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개인적 체험>외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몇 안 되는 존경할만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딱 한번밖에 읽어보지 않은 그의 책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서라거나 그가 단지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문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실은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여서 일수도 있고, 천황의 훈장을 거부한 소신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양심적 문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오에 겐자부로여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 눈을 끌어들인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읽는 인간(요무 닝겐)'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표현이 참으로 간명하고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책벌레’, '간서치', '호모 부커스' 등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여러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말들은 어쩐지 내게 바로 흡수되지 않았다. 나는 책을 갉아먹는 것과 읽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며, '바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덕무 처럼 책에 미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나를 가장 일반화 할 수 있는 학명 앞에 '북(책)'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큼의 허세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게 제대로 흡수되지 않던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마치 그림처럼 내 눈앞에 그려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책벌레도 간서치도 호모 부커스도 아니지만, 그냥 '읽는 인간'일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록을 포함하여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유년시절에 간직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읽는 만큼 성장한 나날들',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문체를 찾아서', '나를 지켜낸 책 읽기'라는 소제목들을 통해서도 그가 책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이른바 '삼부작'에 대한 배경을 풀어놓는다.

 

이 내용들은 모두 준쿠도 서점의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6개월간 한시적으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이라는 일종의 이벤트에서 강연한 내용을 취합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별칭에 맞게 그 서점에서는 저자가 읽었던 책들을 전시해놓고 다른 이들이 저자의 서재 일부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저자는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 몇 권을 강의 주제로 선택하였고, 그 내용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책을 서평으로서가 아니라 독서에 대한 개인의 회고로 맞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대중을 위한 강연이라고 해서 그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전에 대한 내 무지로 인해 몇몇 부분은 읽기 어렵거나 지루한 부분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나왔을 때는 '아, 이제 전형적인 고전 목록이 시작되는가?' 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적어도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다른 책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그러나 명작이 어디 그냥 일부 사람들에게만 명작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도 결국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평범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그가 다른 읽을 책을 다 소실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던 중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한 줄의 대사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부분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직 세상도, 지옥도 알 수 없는 나이에 신뢰를 위해서 기꺼이 두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 한 마디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포 시집>이나 <오든 시집> 같은 책에 영향을 받은 일화가 소개되는데 내가 읽어보지 않은 것이라 그가 자아를 형성하던 시절에 시에 대한 감수성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끌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쉽지는 않았다.

 

치열한 그의 독서기는 '재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본을 보고 원문과 대조하여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하여 그는 전신운동을 하듯 언어의 감각과 생각의 틀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동생에게 '사전을 공부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로 단어와 문장에 깊숙이 천착하였던 모습에서 그가 그야 말로 ‘읽는 인간’임을 확인하였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되짚어본 지난날의 인생과 책의 밀접한 관련성은 그가 문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연결고리, 즉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야 말로 생활 속에서 글의 의미를 자연히 체득하게 되는 방법임은 분명한 것 같다. 렇게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에 유행하는 '고전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책이 삶을 바꾼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을 팔면서 제시하는 목록 또한 따라가며 읽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들의 주장처럼 인생을 바꾸기 위해 또는 삶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그렇지만 독서 또한 무척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누군가를 획일적으로 찬양하는 광분과 배타성이 끔찍하듯이, 공통되고 보편적인 책의 목록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유사한 공감을 느끼며 그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도 어찌보면 끔찍하다. 저 사람의 삶의 목록이 있듯이, 내 삶의 목록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 길고 (다소) 지루한 강연을 통해서 바로 그 점, '인생을 통한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추천사를 쓴 어느 유명인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어수선한 독서에서 어느날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중 너무나도 우연히 한줄기 빛 같은 운명적인 문장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읽는 행위로 어느 정도 채워질 수 있는 삶일 수는 있겠지만, 읽는 대로 살기에, 그래서 읽는 것과 사는 것의 연결을 말하기에는 아직 나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한 줄입니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시작한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해라, 저도 지옥이라는 곳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아이들도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때가 있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겠어. 저는 다짐했습니다. - 21쪽

되돌아보면요, 지금 제게 저만의 언어 감각, 아울러 제대로 된 미의식이 있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은 아름답구나’와 같은 생각들을 포함해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지니는 견해 등 그 모든 것을 명백히 이 네 권의 책(<엘리엇>, <오든 시집>,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을 말한다)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책을 찾는 일, 책과 만나는 일이며, 제가 발견한 책을 집필해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장 처음 책들을 발견했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기틀이 되는 평면을 만듭니다. 그 뒤에는 이 책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죠. ‘이 책이 불러들이는 사람을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사람이 스승으로, 친구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감정도 있구나’, ‘이렇게 훌륭한 생각도 있구나’하고 책을 통해 느끼는 사이에 신기한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 32, 33쪽

책 한 권을 처음 읽을 때, 우리는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한 번 더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탐구’를 노스럽 프라이는 퀘스트(quest)라고 썼습니다)가 됩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되지요. 그것이 rereading, 한 번 더 읽는 까닭입니다. - 38쪽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이 역시 살아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죽은 지식의 집적을 말합니다. 대형 대학 강의실에서 열리는 지루한 개론 강의를 떠올려 주십시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 50쪽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는 프랑스어를 읽거나 영어를 읽으면서 갖춰졌습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도 주로 사전에 의지해 읽어가면서(공부하는 제게 간식을 주러 온 여동생이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지금 얇은 책을 읽는 거야, 아니면 두꺼운 책... 그러니까 사전을 읽는 거야?" 하고요) 제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그러니까 제 언어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메아리쳤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옮겨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새로운 언어와 만나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왕복, 감수성의 왕복, 지적인 것의 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 67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 82쪽

이니욘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사마스라는 남자의 부인인데, 늘 한탄하는 사람, 서글픈 사람입니다. 그 이니욘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I am like an atom...,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 블레이크는 신비로운 시에서도 이런 과학용어를 사용합니다.

A Nothing left in darkness; yet I am an identity: I wish & feel & weep & groan. Ah, terrible! terrible! ...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세계 속의 일개 원자, 외롭다. 나는 그런 존재다). A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암흑 속에서 잊히고 사라진다. 그다음이 엄청나죠, yet I am an identity... 요즘은 아이덴티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요, 나는 ‘하나의 개인으로 실재하는 자신’과 같다. I wish---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바라고, 느낀다(feel) 울고(weep) 그리고 신음한다(groan). 그렇게 새카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두렵고(terrible), 두렵다’라는 시구. - 107, 108쪽

젊었을 때는 슬픔이 격렬합니다. 난폭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슬픔도 온화해지고 고요해진다고, 실제로 마흔 대여섯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 하나가, "아니, 그렇지 않아"라고 편지에 써 보냈죠. "젊은 시절 격렬했던 슬픔은 분명 어느 연령이 되면 고요한 슬픔이 된다, 온화한 슬픔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이번에는 고요해야 할 슬픔이 거꾸로 더 광포하고 격렬한 슬픔이 된다. 그렇게 역전되어 자네에게 돌아올 거다"라고 경고하는 편지였죠. - 120쪽

일본 불교의 지옥과는 다르죠. 불교의 지옥은 거기에 빠진 영혼이라 해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지옥에서 꿈틀거리는 자들에게 거미줄을 내려뜨려주면 죽은 자가 그걸 잡고 올라옵니다. 올라오면 극락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 한번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이 ‘제3의 장소’인 연옥을 발견했죠. ‘제3의 장소’라는 표현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에 대한 타협점으로 생각해낸 것인데, 이건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을 빈정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옥은 민중에게 크게 환영받습니다. 르 고흐는 연옥이 탄생하고 백 년이 조금 지나 단테라는 시적 천재가 나타났고, 그가 훌륭히 이를 묘사해준 것은 행운이었다고 썼습니다. - 138쪽

연옥의 섬 낮은 곳은 연옥의 산에 올라 자신을 깨끗이 할 여행을 떠날 사람들이, 고행에 들어서기 전에 준비 비슷한 걸 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을 오르며 수행을 거듭하는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산 자의 세계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열렬한 기도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달라고 신께 빌면, 거기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는 천국에 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 138, 139쪽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 년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책을 읽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관계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153쪽

