아합니다. 낯선 인연이 제 삶에 들어오지 않는다는사실에 어떤 안온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기도 했습니다. 유배되고 유폐된 마음을뚫고 들어올 인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입니다. 그런순간이 찾아올지, 찾아온다면 언제가 될지 헤아릴 수 없는일이지만, 아마도 온다면 그 인연은 는개처럼 잦을 듯이, 혹은 어둠처럼 고요하게 올 것 같았습니다. - P105
젖은 수건을 이마에 번갈아 올려두며 사람의 몸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소에는 37도나 되는 스스로의 체온을 감지하지 못하고 살다가도, 0.5도 정도 열이 오른 일만으로도 불덩이가 된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으로 어깨를쓸어볼 때, 물을 마실 때, 음식물이 입 안에서 퍼질 때의 감각도 평소와는 다른 것입니다. 각성과 숙면의 경계를 더 세밀하게 나눌 수도 있습니다. 보고 싶은 누군가가 더 보고 싶어지는 것도 이때입니다. 잔병은 감각을 깨우는 방식으로 사람을 오롯이 혼자이게 합니다. - P112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고르는 것은, 곧 그 말을 들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P126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늘 꿈꾸지만 가끔은 부정확한 말하기가 반가울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같은 허물없이친밀한 관계에서의 대화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단한 정보보다는 뭉근한 정서를 주고받는 순간들. - P127
살아오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종종 들었습니다. 내 마음안쪽으로 돌처럼 마구 굴러오던 말들, 저는 이 돌에 자주 발이 걸렸습니다. 넘어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상대가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인지, 그래서 해온 조언인지. 아니면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않는 사람이 면박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인지. 앞의 경우라면상대의 말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또 과한 표현이 있다면 솔직하게 서운함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경우라면 그 말은 너무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자격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으니까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풀잎이나 꽃잎을 마르게 하거나 상처를 낼 수있지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한 그루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것이니까. - P133
사찰에서는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빕니다. 이 기도에는 욕망을 줄여 마음과 몸을 간소하게 살고 싶다는 뜻도 있지만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큰 욕심도 있습니다. - P154
나의 마지막과 그 사람의마지막을 같이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간에서 그 사람의마지막을 보거나 아니면 그가 중간쯤 왔을 때 나의 마지막을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덮어둔다는 것은 어느 낮은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그 위에 무엇이 쌓였다 해도 변함없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일입니다. - P157
환하게 열릴 한 해의 시간들 속에서 어떤 바람을 품어야할까요. 그 바람은 어떻게 현실이 될까요. 그리고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꺼내게 될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음의 바람과 삶의 현실과 인간의 말은 서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멀지 않음의 힘으로 우리는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오래된 저의 바람입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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