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9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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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끝으로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나는 조선 왕조 실록과 세종대왕 실록을 읽고 일제강점기로 넘어왔는데 개인적으론 이 책이 가장 지루했다.


본기를 편년체로, 이후 열전을 덧 붙이는 방식으로 단원을 마무리하는 건 시리즈 전체가 대동소이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 책은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많이 겹치는 기분이다. 그것도 단락을 넘나들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는 왕조실록이 기술한 시간보다 훨씬 짧고 따라서 강점의 시작부터 끝까지 생존해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건과 인물이 중복 등장할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내가 이 책을 지루하다고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역사 교육은 대개 이 시점이 본격화 되기 전에 끝나버린다. 안창호, 안중근, 김좌진, 김구 우리가 거론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뻔하디 뻔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빈약한 역사 교육을 반증한다. 나는 때때로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분노가 정확히 누구,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상없는 분노는 그저 우리를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할 뿐 누구에게, 왜, 어떤 반성을 받아내야 하는지, 그 행동의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지 못한다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채 뚝뚝 피를 흘리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주변국의 뻔뻔함이 아니라 우리의 빈약한 역사 인식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강점기에 대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는 걸까? 따지고 보면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한 많은 시절 아닌가? 이야기가 쏟아져도 수백 개는 쏟아질 수 있는 시기다.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가 있기는 했으나 역사 드라마라기 보다는 그냥 주먹질 얘기에 불과했다. 일제가 철수하면서 당시의 역사를 철저히 지웠거나 조금 음모론을 덧붙이면, 그 역사가 대중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가는 걸 원치 않는 권력 집단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정확하게 배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은 이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인물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 내러티브 없이 단순 사실만으로 채워지면 아주 지루한 보고서가 될 수 밖에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고, 반성해야 할 사실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기존 시리즈의 구성을 완전히 탈피했어야 했다. 사람들의 흥미를 확실히 끌 수 있는 주제는 당시의 친일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이대 초대 총장인 김활란이 대단한 친일파였다는 사실과 그 유명한 사립명문 휘문이 친일파 민영휘가 설립한 재단이라는 말은 우리의 인식을 깨우기에 충분하지 않은가?(물론 현재 휘문의 이사장은 민영휘의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찾기 위해 국가와 소송을 벌이는 첫째 자손들과 명백히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쐐기를 박으려면 근대 자본가들이 자본을 축적한 방식과 그것이 현재 어떤 회사, 어떤 집단의 재산으로 승계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이 너무 방대하고 까다로우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한 권의 책에 담기엔 적합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리즈와 결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이 책은 상당히 아쉽다. 가장 정열적으로 다뤄야 할 36년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그치는 건 이 책의 팬들에게 강한 아쉬움을 남길 게 분명하다. 작가가 수 십년간 쏟아부은 땀과 노력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일제강점기를 한국의 근대사로 봐야할지 망국의 왕조사로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도 큰 트라우마라 어두운 단지 밑에서 악취나는 시간을 꺼내 세세히 분류하고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읽는 사람이기에 이런 책이 더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를 창피해하듯 나는 이 말을 너무나 쉽게 꺼내는 내가 창피하다. 하지만 읽는 것, 그래서 깨우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인 것 같다.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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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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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의 계보에서 여성 철학자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내가 숱하게 서양 철학사를 접하면서도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고대의 일부 문화에서(현재도 일부의 원시 문화에서),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늘 사회적 약자에 머물러왔다. 심지어 여성이 인간의 한 종류로 취급된 것도 꽤 최근의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조애, 즉 동물과 같은 비이성적 존재로 분류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게 된 건 그 위대한 진보적 선진국에서 조차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철학이 말하는 인간은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논하는 세계의 보편은 남성의 보편이지 결코 여성을 포함한 보편이 아니었다. 철학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을 배제해 온 것이다. 왜? 보편의 세계에 편입하기에 여성은 예외적 존재였고 비이성적 행동과 감성에 지배받는 예측 불가능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라는 사람이 보편적 사랑을 논하며 수고롭고 짐 진 자 모두를 하나로 묶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의 사후 교회는 철저히 여성을 쫓아냈고 그들의 역사에서 여성의 흔적을 지우기에 급급했다. 로마 가톨릭은 아직도 여자 신부를 용인하지 않는다. 일부 개신교의 목사들은 '여자가 생리대를 차고 교단에 오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이 철학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그저 주변부를 맴돌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 조차 초창기에는 그녀 자신으로서 보다는 하이데거의 연인으로 더 유명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집필한 뒤 한나 아렌트가 없었다면 결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는 여성이 아직도 남자의 뮤즈나 위대한 '지지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20세기에 등장한 6명의 여성 철학자 또는 사상가의 삶과 철학을 짤막하게 소개한다. 어떠한 계보로 묶인 것은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 대립과 차별을 낳는 이분법적 세계관, 거기서 소외된 경계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경험들을 독특한 사상으로 풀어낸 철학자들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크게 두 가지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됐다.