여기서 잠깐, 제 ‘인생의 습관’이 된 독서의 기본 원리를 밝혀두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야나기다 구니오라는 민속학자의 책을 읽고 그 뒤로 제가 쭉 해온 방법인데요, ‘배우기, 외우기, 나아가 깨닫기’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우다(まなぶ, 마나부)’라는 단어는 옛말인 ‘흉내 내다(まねぶ, 마네부)’와 어원이 같아요. 선생님 말씀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렇게 습득한 것을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자전거 타는 걸 몸으로 기억하듯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타인에게 배워서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깨닫기’입니다. - 197쪽

저는 이 세 가지 단어의 연결 고리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무슨 책을 읽든지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문학 책을 읽으면서도 특히 시가 어렵다고 느낄 때면, 우선 그걸 외우기로 했습니다. 이토 시즈오의 어려운 시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한 줄 한 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시를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의미를 자력으로 깨닫게 된 것이죠. - 197, 198쪽

제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고 했던 건, 제 소설이 점차 역사와 현실을 등지고, 말하자면 자기류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게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그런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준 책입니다.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것을 계기로, 문학적인 것과 일체 연을 끊을 생각이어서 다른 분야의 책만 읽고 있었는데,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는 풍부하고 폭넓으며 우수한 세계문학 작품의 전망을 통째로 드러내는 책이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푹 빠져온 저로서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저의 문학 서적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 219쪽

저는 일본의 전쟁 전후의 민주주의 체계의 사회에서 보수나 혁신을 떠나서 정치가, 정치 활동가,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훌륭하고 위대할수록 성직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얼굴을 상실한 예를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기에 사이드가 언제나 세속적인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었던 아라파트가 UN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사이드는 그를 도와 헌신적으로 일하는 동지였지만, 오슬로 합의 등을 계기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과정에는(아라파트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지도자가 어느새 현세적인, 세속적인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 224, 225쪽

사이드는 ‘자신이 자연인가 역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비코나이븐 할둔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자기 형성(selfmaking)’이 역사의 기본이라 믿고, 역사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 편에 서겠노라고 말합니다.
"저 자신이 뼛속 깊이 세속적, 현세적인 인간이기에"라고 사이드는 자신이야말로 세속적인 인간(secular person)임을 강조합니다. - 225쪽

사이드는 만년에, 자신이 사라져간다는 생각에는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사이드는 계속해서 자기 형성을 해나가길 바랐어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생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고 한다면, 백혈병진단을 받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예순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중기’였고, 자신이 ‘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언제나 남겨지는 것들에 흥미를 가져왔다"고 사이드는 말합니다. "나는 말로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흥미가 있다. 분명하게 침묵하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그 자체가 스타일의 한 양상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다"고 사이드는 미발표 노트에 썼습니다. "우리는 메시지와 신호의 사람들이다"라고 그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말합니다. 과묵하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가 음악의 절제라고 부르는 부분은 ‘암시를 포함한 침묵’이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과 아울러, 정치적인 것이나 그 밖의 희망이 없는 가운데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 232쪽

나아가 "저 불확실한 고향 상실의 영역"에서 "우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곤란함을 손에 쥐고, 어찌 되었든 도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드러냅니다. - 232쪽

긴 안목으로 보면 희망은 있다. 저는 이에 찬성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 긴 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분명 죽겠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이다. ‘후기 스타일’의 성과는 죽음 뒤로 던져두는 것도 가능하다. 눈앞의 작업을 대단원의 막으로 간주하고 긴박하게 이를 해낸 예술가들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역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러한 확신에 그야말로 연대감과 따뜻한 감정, 말하자면 다시금 우정(優情)을 느끼며, 저는 저의 ‘만년’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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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9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인생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동의하지만,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믿지 않아요. 독서를 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겠지만, 그것이 삶 전체를 바꿀만한 큰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책이 삶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요인을 간과하고, 마치 책이 만능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붉은눈 2016-07-29 16:03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책의 영향력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책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파편 중 하나일 뿐이지요. 그런데 어설픈 독서가들이 책의 효용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삶과의 일치, 인생의 변화, 심지어 성공을 들먹이는 것 같습니다.
 
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한번 읽다가 중간 정도에서 멈추었던 책을 다시 뒤적거리며 읽는다.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내가 결국 나일수 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시기도 없다. 소심하고, 유약하고, 우유부단하여,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홀로 생각에 잠겨야 할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습 말이다. 군대에서 성질을 버려놓아서 한 번, 회사를 이직하면서 또 한 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계기가 있어서 그동안의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보고자 무척이나 노력했었다. 웅얼대는 목소리를 힘있게 바꾸고, 게슴츠레한 눈을 크게 뜨고 미간에 힘을 주며 다니고,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내 분명한 의견을 강변하며, 조금 더 강해보이기 위해 몸도 만들고자 했었는데, 그랬던 것들이 '변화'이 아닌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약한 것으로 취급되는 내향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 올바른 모습을 파악하는데 이 책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라는 것이 책을 다시 펴게 된 동기이다.


이 책은 총 4부 11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은 그다지 와닿지가 않아, 차라리 세부 장의 제목을 토대로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외향성이 어떻게 우리 문화의 이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는가에 대한 운을 띠우고(1장),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의 신화와 그 신화를 양산하고 있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수업과 학생들을 분석하면서(2장), 사실은 이러한 팀워크가 개인이 홀로 작업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3장). 그러면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외향성은 '선(善)'인가? 예상했겠지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기질은 불변의 천성인지에 대한 실험을 소개한다(4장),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내향성 기질을 넘어선 사례를 제시한다(5장). 앨리너 루스벨트의 섬세함이 완성시킨 루스벨트의 정치적 성공 사례를 통하여 내향성의 긍정적 면모를 탐구한다(6장). 이 내향성의 기질을 가진 사람에는 워런 버핏도 포함된다. '오하마의 현인'이라 불리는 이 고전적 투자가는 데일 카네기 코스에 참가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중 강연을 할 수 있게되었다고 한다(7장). 


후반부에는 동양과 서양에서의 외향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제시한다(8장). 동양인에게 부족한 외향성이 뛰어날 결과를 드러내는 분야를 살펴보면서, 간디의 예를 통하여 부드러운 힘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도 검토한다. 한편,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내향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외향적 언행의 유인을 제시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한 과잉이 발생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다시 평소의 자신으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지를 다룬다(9장). 결국 외향성과 내향성은 각각의 특성에 따른 소통의 선호가 있을 뿐이며, 이 상반된 성격의 조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10장), 내향적인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함으로써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부드러운 힘을 긍정적으로 발현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를 밝힌다(11장).


저자가 책 서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외향성 지향의 시대에서 내향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각종 스피치나 프레젠테이션, 회의석상에서의 언행이 곧 자신에 대한 +/- 평가가 된다. 혹시라도 수줍어하거나 머뭇거리며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 자체로 능력에 대한 평가에도 감점이 생긴다. 발언에 대한 내용이 아닌 태도로 이미 긍정/부정에 대한 결론이 나기도 한다. 목소리를 높여야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내향성을 숨기고 외향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어찌보면 우리사회에서도 하나의 생존방법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격에 맞지 않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사교적인 멘트로 시작하여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다보면, 원래 그렇지 못한 내향적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거나 세뇌시키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하는가? 내향성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타개해야 할 어떤 부족한 기질 같은 것인가? 세상의 3분의 1은 내향적인 사람들임에도?


