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장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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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는 서른여섯 편의 소설이 담겨있다. 7, 800페이지 짜리 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고작 260페이지가 넘는 짧은 단편집이다.


2페이지에서 3페이지, 심하면 한 페이지 만으로 끝나버리는 초단편 소설을 읽으며 들은 생각은, 참으로 부럽다는 것이었다. 천편일률, 1만 6천자에 끼워져 있는 우리 나라 단편 소설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코르셋에 비명을 지르는 구시대의 여자들처럼, 소설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섬광처럼 지나가야 한다. 할 얘기를 다했으면 그게 단 한 문장 뿐이더라도 소설은 펜을 놓고 책상을 떠나야 한다. 규격을 맞추기 위해 구질구질 이야기를 늘이는 건 단어의 낭비다.


그러나 두세페이지 짜리 소설들로 창작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기적인 연재 코너가 있을까? 매회 분량을 맞춰야 할테니 그건 어려울 것이다. 이 정도 작가가 개인 블로그에 작품을 올리진 않을거고, 그렇다면 오직 단행본을 통해서라는 건데 전세계적으로 불황인 출판업계, 그것도 비주류에 속하는 단편 소설이 전세계의 심을 받는다는 건 이 책의 저자 에트가르 케네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타일과 주제 의식, 기발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 의식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도저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소설도 많았다. 외국에선 현대인의 실존적 혼란,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 부조리 등을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카프카 혹은 고골로 평하는 모양인데 나에겐 이런 것들이 그닥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작가가 카프카에 비견된다고 해서, 혹은 그가 부조리를 다룬다고 해서(물론 후자는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 이야기가 더 재밌어지는 건 아니다. 나에겐 스타일이 훨씬 중요하다. 그것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제를 종이에 써서 눈 앞에 들이미는 게 아니라 어렴풋한 인상을 남긴다. 인상은 늘 실체보다 오래남고 시간에 따라 하늘하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건 기발한 상상력이다. 이야기를 읽으며 "아, 세상엔 아직도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토록 많구나." 하는 충격을 주는 쪽이 나에겐 진정 위대한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말 그대로 낯선이의 방문이 선사하는 신선함과 떨림을 아낌없이 선사하다. 마치 마그리트 그림 속의 오브제들이 가득한 방으로 초대된 것처럼. 눈을 떠보니 양복을 입은 참다랑어가 내 손 등에 축축한 지느러미를 올려놓으며 그날 오후 자신이 겪은 신비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샹들리에에는 빛을 내는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고 작업복을 입은 낙타가 씽크대의 배관을 수리하는 중이다. 지렁이 DJ가 트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모두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술잔을 들고 있다. 그리고 등 뒤엔 칠흑같이 어두운 현관문 하나가 알수없는 불안을 뿜어댄다. 방안의 누구도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지만 문의 존재를 모른다기 보다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그때 문 뒤에서 "쾅, 쾅."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방안의 모두는 그 노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신나는 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지만 눈을 한번 깜빡 할 정도의 시간, 아주 찰나의 순간 손에 잡힐듯 경직된 침묵을 느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검은문을 쳐다본다. 나는 참다랑어와 낙타와 박쥐와 지렁이 그 밖의 모든 존재의 외면을 무시하고 문으로 향한다. 다시 한번 "쾅, 쾅."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 소리는 방안의 누구도 깜짝 놀래킬만큼 명확하고 우렁차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소리를 무시한다. 나는 참다랑어를 쳐다본다. 그의 몸 위를 흐르는 물기가 바닷물인지 아니면 땀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부정하려는 불안을 못본채하며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검은색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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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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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시장>이라는 제목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선 시장을(market)을 시장(mayor)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본 순간 그렇게 오해했고 꽤 흥미로운 '소설'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 책이 말하는 시장(market)은 시장(mayor)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제목에서 우리는 현대 경제 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조를 섞어 던졌던 말이 기억난다. 정치 권력은 이제 경제 권력의 노예가 됐다(명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바야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한 '물신'의 등장. 물신의 지배 아래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몇몇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아직 영생을 얻지는 못한 물신에 마지막 비수를 꽂아 넣으려 한다. 오공의 머리에 금고아를 씌우는 삼장처럼, 양손에 목줄과 족쇄를 들고 폭주하는 물신을 잡으려 한다. 그렇다면 <신이 된 시장>은 레지스탕스를 모집하는 공고문일까?