저자는 한마디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초반부에 제시된 이 결론이 내겐 무척 위안이 되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스스로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한 마디는 얼마나 큰 위안인가. 사회가 전반적으로 외향성을 추구하도록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도 내향적인) 저자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외향성과 내향성을 비교.분석하고 '외향성=리더십'으로 고정화 되어 있는 관념의 껍질을 벗겨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가는데, 강변이나 달변이 반드시 좋은 아이디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거나, 팀워크나 브레인스토밍이 사실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홀로 일한 것에 대한 결과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외향성과 내향성의 차이는 근본적인 우열이 아닌,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의 민감도임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어떠한 업무에 있어서는 내향성이 오류를 줄이고, 과도함을 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런 외향성과 내향성은 타고난 기질임은 분명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내향적인 사람이 매우 외향적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향성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내향적인 사람이 비사교적이거나 부적응자라는 고정된 인식들은 생산해낸다. 나도 20대에는 종종 스스로를 '사회부적응자'라고 칭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내가 속한 조직에 정을 붙이고 생활할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인식들은 내향적 개인들이 회피적인 행동을 하게끔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향적/내향적 사람들이 모두 다 사회적임을, 타인과 친밀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는 주말에 친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쉽사리 피로함을 느끼는 성격이지만, 페이스북에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게시하는 나 같은 사람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이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가끔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피곤을 느낀다'면서 페이스북 활동을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는데, 이 책을 통하여 내향적인 사람들이 직접 대면을 하고 대화를 하는 것보다 인터넷이라는 하나의 간접적인 장을 통하여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에서는 저자는 독자들에게 삶에서 적절한 조명이 비치는 곳으로 가기를 권하고 있다. 그곳은 브로드웨이의 스포트라이트일 수도 있고 등불을 켠 책상일 수도 있다. 타고난 장점(끈기, 집중, 통찰, 섬세함)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어떠한 장소가 더 적합한지를 선택하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특히 내향적인 사람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외향적인 일(공개 강연, 인맥쌓기 등)을 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기를 권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자신에게 해줌으로써 지치거나 소진되지 않도록 관리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자신의 기질에 맞는 적절한 '회복 환경'을 통하여 노출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하여 이론적이기도 하지만 실증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제시되어 있는 이 책은 내향적인 내 모습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들을 어느 정도 제거하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단순히 외향성과 내향성의 공존이나 생각의 다양성의 인정과 같은 추상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통하여 다른 내향적인 사람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으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가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도 제공하고 있다.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말이 위안이 될 정도로 획일적인 사회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부정하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위안이 되는 여러 요소들을 찾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 책을 통하여 스스로의 기질과 특성을 깊이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내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마저 속이는 것도 납득이 간다. 내가 ‘외향적 이상’이라고 이름붙여본 신념 체계에 따라 우리는 살고 있다. 이상적인 자아란,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만연한 믿음이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 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틀릴 위험이 있을 때조차 빠른 판단을 선호한다. 팀으로 일할 때 능률이 높아지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타인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할 줄 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알고 보면 한 가지 유형만 찬양한다. 자신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데 익숙한 유형 말이다. 물론 차고에 회사를 차린 기술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격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드문 예외일 뿐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며, 그런 사람을 용인하는 마음도 어마어마하게 부유하거나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한다. - 20, 21쪽

내향성은 (그 친척뻘인 섬세함, 진지함, 수줍음과 함께) 이류로 여겨지고 있는 성격 특성으로, 실망스러운 일 아니면 병적인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외향성 이상’을 떠받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향적인 사람은 남자들의 세상에 사는 여자처럼,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특성 때문에 무시당한다. 외향성은 대단히 매력적인 성격 유형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적인 기준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 21쪽

그래도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은 있다. 예를 들어,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외부 자극의 수준이 다르다. 내향적인 사람은 훨씬 적은 자극, 그러니까 가까운 친구와 와인을 한잔 홀짝이거나,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를 풀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딱 맞다’고 느낀다.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가파른 슬로프에서 스키를 타고, 오디오 볼륨을 높이는 등 좀 더 강력한 자극을 즐긴다. 데이비드 윈터(David Winter)라는 성격 심리학자는, 왜 전형적인 내향성의 사람이 유람선에서 파티를 벌이느니 해변에서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내고 싶어하는지 설명한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강한 자극이다. 위협, 두려움, 도주,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사람 100명은 책 100권이나 모래알 100개와 비교하면 매우 자극적이다." - 31, 32쪽

여러분이 이 책에서 가져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통찰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느낌이라면 좋겠다. 장담하건대 그런 관점은 우리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 - 38쪽

‘애빌린으로 가는 버스’ 일화는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을 따라가려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행동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동적인 연사에게 권한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매우 성공한 한 벤처 자본가는 나에게, 자기가 젊은 기업가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주기적으로 듣는데, 그 친구들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기술과 진정한 리더십을 구분하지 못해서 속이 터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걱정스럽게도 말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잡담 능력과 재능은 혼동하기가 아주 쉽죠. 어떤 사람이 프레젠테이션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 그런 특성 때문에 보상을 받아요. 왜 그런 걸까요? 그런 특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린 프레젠테이션에는 지나치게 무게를 싣고 내용과 비판적 사고에는 별로 무게를 싣질 않고 있어요." - 92, 93쪽

그랜트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첫째, 성격과 리더십에 관한 현재의 연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외향성과 리더십 사이와 상관관계는 미미했다. 둘째, 이런 연구들은 실제 결과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지도자라고 느꼈는지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인식은 문화적 편견이 반영된 것을 불과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랜트가 보기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연구들이, 지도자가 맞닥뜨리게 될 다양한 상황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특정 조직이나 상황은 내향적인 지도자 유형에 잘 맞는 반면 다른 상황은 외향적인 지도자 유형에 잘 맞을 수도 있는데, 기존의 연구들은 이런 점을 구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98, 99쪽

직원들이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라는 사실에 지도자들의 실적이 좌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랜트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능동적인 사람들을 이끄는 데 유달리 잘 맞는다고 지적한다. 상대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 무관심하다는 성향 때문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제안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시도해볼 확률이 높다. 이들은 사람들의 재능에서 도움을 받고 나서 더더욱 그들에게 능동적으로 행동하도록 독려하기 쉽다. 바꿔 말해서 내향적인 지도자들은 능동성이라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 100쪽

반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데 몰두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놓치고 사람들이 수동성에 빠져들도록 할 소지가 있다. 프란체스카 지노는 말한다. "결국 지도자들은 말은 엄청 많이 하게 되고 사람들이 제시하려고 하는 아이디어를 전혀 듣지 않게 될 때가 많더군요." 하지만 영감을 주는 타고난 능력으로, 외향적인 지도자들은 수동적인 일꾼들과 함께할 때 훨씬 나은 결과를 보여준다. - 100, 101쪽

정말로, 연구 결과들을 보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에 관한 깊은 사실들, 가족과 친구들이 보면 놀랄 만한 사실들을 온라인에 표현하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며, 몇몇 온라인 논의에 시간을 더 많이 쓰기 쉽다. 이들은 디지털로 소통하는 기회를 환영한다. 2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라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을 사람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2천 명, 아니 200만 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한다. 낯선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데 어색해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온라인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이 관계를 현실 세계로 넓히기도 한다. - 109쪽

내향적인 사람들의 창의성에 관해 그보다는 덜 명백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가설이 있다. 모두가 이 설명을 듣고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내향적인 사람들은 홀로 일하기를 좋아하고, 고독은 혁신에 촉매가 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Hans Eyesenck)도 지적했듯이 내향성은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하고, 일과 무관한 사회적.성적 문제에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도록 방지한다." 바꿔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테라스에서 술잔을 부딪치고 있는데 여러분 혼자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면, 여러분 머리에 사과가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뉴턴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내향적인 사람에 해당한다. 윌리엄 위즈워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영원히 항해하는 마음/생각이라는 기이한 바다를 헤치며.") - 125쪽

협력 모형은,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서 배울 때 학습에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정치적 진보 성향에 뿌리를 두지만 내가 뉴욕, 미시건, 조지아 주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서 면담한 초등학교 교사들에 따르면 그 방식은 기업계의 팀 문화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맨해튼의 한 공립학교 5학년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교육 방식은 독창성이나 통찰력이 아니라 언어 구사력에 따라 사람을 존중하는 기업계를 따른 겁니다. 말을 잘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거죠. 능력이 아닌 다른 뭔가를 토대로 하는 엘리트주의입니다." - 129쪽