내 기대는 또 한번 박살났다. 이 책은 시장의 부패한 이면을 들춰 사람들을 자각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저항의 씨앗을 심으려는 의도가 없다. 이 책은 저항의 마음보다는 지적 호기심의 향취를 따라 제목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밝힌다. <신이 된 시장>은 시장이 신성화 되가는 과정을 낱낱히 파헤치기보다는 현대의 시장이 얼마나 신과 닮았는지를, 현대의 신이 얼마나 시장을 닮으려 하는지를 밝힌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장과 신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시장은 늘 신과 함께였다. 신약 성서에서 시장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예수가 성전 앞에 줄지어선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엎으며 그들에게 내뱉었던 독설을 말이다. 중세로 가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쇼핑몰이 바로 성당을 마주한 길가를 따라 형성되는 걸 볼 수 있다. 과거엔 성당 건축물이 인류 최대의 엔터테인먼트였다. 높은 천장, 색색의 빛으로 스며드는 스테인드글라스, 사방을 채운 아름다운 벽화들. 오늘날 대형 쇼핑몰은 정확히 고대 성당의 유산을 계승한다. 이뿐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이 IMF와 세계은행을 이용해 온갖 나라의 시장을 개방하려는 노력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된걸까? 과거에는 고작 신에게 기생하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던 시장이, 어느새 신과 마주 앉아 서로의 이익을 논하더니, 이제는 도리어 신을 몰아내고 그 왕좌를 차지하게 된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결국 지상의 신은 인간문화의 산물일 뿐이고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흥망성쇠의 운명을 따라 자기 생을 다하는 것일까? 인간은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 보다도 자기 입맛에 따라 사는 동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좌판을 발로 차며 그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촉구한 예수의 말씀보다는 그 좌판을 어떻게 채워야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는지 알려주는 시장의 말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예수의 분노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물신은 21세기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2018년에도, 서기 30년에도 '시장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이 쏠린 마음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나타났을 때부터 함께했을지 모른다. 달라진게 있다면 한때 신의 말과 심판을 두려워했던 우리가 지금은 주택담보대출과 카드 연체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 오늘날 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물신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축복을 내리고 그것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인간이 변한걸까? 아니면 시장이 강해진걸까?


다음엔 꼭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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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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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은 미래 사회에 대한 예언이나 트렌드의 예측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 토드 로즈의 소망이자 사명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지배적 방법인 평균의 폐해를 밝히고 그 대안을 제시해 우리가 평균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기를 촉구한다.


<평균의 종말>에서 주장하는 평균의 문제점을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국, 영, 수, 사, 과에서 각각 100점, 0점, 0점, 0점, 0점을 맞은 학생이 있다. 이 학생의 평균은 20점. 학교는 이 친구를 하위 5%의 구제불능 멍청이로 분류한 뒤 정상적인 학업 성취가 불가하다고 판단, 교사가 거의 관리하지 않는 열반(포기반)으로 보낸다. 이렇게 미래의 노벨상 후보 하나가 우리 삶에서 사라진다.


오늘날 평균은 한 사람의 능력과 가치, 심지어 성격과 성향마저 대변하는 무소불위의 지표가 됐다. 많은 학교와 기업에서 진행하는 인적성검사를 보자. 당신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습니까? 매우 그렇다(내향적). 당신은 도전적이고 새로운 일을 맡는 걸 좋아합니까? 그렇다(외향적). 인적성검사는 다양한 맥락에서 내놓는 완전히 모순적인 답들을 합산해 평균을 낸다. 이로써 나는 모든 상황에서 대체로 내향적인 인간이 된다(매우 내향적을 -50으로 외향적을 40으로 보면 내 평균은 -5로 대체로 내향적인 인간이 된다).


평균으로 설명하기에 인간은 너무나 다면적이다. 쉽게말해 인간의 능력과 성향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매우 들쭉 날쭉한 것이다. 평균은 이 개성을 꾹꾹 눌러 펴 나와는 어느 한 부분도 닮지 않은 기이한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들이 우리 세계에 이토록 깊숙히 뿌리내린 이유가 뭘까? 그건 천문학계에서 이름을 날릴 기회를 놓친 한 과학자의 극적인 피봇(pivot)을 통해 시작됐다. 아돌프 케틀레. 바로 그 주인공의 이름이다.


케틀레는 전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시대에 천문학자가 되고자 했던 불운한 남자였다. 케틀레의 소망은 하루빨리 사회가 안정되어 예전처럼 왕의 후원으로 천문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문득 이 혼란한 사회를 설명하는 과학적 방법은 없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케틀레의 꿈은 사회학 분야의 아이작 뉴턴이 되는 것으로 대격변을 이룬다.


이 시기는 인류 최초로 빅데이터가 쏟아지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케틀레는 이런 통계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평균을 도입한다. 어떤 연구 결과나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천문학계의 관행이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속도를 재는 과정에서 관측자마다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각각의 결과에 평균을 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평균이 실제 천체의 속도와 가장 가까운 수치라고 믿었기에 인간 또한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은 복잡다단한 인간을 정형화시켜 그 본질을 한 눈에 파악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충동과 맞물려 사회 과학계의 주류로 떠오른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러한 사고는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생산하는게 유일한 목표인 산업시대에 이르러 폭발적인 확산이 이뤄졌다. 훌륭한 CEO라면 누구나 자신의 공정을 표준화했고 이 표준화된 방식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표준화된 인재를 채용하려 했다. 그리고 이 회사들에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근대의 교육제도였다. 이제 학교가 왜 그렇게 지루하고 짜증이 나는지 알겠는가?(이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이다. 강추, 또 강추! https://www.youtube.com/watch?v=-qbYv9BX0UI)


회의주의의 창시자인 버틀란드 러셀은 "인간만사에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지금까지 평균이 심대한 도전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것과 연계된 세상이 너무나 광범위했고 그 방법이 너무나 간단명료했기 때문이다. 만약 토드 로즈가  ADHD의 고교 중퇴생이 아니었다면, 그가 수 많은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결국 하버드 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회에 균열을 내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는 건 결국 아웃사이더의 몫이었다. 인간의 진화 또한 매번 똑같은 형질을 물려주는 DNA가 아니라 심각한 돌연변이를 통해 시작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이 정한 훌륭한 사회인의 '평균적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자(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 그 특이성을 갈고 닦아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나를 만드는 것. <평균의 종말>은 오늘도 이런 삶을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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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헤아려 보니 2014년 8월부터네요. 1주일에 한개씩, 한번도 빠짐없이 약 4년간 리뷰를 올려왔습니다. 그 기록이 이번주에 깨질 것 같애요. 이번주는 뭔가 쓸만한 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정기적으로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은 거의 없을테지만(대략 한두명쯤 될 겁니다) 그래도 알려드립니다.


이번주는 리뷰가 없어요!


왜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숨쉬는 걸 의식하지 않듯 읽고 쓰는 사람들한텐 이 둘이 마찬가지 일 같습니다. 그냥 읽는거죠 뭐. 읽었으니 해야할 말이 떠오르는 거구요.


네가 깜냥이 되냐? 라고 물어보시면 큰소리로 "네!" 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다년간 꾸준히, 꽤 많은 책을 읽어온 사람으로서 이제 막 책을 읽으려는 분들께 제가 깨달은 것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째,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읽으십시요. 


인생은 짧고, 책 읽을 시간은 더더욱 짧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어지럽고 불편하고 내 입맛엔 맞지도 않는 양서를 읽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요. 책을 읽는다는 건 에너지가 대단히 많이 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재미까지 없다면 그걸 왜 해야합니까? 독서는 취미지 절대 의무가 아닙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면 재미있게 본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어보세요. 책과 영상이 표현한 장면들을 차근차근 비교하다보면 글의 한계와 영상의 한계, 그 미학의 특성들이 눈에 드러나 꽤 쏠쏠한 재미를 줄겁니다.