고독의 어떤 점에 그런 마법이 숨어 있는 것일까? 에릭슨에 따르면, 여러 분야에서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의도적 연습’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연습은 그가 보기에 탁월한 성과의 문을 여는 열쇠다. 의도적으로 연습할 때, 우리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자기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진전 정도를 점검하고, 그에 따라 방향을 조정한다. 이런 기준에 못 미치는 연습 시간은 덜 유용할 뿐 아니라 거꾸로 역효과를 낳는다. 기존의 인지 기제를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 134, 135쪽

‘의도적 연습’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있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이 있으면 산만해질 소지가 있다. 강력한 동기도 필요하다(스스로 동기를 부여해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그 사람 자신’에게 가장 힘겨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 에릭슨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자신에게 힘겨운 일에 곧바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잘하려면, 상황을 ‘자기가’ 주도해야 하죠. 그룹 수업을 상상해보세요. 그때는 전체 중에서 아주 작은 시간만을 주도하게 됩니다." - 135쪽

실제로 과도한 자극은 사람들의 학습을 저해하는 듯 보인다. 최근의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도심의 거리에서 시끄럽게 걷기보다는 숲에서 조용히 산책할 때 더 잘 배운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노동자 3만 8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다른 연구는 단순히 방해받는 것 자체가 생산성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점을 밝혔다. 현대의 사무실 전사(戰士)들의 귀중한 능력인 멀티태스킹조차 신화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제 과학자들은 두뇌가 두 가지 일에 동시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을 안다. 멀티태스킹처럼 보이는 행동은 사실 여러 가지 일을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실수가 일어날 비율을 50퍼센트까지 높인다. - 140쪽

<스티브 워즈니악>에서 그는 휴랫팩커드가 능력주위 사회였다고 회고하면서 외모도 상관없고, 사내 정치를 벌여봐야 혜택도 없고, 누구도 그가 사랑하던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관리직으로 가라고 밀어붙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워즈니악에게는 협력이 뜻하는 바였다. 동료들과 도넛과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것 말이다. 태평스럽고 비판적이지 않고 옷도 엉성하게 입는 동료들, 진짜 일을 하려고 칸막이 안으로 사라져도 신경도 안 쓰는 그런 동료들 말이다. - 154쪽

케이건은 특별히 자극을 잘 받는 편도체를 타고난 아이들이 낯선 물체를 보게 되면 꿈틀거리고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좀 더 경계해야 한다고 느끼는 아이로 자라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같았다. 바꿔 말해서, 펑크 로커처럼 팔다리를 휘두르던 4개월짜리 아기들, 즉 ‘고 반응성’ 아이들은 외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작은 몸이 새로운 물체와 소리와 냄새에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조용한 아기들이 조용했던 이유도 앞으로 내향적으로 될 아이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는 정반대로 신경계가 새로운 것에 별 감흥이 없기 때문이었다. - 164쪽

반응성에 관한 케이건의 발견과 결합해보면,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 성격을 들여다볼 매우 강력한 렌즈가 되어준다. 일단 내향성과 외향성을 자극 수준에 대한 선호도 정도로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성격에 잘맞는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자극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지루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게 만드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자들이 ‘최적 수준의 각성’이라고 하고 내가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고 하는 것에 따라서 생활을 구성하고, 그림으로써 전보다 더 활력 있고 생동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스위트 스폿’은 최적으로 자극되는 지점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이미 그 지점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해먹에 만족스레 누워서 멋진 소설을 읽는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이 ‘스위트 스폿’이다. - 196, 197쪽

"내향적인 사람은 ‘조사하게 되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은 ‘반응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수수께끼 같은 행동에서 더 흥미로운 면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잘못된 버튼을 누르기 ‘전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후에’ 무엇을 하느냐는 점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숫자 9에 버튼을 눌러서 자기가 점수를 잃었다는 점을 알면, 잘못을 되돌아보기라도 하듯 다음 숫자로 넘어가기 전에 속도를 늦춘다. 하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속도를 늦추지도 않을뿐더러, 반대로 ‘속도를 높인다.’- 256, 257쪽

이상한 일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뉴먼은 이것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다고 설명한다. 보상에 민감한 외향적인 사람처럼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하면, 그것이 회의론자든, 숫자 9든 그 무엇도 자기 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장벽을 쓰러뜨려버리려고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이것은 결정적인 과오다. 놀랍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만났을 때 더 오래 멈추었다가 시작할수록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뉴먼에 따르면, 외향적인 사람에게 ‘강제로’ 멈췄다가 하라고 하면 이들도 내향적인 사람만큼 게임을 잘한다. 하지만 혼자서 하게 내버려두면,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눈앞에 빤히 보이는 곤경을 피하지 못한다. - 256, 257쪽

내향적인 사람들이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똑똑한 것은 아니다. 지능지수 결과를 보면 두 유형은 지능이 동등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임무에서, 특히 시간에 쫓기거나 사회적 압박을 받거나 멀티태스킹을 해야 할 경우 외향적인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 외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보다 정보 과부하를 잘 처리한다. 조셉 뉴먼의 말로는 내향적인 사람은 반성에 인지능력의 상당 부분을 활용한다. 어떤 임무에서든 "우리에게 인지능력이 100퍼센트 있다고 할 때 내향적인 사람은 약75퍼센트만을 임무에 쓰고 나머지 25퍼센트를 다른 데 쓰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임무에 90퍼센트를 쓸 수 있죠." 이것은 임무라는 것이 대체로 목표 지향적인 까닭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인지능력의 대부분을 눈앞의 목표에 할당하는 듯한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하는 데 인지능력을 사용한다. - 259쪽

하지만 ‘천성인가, 양육인가’하는 논쟁이 상호작용론으로, 즉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우리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며 실제로 양쪽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으로 대체되었듯이 ‘성격인가, 상황인가’하는 논쟁도 좀 더 섬세한 이론으로 바뀌었다. 성격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오후 6시에는 사교적인 기분이 들다가도 오후 10시가 되면 혼자 지내고 싶어질 수 있다는 점과, 이러한 변동이 실제로 존재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고정된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산더미처럼 많다는 점 역시 강조한다. - 316쪽

리틀 교수처럼 철저하게 내향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대중 앞에서 효과적으로 연설할 수 있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들려주는 답은 간단한데, 그것은 그가 거의 혼자 힘으로 만들어낸 ‘자유특성이론(Free Traits Theory)’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분야와 연관된다. 자유특성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한 성격 특성(이를테면 내향성)을 타고나거나 문화적으로 함양되지만, "개인에게 핵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위해 거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들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아끼는 사람, 혹은 다른 귀중한 것을 위해 외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자유특성이론은 어째서 내향적인 남편이 외향적인 아내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하거나 딸의 학교에서 열리는 학부모회의에 참여할 수도 있는지 설명해준다. - 319쪽

언뜻 보기에 자유특성이론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에 역행하는 듯 보인다. 흔히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조언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우리의 철학적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람들은 일정 시간 이상 ‘거짓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 거리낌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된 자아가 진짜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함으로써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시도해보지만, 이유도 모르는 채 결국 소진되어버리고 만다. 리틀 교수의 이론이 천재적인 부분은 이러한 불편함을 깔끔하게 해결해준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외향적인 척만 하고 있을 뿐이고, 그러한 진실하지 않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모호할 수도 있지만(지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이나 직업적 소명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조언한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 320, 321쪽

나 스스로 직업을 변경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이 자기 직업을 찾아나가도록 돕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신에게 핵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알아내려면 세 가지 중요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첫째, 어린아이일 때 무엇을 좋아했는지 회상해보라. 어릴 적에, 크면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가? 그때 했던 구체적인 답변은 표적에서 빗나갔을 수도 있지만, 그 아래 깔려 있던 충동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면, 소방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좋은 사람? 저돌적인 사람? 아니면 그저 트럭을 모는 것이 좋았는가? (...)
둘째, 자신이 끌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자. 법률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기업법에 관련해서는 가외로 일을 맡겠다고 자원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영리 여성 리더십 조직을 위해서는 무료로 봉사한 적이 무척 많다. 그리고 법률회사의 젊은 변호사들을 위해 멘토링과 훈련과 자기계발을 맡은 위원회에 참여한 적도 많았다. - 333쪽

셋째, 자신이 부러워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자. 질투는 추한 감정이지만, 진실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있는 사람을 시샘한다. 내가 나의 질투를 알게 된 것은 예전 법대 동기들이 모여서 동문들의 경력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후였다. 동기들은 감탄하며, 그리고 질투하며, 주기적으로 대법원에서 변호하던 한 학우에 관해 얘기했다. 처음에 나는 비판하고 싶었다. 이내 ‘잘됐네!’하고 생각하며, 내 관대함을 칭찬했다. 그러다가 그렇게 쉽게 관대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대법원에서 변호를 하고 싶은 열망도 없고 변호사 업무에 따라오는 다른 포상을 얻고 싶은 열망도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누가 부러운 것인지 생각해보니, 즉각 답이 튀어나왔다. 내 대학 동기들 중 나중에 작가가 되거나 심리학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요즘 나는 이 두 가지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 - 334쪽

하지만 핵심 프로젝트를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너무 자신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거나 너무 오래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리틀 교수가 강연이 끝난 뒤에 화장실에 가서 숨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그런 행동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되도록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상생활에서 되도록 ‘회복 환경(restorative niche)’을 많이 만들어두는 일부터 해야 한다.
‘회복 환경’이란 리틀 교수가 만든 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가는 장소를 가리킨다. 리슐리외 강처럼 물리적인 장소일 수도 있고, 판매를 위해 전화하는 사이사이에 조용히 쉬는 것처럼 시간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 334, 335쪽

어쩌면 성격 유형에 관한 가장 흔하고도 파괴적인 오해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반사회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이 친사회적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양쪽 다 옳지 않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서로 다르게 사회적이다. 심리학자들이 ‘친밀감 욕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향적인 사람에게나 외향적인 사람에게나 다 있다. - 346,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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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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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내가 모르고 지나친 하루키 소설집이 있었다니?' 우연히 하루키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그래도 하루키의 단편들을 이리저리 짜집기한 책이 워낙 많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표지와 서지정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출판사가 문학동네이고 번역자가 양윤옥이라면 일단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세계와 그곳을 헤매는 존재의 고독을 예민한 감성으로 포착한 무라카미 하루키 첫 소설집'이라는 출판사의 광고 문구가 눈에 띠었다. 첫 소설집? 알고 보니,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쓴 이후에 문예지에 발표했던 단편이었다고 한다. 이 두 장편과 <양을 쫓는 모험> 사이, 그리고 약간의 그 이후 동안 발표된 단편들이니 나름 그의 초기작인 셈이다. 


단편집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한 편, 한 편을 각기 다른 느낌을 갖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하지만, 장편처럼 완결된 스토리가 없다보니 다 읽은 후에 내게 무엇이 남았는지를 반추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연속된 기억은 다 물처럼 흘러 사라져 버린 이후에 기억의 단편들만이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져 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독서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을 하나 고르거나, 아니면 수록된 모든 작품을 다 언급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후자를 택해본다.


이 소설집은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각각이 독립된 단편이며, 제목도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주인공인 '나'와 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되어 있는 <중국행 슬로보트>는 스토리나 문체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풍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논리적 인과가 없는 가운데 발견되는 낯선 사람 또는 지점과의 연계성,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접근,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 그리고 그것을 굳이 풀어내려고 하지 않는 주인공. 이 단편은 어찌보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시작하여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까지도 계속 연결되는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 오해, 망각, 기억이라는 하루키 소설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나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하루키 소설 중 기이함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어느날 뜬금없이 가난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등에 업히게 된다든지, 양 사나이가 찾아와 잃어버린 자신의 귀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는 스토리는 상식과 논리를 넘어 창조된 기이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전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등장한 '양'이나 '쥐'가 무슨 은유일까를 한참 고민하며 소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은유나 상징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화를 통하여 하루키의 아포리즘을 느낄 수 있는 글은 <뉴욕 탄광의 비극>이라는 단편이다. 평범하고 무덤덤한 주인공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자,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관찰자이자, 그와 전혀 다른 자아인 친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친구와 나눈 대화는 곧 그가 거울 속의 다른 자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말미에 등장하는 탄광 속의 풍경이 곧 제목인 된 셈인데, 이 짧은 몇 단락이 앞에 썼던 주인공의 생활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남은 공기가 얼마 안되니 최대한 숨을 쉬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라는 것인가.


<캥커루 통신>은 편지글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이 어느 휴일에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보고서는 며칠 전 상품을 교환해달라는 고객의 요청이 생각나서 편지를 쓴다. 편지형식이지만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듯한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상황임에도 주인공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캥거루와 고객 사이의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을 알아내어 비로소 편지를 쓴다. 이와 같은 약간의 엉뚱함을 제외하면 읽기에 무난하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하지만 정작 특별할 것이 없이 끝을 맺는 소설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정원에서 잔디를 깎는 아르바이트 생의 이야기로 주인공이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작업에 대한 묘사를 한다. 그는 마지막 작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의 말과 태도에 드러나는 독특함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녀의 과거나 배경이 상당부분 생략된 채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글을 읽으며 이후 일어나게 될 새로운 전개의 실마리를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설명없이 마무리 된다. 마치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듯이.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이보다는 친절한 편인데, 비가 내리는 비수기 리조트호텔에서 만난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주인공이 받아들이고 이끌리다가, 왜 그녀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 추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는 하루키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맨 뒷부분에 '작가의 말'이라는 부록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각 단편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웬만한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있다(그러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없다. 설마, 하루키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독특한 것은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먼저 생각한 후 첫 장면을 쓰면서 스토리를 펼친다는 점이다. 제목 지어내기를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나로써는 공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독특한 작법이 하루키의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중국행 슬로보트'라는 말에서 어떤 소설이 나올지, 나 스스로도 무척 흥미로웠다"는 그의 후기에 웃고 말았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초기의 단편들을 왜 이제와서(국내 발행일은 2014년이다) 다시 발간을 하게 된 것인지였다. 그것도 일단 발표한 작품은 더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왜 초기작품을 손봐서 다시 발간하게 되었나? 이 정도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일뿐, 아쉽지만 그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이 단편집의 의미나 향후 작품에 대한 연계성, 그리고 저자의 감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보수공사를 하니 나라는 인간, 즉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대략적 모습이 이 단편집 안에 이미 드러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그 후로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다면적으로 사물을 보고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뭘 해보고 싶은지도 좀더 명료하게 눈에 보이게 되었다. 현단계에서 작가로서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도 점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미완성인 나름대로, 어색한 나름대로, 균형감이 떨어지는 대로 이 첫 단편집에서 대부분 제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일이며 모티프, 어법 같은 것들의 원형은 일단 빠짐없이 나와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하다.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내 기억은 지독히 흐릿하다. 앞뒤가 뒤집히거나 사실과 상상이 뒤바뀌고 어떤 때는 나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런건 이미 기억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 11, 12쪽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 44, 45쪽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야마노테 선 전철 안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차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쥔 채 유리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도시, 그 풍경은 왠지 내 마음을 지독히 어둡게 만들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행사를 치르듯 빠져드는 낯익은 것, 탁한 커피젤리 같은 정신의 엷은 어둠이 다시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지저분한 빌딩,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리, 끊이지 않는 소음, 꼼짝 못하는 자동차의 행렬, 잿빛 하늘, 공간을 가득 메운 광고판, 욕망과 포기와 초조와 흥분. 그곳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동시에 제로였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쥐었지만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은 제로였다. 그것이 도시였다. 나는 문득 그 중국인 여자애의 말을 떠올렸다.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 44, 45쪽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내게 다가왔고, 그리고 빨리 떠나버렸다. 언어는 투명한 탄도처럼 일요일 오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시작은 항상 이렇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져버린다. - 53쪽