나는 드라마도 영화도 안봐요. 솔직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책은 읽고 싶어요. 라는 분이 있다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취향이 없는 분한테 무슨 수로 추천을 하나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사실은 취향이 있습니다. 본인이 잘 모르거나 남들만큼 뚜렷히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이런 분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떠올려 보십시요. 그때 나를 열광케 했던 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가, 나를 까르르 웃으며 손뼉치게 만들었던 건 무엇인가 를 천천히 종이에 적어보십시요. 아마 당신도 잊고 있던 당신을 발견하게 될겁니다.


둘째, 책은 결코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을 얻기 위해 책을 읽지 마세요. 제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건 스무살 무렵이었습니다. 일종의 에피파니였어요. 다니던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는데 문득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이치,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 인간, 그들의 행동 기타 등등. 그래서 미친듯이 철학책을 읽었고 그렇게 20년을 보낸 다음에야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책은 더 큰 질문으로 이끄는 문일 뿐 결코 해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의문이 떠오릅니다. 날적부터 봉사였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떴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가 봉사였던 시절 인식했던 세상과 뜬 눈으로 맞이하는 세상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인지 구조의 대격변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읽을수록 의문은 자꾸 커지고, 많아지고, 농밀해지니까요. 그 의문을 해소해보겠다고 또 다시 책을 들지만 몰아치는 바다를 바가지 하나로 퍼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뭔가를 알기 위해 책을 든 분들은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게 점점 더 많아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책은 저자와의 대화입니다.


책은 절대 권위가 아닙니다. 절대 진실을 말하지도 않고요. 책은 어떤 사람이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 놓은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분야의 진리를 획득한게 아니에요. 여러분이나 저자나 그저 여행 중일 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글쓴이가 여러분보다 한발 앞서 여행을 떠났거나 여러분과는 다르게 자신의 여정을 정리한 것 뿐이죠.


여러분도 이미 충분히 여행을 경험해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생각이 있겠죠. 책을 읽으며 여러분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비교해 보십시요. 그리고 저자의 생각에 의문을 갖고 반론을 펼치고 논쟁을 해보십시요. 책을 읽어 얻게 되는 중요한 자질 하나가 바로 비판적 사고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게 많이 부족한거 같애요. 수천년간 무거운 위계사회를 살다보니 위에서 내려온 말씀엔 토를 달지 않는 성향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모양입니다. 유독 한국에서 유행하는 인문학 강연이나 멘토링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애요. 현상을 스스로 해석하고 비판하고 자기 생각을 만들기 보다는 어떤 현자 혹은 권위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그 생각을 전수받으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족집게 과외를 기대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사람이 힘들게 쌓아온 결과를 정답만, 한방에 가지려는 거죠. 다른 나라는 백년이 넘어도 못한 일을 불과 수십년 만에 이룩한 기적적 성장의 기억은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을 모조리 비효율적이고, 바보같은 일로 간주하는 악습이 되버렸습니다.


넷째, 행복해지려면 책을 읽지 마십시요.


책읽기는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읽을수록 몸이 뜨거워지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습니다. 생각은 인간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요. 생각이 있고, 그걸로 미래의 고통을 대비한다고 행복이 올까요? 아니요. 살아있는 동안 고통은 끊임없이 찾아올 겁니다. 그건 그냥 그런 거에요. 아무리 뛰어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살아있다는 그 현실만큼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여러분의 눈엔 미래에서부터 달려오는 더 많은 고통의 무리들이 보일겁니다.