"새벽 세시에 인간은 온갖 생각이 드는 법이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누구든 그렇지. 그러니까 각자 대처법을 생각해놔야 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는 심지어 동물도 뭔가 생각해." 문득 떠오른 듯 그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 동물원 가본 적 있어?"
"아니."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없지, 물론."
"나는 딱 한 번 있어.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한 명 알거든. 그 친구가 밤근무를 하는 날 제발 부탁이라고 애원을 해서 들어갔어. 원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는 잔을 흔들었다. "그건 정말 기묘한 체험이었어. 말로는 잘 설명을 못 하겠지만, 마치 땅바닥이 사방에서 소리도 없이 갈라지고 거기서 뭔가 기어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을, 땅 밑에서 기어올라온 보이지 않는 그 뭔가가 마구 날뛰는 거야. 싸늘한 공기덩어리 같은 게 말이야. 눈에는 안 보여.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의 존재를 느껴.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꼈어. 결국 우리가 밟고 선 이 대지는 지구의 중심까지 이어지고, 그 지구 중심에는 엄청난 양의 시간이 빨려들어가 있는 거지." - 98, 99쪽

"텔레비전에는 적어도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어." 잠시 생각한 뒤에 그는 말했다. "원할 때 꺼버릴 수 있다는 거. 끈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거."
그는 리모컨을 집어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영상이 사라졌다. 방은 괴괴히 가라앉았다. 창밖에서 빌딩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참이었다. - 100쪽

"크리스마스 밤에 여자랑 마시려고 놔뒀던 거 아냐?" 나는 물었다.
그는 차가운 샴페인 병과 새 유리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쿨하게 미소지었다. "샴페인에 용도 같은 건 없어. 마개를 뽑아야 할 때가 있을 뿐이야." - 102쪽

"음악 좋아해?" 그녀가 내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나는 말했다.
"좋은 세계에는 좋은 음악 따위 없어."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투로 내게 말했다.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거든." - 104쪽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이 있고, 그것을 합당한 순서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니 당신에게 가닿았다. 그냥 그뿐이에요.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봤자 아마 당신은 잘 모를 테고 우선 나부터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럴만도 하죠. 서른여섯 개나 되잖아요!
그중 하나라도 순서가 어긋났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언뜻 충동이 들어 남극해에서 향유고래 등에 올라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근처 담뱃가게에 불을 질러버렸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서른여섯 개의 우연한 조합이 이끄는 바에 따라,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신기한 일 아닌가요? - 112, 113쪽

위대한 불완전함이 무엇이냐고 당신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군요 - 당연히 궁금하겠죠. 위대한 불완전함이란,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납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납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납하고 당신이 나를 용납한다 - 예를 들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이지 않아서, 어느 순간 캥거루가 이제 더는 당신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캥거루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주세요. 그건 캥거루 탓도 당신 탓도 아니니까요. 혹은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에게도 나름대로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에요. 대체 어느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것이죠. 앞줄 왼쪽부터 당신, 캥거루, 나, 이런 식으로요. - 117, 118쪽

글을 쓰는 건 이제 포기했습니다. 간단한 사무통지 글이라도 안 됩니다. 글자 자체를 더는 신용할 수 없거든요. 이를테면 내가 ‘우연’이라는 글자를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이 이 ‘우연’이라는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지도 -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 모릅니다. 이건 대단히 불공평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나는 팬티까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 단추 세 개밖에 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저는 불공평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란 불공평한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일부러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런 것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직접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 118쪽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네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입니다. 나는 콘서트홀에서 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겁니다.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이면서 맥도날드의 쿼터파운드 햄버거이고 도 싶고요.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습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도 싶습니다. - 133쪽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마치 축 늘어진 새끼고양이 몇 마리를 쌓아올린 것 같다. 미적지근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걸 상품이랍시고 내놓다니 - 상품 말이다 - 나는 때때로 엄청나게 창피해진다. 정말로 얼굴이 붉어지는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면 온 세상이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파악한다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으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 141쪽

내가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는지, 이제 잘 모르겠다. 기억은 나는데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하나씩하나씩 옷 벗는 그녀를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몸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아했다. 섹스 뒤에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재잘거리거나 잠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는 몇 주간을 빼면 내 인생은 지독히 단조로웠다. 어영부영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그럭저럭 남들 비슷하게 학점을 땄다. 그리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이유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친한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에게도 애인이 있었지만 우리는 곧잘 둘이서 어딘가에 가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혼자 있을 때는 내내 로큰롤 레코드를 들었다.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란 다 그런 법이다. - 143쪽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여자는 말했다.
나는 애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막연한 이미지였다. 그녀의 스커트를 떠올리려고 하면 블라우스가 사라지고, 모자를 떠올리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이 어떤 딴 여자의 얼굴이 되었다. 기껏해야 반년 전 일인데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 168, 169쪽

「중국행 슬로보트」
이 작품은 가장 먼저 제목부터 시작했다. 내 단편소설의 대부분은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 첫 장면을 써본다. 그러면 거기서 스토리가 펼쳐져나간다 - 이런 식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 방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버린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방식은 내 성격에 잘 맞는 것 같다. 이른바 제재니 주제니 하는 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문장으로 풀어나가는 사이에 차츰차츰 저절로 줄거리가 펼쳐진다. 글로 써내려가는 사이에 나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작업 자체가 내게는 매우 스릴 넘치고 흥미 깊게 다가온다. -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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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억에 남는 단편 위주로 소개합니다. 모든 단편 다 요약해서 정리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

붉은눈 2016-07-20 14:4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괜히 모든 단편을 기록해보려고 욕심내다가 한 편에 대한 느낌마저도 제대로 남겨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단편은 단편치고도 서사의 전개가 그리 많지 않아 하나도 제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네요.
 
99℃
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이의수 옮김 / 인사이트북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한때 자기계발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특히 특정한 행동패턴을 열거하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듣기 좋은 혹은 선문답 같은 한 두 문장을 던지며 시종일관 그와 유사한 말만 되풀이 하는, 그러면서 적당한 삽화로 승부하는 그런 책들은 정말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나무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차츰 무뎌지는 것인지 너무 그렇게 빡빡한 기준으로 독서를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전혀 읽지 않는 것보다는 그런 책이라도 읽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한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이유나 효용이 다양하겠지만, 내게 이와 같은 얇은 자기계발서는 일종의 '슬럼프 극복용'이다. 그런데 그 슬럼프라는 것이 삶의 슬럼프가 아닌 독서 슬럼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거나 중간에 읽던 책을 다시 펴기가 싫을 때에는 다 포기하고 새로운 책을 찾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묵직하고 신경써서 읽어야 하는 책을 고르기보다는 가볍고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독서라는 습관을 멈추지 않아도 되고 어찌되었던 한 권을 다 읽었다는 행위의 완료는 독서에 대한 성취감과 함께 다시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내게 여유와 동기를 부여해준다.


삶을 대하는 태도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게 과연 학습될 수 있는 것일까? 자기계발서를 대할 때면 나는 종종 그런 의문이 든다. 물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라'라든가 '현재를 살아라' 같은 어떤 상황에 쓰여도 통용될 수 있을 것 같은 말들도 있긴 하지만, (굳이 '주의(ism)'를 선택하라면 경험주의자임을 주장하는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변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기 위한 간접적인 계기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 권이 아닌 몇 권의 책을 통하여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여야 가능한 일이다.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성공한다는 것은 모두 현재의 틀을 깨야만 가능하다고들 한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을 둘러싼 현재의 상태를 뭔가 부족하고 불만족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 쯤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갇혀 있는 현재라는 틀을 깨기 위해서는 (뻔한 진리이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내가 즐길 수 없는 일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하지 못하면 성공이고 뭐고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것은 학습을 통해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나 책을 읽은 후의 감상들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질문이다. “100미터라 가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몇 미터를 파야 할까?” 대부분 나를 알기 위해서는 더 깊이 파고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답이 고작 1미터라는 것을 들으면, 이 질문이 how much 보다 더 중요한 의문사 where를 생략해버린 반쪽짜리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미터만 파더라도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있으려면 '정확한' 지점을 파야 한다. 즉 이 질문의 숨겨진 핵심은 자기를 알고자 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열심히 노력해서 깊이 파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지점을 포착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섣부른 행동들은 크고 작은 좌절의 연속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무턱대고 알을 깨려고 하기 전에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 그 전에 현재라는 알을 깰 필요가 있는지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두들 '변화'를 말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에 나 자신의 스펙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적인 모델은 결국 나의 이상일 뿐이니, 따지고 보면 변화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고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인 올리버의 재능을 우연히 알게 된 필란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올리버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된다. 비록 현실의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함께할 리는 없겠지만, 부족한 상황과 배경 가운데에서도 진심으로 나를 위로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그들의 조언을 가벼히 여기지 않으며, 내 욕망과 그들이 발견한 내 모습이 일치하는 지점을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인간은 전부 고독해. 남을 잘 모르기 때문이지. 또한 나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인간의 고독감은 삶의 공포일 뿐이야." - 20쪽

"왼발은 단순한 방문객이고 오른발은 손님이라고 했잖아. 병원은 너에게 단순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곳에 있는 죽음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해져야 할 것이지. 우리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잠시 밝은 세상에서 살다가 결국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지."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살 것인가야. 그것이 우리의 숙제이지." - 24쪽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 네 가슴의 깊이는 몇 미터일까?"
나는 그런 생뚱맞은 질문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00미터라 가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몇 미터를 파야 할까?"
"적어도 50미터는 파야 하지 않을까?"
"틀렸어. 단 1미터만 파면 돼." - 48쪽

"배운다는 것은,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해. 깨달은 뒤에는 행동을 해야 하지. 하지만 나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 할 수 없었어." - 57쪽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네 마음을 속여서는 안 돼. 특히 사랑은 속이기 어렵지. 사랑은 꽃과 같은 거야. 그 향기가 반드시 퍼지기 때문에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지. 하지만 그 꽃을 따기 위해서는 벼랑 끝까지 갈 용기가 있어야 해." - 58쪽

"올리버,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니? 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란다." - 107쪽

"우리 인생에는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단다. 기회는 백 번이 올 수도 있고, 천 번이 올 수도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알아보는 것이야.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 119쪽

우리가 실제로 인정하는 일들과 성공으로 평가하는 일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두려움보다 긍정적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성공을 가져온다. 불가능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성공은 시작된다.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의 문턱에서 포기할 때가 많다. 오늘 나의 삶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핑계는 끝이 없다. 하지만 내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 하나를 찾으면 나의 발목을 붙잡는 허다한 이유들은 자취를 감춘다. - 170, 171(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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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9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서대로 살아가기가 어렵고도 힘든 것 같아요. 의지력이 부족한 원인도 있겠지만,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주변 환경의 변화도 무시 못 하죠.

붉은눈 2016-07-19 17:12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이제 더이상 자기계발에 현혹당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자기만족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주변을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판결 VS 판결 -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
김용국 지음 / 개마고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법이라는 것. ‘정의’라는 관념과 같이 읽기에는 왠지 거창한 것 같고, ‘판례’라는 용어와 같이 읽기에는 매우 복잡해 보이며, ‘생활’이라는 단어와 같이 읽더라도 뭔가 불명확하게 다가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법과 관련된 교양서들을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조국의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와 같은 자기고백적 에세이에서부터 봉욱의 <미국의 힘 예일 로스쿨>과 같은 리포트 형식의 글, 김욱의 <법을 보는 법>이나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와 같은 말 그대로의 교양서, 금태섭의 <디케의 눈>,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과 같은 보다 현실적인 해설을 포함하여, 박홍규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 같은 학계 비판적 글과 임종인의 <법률사무소 김앤장>,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법조계에 대한 고발과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까지.

 

그런데 최근 김영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읽다가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 책을 골랐을 때에는 그동안 대법관으로 이 사회의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된 사건들을 판결해온 그의 글에서 뭔가 일반인이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생각이나 관점을 한수 배울 것으로 기대했는데, (물론 책에 언급된 사건들이 앞으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게 글을 쓰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책이 판결에 얽힌 법관들의 다수와 소수 의견을 정리한, 정말 제목 그대로 다시 ‘생각’만 한 글로 다가왔다. 잘 읽히지 않던 그 책을 덮고 다른 책을 펼쳤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또 판결에 관한 책이다. 실망을 해서 책을 덮었는데, 또 같은 분야의 책을 골랐다니... 그런데 <판결 vs 판결>이라는 제목과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라는 부제를 보니 상반된 판결을 분석함으로써 무엇이 더 옳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이런 식의 구성이 나처럼 어떤 판단에 대한 분명한 긍정 혹은 부정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더욱 적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판결은 완벽할 수 없다’는 주제 하에 정당방위, 증거가 부족한 살인죄의 판단, 성폭행과 화간의 구분,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처벌, 존엄사의 인정, 자살 원인제공자에 대한 책임 등 유사한 사건이지만 다른 결론이 난 것들을 독자가 대비하여 읽어볼 수 있도록 엮어 놓았다. 2부 ‘재판대에 오른 판결’에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황제노역, 스폰서 검사와 같은 사법부에 대한 비판적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권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 사법부의 굴욕적인 민낯이나 21세기임에도 여전히 ‘유전무죄’라는 말을 되뇔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평에 어긋난 잣대, 강자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현행법의 문제점,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국민참여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3부 ‘법정 안의 사회’에서는 김대중과 이석기의 내란음모 해프닝을 대비시키고, ‘종북’이라는 프레임으로 단순히 매도당했던 정치인들의 사례, 강용석과 신지호의 모욕죄 적용 여부, 친일파의 재산권에 대한 법원의 태도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들을 풀어낸다. 3부의 마지막에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의 파업을 통해 살펴본 노동권의 현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사법부의 판결은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문구가 단지 법전이라는 두꺼운 책에 적힌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규범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숨을 불어 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비슷한 사안에 대한 상반된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원칙이나 판결의 관점, 그밖에 실질적 요인들을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이 판례를 찾아볼 일은 거의 없다. 고작 한쪽이나 반쪽짜리의 뉴스를 보고는 자신이 갖고 있는 프레임에 맞춰 ‘이건 말도 안 돼’ 혹은 ‘사법부가 모처럼 제대로 판단했군’이라고 나름의 정리를 할 뿐이다. 어차피 이런 고정된 생각과 이분적 프레임을 갖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A vs B'와 같은 상반된 사안을 대비시키는 방식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찬성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거나 반대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다만, 책 제목이 주는 대립(vs)구도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유사하게 분류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결과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판결 vs 판결’이라는 형태로 엮은 것에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정당방위에 관하여 도둑을 폭행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남편의 폭력을 피하려고 밀고 발로 차 사망하게 한 사건은 둘 다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았다(후자는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사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노숙자를 방치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공공임대주택의 임차인 명의가 아닌 노인의 퇴거 사건은 ‘법대로’라는 범주에 같이 묶어 다루기는 하였으나, 두 사건이 대비되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책을 읽다보니 대법원에서 뒤집힌 판결이 많아, '판결 vs 판결'이 각 장마다 엮인 두 사건의 대비라기보다는 동일 사건에 대한 ‘지방법원.고등법원 vs 대법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특히 2부의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이나 KTX 여승무원 복직사건은 더욱 그러하다).