행복해지겠다고, 이 세계가 주는 고통을 좀 덜어보겠다고 책을 읽는 분들은 진정한 해결책과 가장 먼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가지고 있는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두뇌를 포맷하십시요. 1.5키로짜리 주름 투성이 단백질 덩어리에 아무런 생각도 넣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 이번주에 리뷰를 쓰지 못했냐 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책읽기에 대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140자든, 1,400자든.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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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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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의 클리셰 중 하나는 대단히 철학적인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소년 또는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의 부조리(특히 어른의 허위와 가식)를 파악하고 거기에 촌철살인의 비평을 내놓는다. 깜찍하다. 같은 어른이 말하면 기분이 나쁠 상황도 애들이 말하니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도 클리셰는 클리셰인지라 설령 그 소설이 그런 작법을 세상에서 제일 처음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항상 동시대에 그 책을 읽는 것은 아니므로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피로도를 감쇄하기 위해 화자를 동물로 만들 수도 있는데 이 방법도 역시 너무나 많이 알려진 탓에 이제는 변주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참고로 화자가 고양이인 경우 소설은 꽤 잘 먹힌다).


프랑스 소설의 두번째 클리셰는 화자들이 늘 사색에 잠겨있는 탓에 줄거리를 진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잣말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사색의 결과를 쏟아낸다. 내면의 마음 상태나 생각의 결과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그대로 그들의 속마음을 낱낱이 '들려준다.' 어떻게보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서사 방식의 한계는 엄청나게 센스있는, 만연체의 현학적 문장으로 커버가되는데 그 탓에 소설을 훨씬 더 수다스러워진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이런건 소설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박힌 주옥같은 철학의 편린들을 보면 아무리 서사가 빈약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소설을 쉽게 엉터리라고 매도할 수 없는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문학공모전의 원고를 심사 중인데 자신의 취향과는 맞지 않지만 촌철의 명문을 한 페이지에 한두개씩 발견한다. 당신은 이 사람에게 문학상을 줘야할까?


프랑스 소설의 세번째 클리셰는 자기 문화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다. 이는 사실 문화우월주의의 발로이기도 한데(아이러니하게도) 왜냐하면 이런 불신이 남들은 우리 문화를 우아하고 세련됐다고 칭송하지만 내가 볼땐 거추장스럽고 허위 가득한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언제 니들 문화가 우아하다고 말했지?). 이런 태도는 종종 아시아 문화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곤하는데 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매료가 일반적이다.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생선 한 조각을 요리하는데도 별의별 조리법과 소스, 수많은 식기, 끔찍할 정도의 설명이 등장하는 프랑스 요리에 비해 칼로 한번 쓱, 밥알을 하나, 둘, 셋, 네번 만에 쥐어 완성되는 스시는(게다가 맛도 죽이잖아) 거의 마법처럼 보일 수 있다. 외국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이처럼 피상적이다. 그러다보니 자기들이 보고싶은 겉모습만 쏙쏙 뽑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궁극의 문화 마냥 이상화 된다. 고개를 숙이는 인사법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겸손을 의미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 정중함에 본인의 영역에 쉽게 타인을 들이지 않으려는 경계심과 에고이즘이 담겨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텐데 말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대단히 센스있는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엄청난 철학자들이지만 허위와 가식이 충만한 보통 프랑스인들은 이들의 진면목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을 발견하는건 그들의 아파트에 새로 이사온 한 명의 일본인이다. 이름은 오즈 카쿠로(일본의 미의식을 전세계에 알린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사촌이라는 설정이다). 그는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통해 자기 집에 미닫이 문을 달았고(얼마나 우아한가!) 메밀 소바와 교자를 직접 해먹으며(한번도 본적 없는 음식!) 다양한 분재와(미의식의 극치!) 고양이를(선인은 늘 고양이를 기르지) 기른다. 물을 내리면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나오는 변기를 갖고 있다. 오즈는 마치 야만의 세계 프랑스를 교화하러 온 동방의 진인처럼 그려진다. 만약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게 독일의 나치가 아니라 일본군이었다면 그들이 이토록 일본을 숭배할 수 있을지,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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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2019-05-1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사람들도 그렇게 프랑스를 흠모했으니, 남의 떡이 커 보이는건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9-05-19 10:46   좋아요 0 | URL
일본은 뭐 자격지심과 사대주의의 왕국이죠. 자기들이 아시아의 백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