 

가끔 판결문을 보면 판사들의 작문실력은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이 일부로 어렵고 난해하게 쓰는 것을 일종의 특권적 글쓰기인 줄로 알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써가며 도저히 끝이 날것 같이 않게 만연체로 쓰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판결문의 문장들은 글쓰기 작법의 나쁜 사례로 꼽을만한 것들이 즐비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을 분석하거나 해설한 책을 읽을 때에도 동일한 우려가 생긴다. 대개의 저자들은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온전히 독자의 몫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사건의 발생과 경과, 판결의 쟁점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평이하고 간결하게 분석하여 해설하고 있다. 판결문의 경우도 인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부 필요한 경우는 보정을 하고, 매 사건 말미에 간단한 저자의 생각을 덧붙여 놓기도 하였는데, 짧지만 분명한 그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이 독자들에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저자는 “우리편에 유리한 판결은 ‘정의의 승리’로 추켜세우고, 불리한 판결은 ‘썩은 판결’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판결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결과에 따라 사법정의를 ‘세운’ 판결과 ‘죽인’ 판결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검찰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판사가 정의롭거나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도 실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은 제도적으로 ‘최종’의 결론일 뿐이지 정의롭고 공평타당한 결론은 아닌 것이다. ‘최상과 최선 사이에서’라는 이 책의 머리말 제목처럼 많은 판결이 ‘최상’을 찾지 않고 ‘최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듯이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을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복으로 비유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도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재판부는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줄 것인가?"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선을 할 의무와 권한이 법원에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재판부는 70대 노인을 구제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현행법을 뛰어넘어 법의 정신을 꿰뚫으려는 판결이었다. - 40, 41쪽

대법원은 보편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을 강조했다. 이것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함부로 뛰어넘어 개념을 확장.변경하여 법률 문언을 넘거나 반하는 해석을 하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2심 판결은 결국 이렇게 뒤집어졌다.
대법원은 평소엔 소수자 보호, 정의나 공평의 관념을 강조하지만 실제 법해석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노숙자를 보호하지 않는 서울역 직원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처벌 법규가 없으면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이씨처럼 법을 잘 몰라서 중요한 실수를 한 사람을 법은 좀처럼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법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전고법의 판결처럼 법의 해석은 때로는 적극성을 띠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홀로 사는 칠순노인에게 임대주책을 분양해준다고 해서 ‘불법행위’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을까. 법률을 해석하는 법원은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법대로’라는 게 법전의 문구에만 정답이 있을까. 행간에 숨어 있는 정신까지도 판결에 녹여낸다면 법원의 신뢰는 한층 더 높아지리라. - 42, 43쪽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피고인 강기훈의 승리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승리이다. 지금 저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강기훈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이다. 강기훈은 무죄이다. - 132쪽

모든 재판이 고도의 법률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실관계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취지가 기존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민감한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법원에 대한 불신 해소와 공정한 형사재판의 정착을 위해서는 앞으로 국민참여재판을 더 확대해야 한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배심원들의 평결과 법원의 판결 일치도는 90% 이상이었다. 선거법 위반 등 이른바 정치적인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97쪽

대중의 판단은 잘못되거나 편향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면, 선거제도도 없애야 하지 않을까. 각종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이 항상 최선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선거제도를 유지하는가. 바로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다. 만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을 소수 정치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어떻게 될까? 그들 나름대로 정치인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여 국민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선출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에 수긍할 사람은 없다.
물론 재판절차와 선거절차는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판사들의 선발부터 재판까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판사를 포함한 소수의 법률전문가 집단이 ‘그들만의 언어’로 재판을 해오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일반 시민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그들을 참여시키는 사법제도의 개혁은 그래서 불가피하다.
그런 차원에서 유용한 수단이라 할 국민참여재판은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사법비리와 사법불신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좀 더 투명한 사회, 상식에 맞는 판결을 원한다면! - 198쪽

결국 2004년의 사법부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에 대해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의 수호자’가 되었다. 23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판결이다. 사법부는 불법구금과 잘못된 재판으로 949일 동안 갇혀야만 했던 김대중에게 보상금으로 9490만 원을 지급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사법정의는 바로잡힌 것일까?
사법부 입장에서 보면 낯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의 입장 변화는 김영삼정부 시절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1996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반란수괴.내란수괴죄 등으로 처벌받은 뒤에야 나온 것이다. 만사지탄이 있지만 사법부가 뒤늦게나마 재판을 바로잡아 무고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까지 그들의 논리를 따르다가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고 나서야 이런 판결을 내놓았으니, 사법부가 결코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다. - 223쪽

지금은 변호사가 된 한 퇴직 판사가 현직에 있을 때 항상하던 말이 있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판사가 ‘바로 지금’ 자신의 소신대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 표현을 빌린다면 김대중 내란음모 무죄판결도 혹시 "지연된 정의"는 아니었을까. - 224쪽

법원은 그러나 ‘종북’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그 표현의 해악이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표현"까지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원은 "구체적 근거나 명확한 증거가 없이 배제와 차별, 증오, 적의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표현이 다원성, 관용, 관대함을 이유로 허용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한국 사회에서 ‘종북’이 바로 그런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북과 같은 의혹제기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신중함과 엄격함이 요구된다고 당부했다. - 239쪽

두 글자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면 종북 두 글자면 충분하다. 법원도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를 타인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무분별한 종북 꼬리표 남발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이석기 의원 내란선동 유죄 판결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도 있겠다. 그때마다 피해 당사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형사고소하는 일로 해결해야 하는가.
법적인 판단 여부를 떠나 북한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섣불리 예단하고 공격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법원의 말마따나,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보더라도 "배제.차별.증오"를 담은 표현을 "다원성.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종북 낙인은 또 하나의 반공주의일 뿐이다. - 239, 240쪽

수사기관은 미네르바의 수많은 글 중 단 두 편만을 문제 삼았고, 홍씨 역시 SNS 글 한 편과 방송인터뷰 하나로 전격 구속했다. 결국 둘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100여 일이나 옥고를 겪어야 했고 네티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법이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돼서는 곤란하다.
세월호 해경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은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기관의 명예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부나 수사기관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 253쪽

반세기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에 대한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친일 부역으로 획득한 재산까지 법이 지켜주어야 한다는 건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근호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의 재판을 맡은 이종광 수원지법 판사(현재 수원지법 부장판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헌법은 장식적인 말이 아니라 재판 규범"이라는 인식으로 판결에 접근했다. 그의 결정은 소 각하였다. - 273쪽

이제 파업 손배소는 더 이상 ‘신종’ 노동탄압이 아니다. 노사관계에서 일상이 됐다.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억대 손해소는 노조에겐 해고나 감옥보다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고, 사측에게는 파업과 노조활동을 막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 281쪽

1128억8802만4953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사측이 법원에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 걸려 있는 총액(2014년 1월 현재 민주노총 잠정집계)이다. 연봉 4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2822년을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배소 상황은 대한민국 노사관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 282쪽

반면, 노조의 파업은 목적이나 수단 모두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노조가 경영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인 정리해고 자체를 반대하기 위하여 파업에 나아갔다고 할 것이므로,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정리해고를 반대하기 위한 파업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경영권을 상당히 ‘존중’하는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파업의 방식에 대해서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수반하는 등 반사회성을 띤 행위"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노조는 "2010년 당시 파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합원 총회를 거쳐 실시한 합법파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조는 파업의 목적에 대해서도 "임단협 교섭과 관련된 조합원들의 처우개선이 주목적이었다"고 반박했다. 노조는 "단체협약 갱신 교섭을 하는 자리에 회사가 일방적인 구조조정안을 의제로 들고 교섭을 계속적으로 요구"했다며 "부득이하게 파업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 284, 285쪽

대법원은 헌법상 권리인 노동권과 경영권이 충돌할 때 십중팔구 경영권의 손을 들어준다. 판례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파업=불법’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하면 귀족노조의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되고, 민영화 반대 등으로 공공성을 목표로 내걸면 그것대로 불법파업이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만 죽어가고 있다.
파업은 자제해야 할 일인가? 아니다. ‘감수해야 할 손해’다. 이건 노조의 주장이 아니다. 이미 1979년에 법원에서 내린 판결이다.

단체행동권의 행사란 근로계약상 근로의무 있는 경우에 그 근로의무의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시민법의 원리에서 본다면 위법된 행위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이를 허용한 이유는 노동력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하고 있는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행해지는 한 사용자는 근로자들의 그 위법된 행위를 용인하고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헌법에 규정하여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대법원 1979.3.13. 선고 76도3657 판결) -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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