첫째, 페미니즘은 단지 가부장제의 반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가 갖지 못한 여성만의 특징을 강조할수록 여성은 과도하게 신격화 되어(예컨대 생명을 창조하고 보호하고 기르는 숭고한 존재) 스스로 그 판단에 취해 결국 가부장제가 지키려는 이분법을 더욱 강화시키는, 그리하여 그 체계에 포섭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여야 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자격을 가진 존재로 인정 받는 것으로 그쳐선 안된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남성의 '승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여자답지 못한 여자, 혹은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경계 밖으로 몰아내는 폭력을 자행한다. 여자는 절대로 '또 하나의 남자'가 되서는 안된다.


둘째, 보편이라는 이름이 가진 폭력성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세계를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제인'이라는 인간을 파악할 때 그녀를 여자, 엄마, 혹은 주부라는 개념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개념이란 개개의 개체가 가진 다양하고 모순적인 개성이 지워진 파편에 불과하다. 우리는 개인을 특정한 범주로 묶어 이해하려는 태도를 거부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개념으로 기술될 수 없고 개념으로 기술된 인간은 팔이나 다리, 혹은 눈, 코, 입이 사라진 불구로서 쓰여질 뿐이다.


그러니까 보편 개념이란 일종의 라이센스와 같은 것이다. 세계의 지배자들이(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끊임없이 우리편인지 아닌지를 묻기 위해 만든.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증명서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격증을 과감하게 찢어 버려야 한다. 그 자격이 주어졌을 때 따라오는 사회적 이득을 포기해야 한다. 모두가 그것을 포기할 때 자격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믿기를 거부한다면 신조차 이 세계에서 지워버릴 수 있거늘 하물며 인간이 만든 제도나 규범이 문제겠는가?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175p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내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개념이 어려운데다 생소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나는 이 책의 본문을 인용하여 그 난해함을 옹호하려 한다.


쉽게 읽히는 글은 이미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문법과 사상 그리고 문화를 내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잊고, 글을 읽고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런 쉬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된 낡은 집단 안에 깊이 묶여버려,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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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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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된 건 <밤의 파수꾼> 덕분이다. 책 표지에 그의 그림이 있었고, 그 속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있었다. 그 둘이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됐음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때부터 느낀거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엔 뭔가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자신은 엄연히 형식(style)을 고민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 그런 말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객의 심상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모여든 것 아니겠는가.


<빛 혹은 그림자>는 미국 범죄 스릴러의 거장 로런스 블록의 머리 속에서 처음으로 발아했다. 그 자신이 굉장한 호퍼의 팬이기도 했던 블록은 이 그림들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보내 이야기를 하나씩 얻어올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빛 혹은 그림자>는 일종의 팬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도발적 주문을 수용한 작가의 면면을 보면 팬픽이라는 말이 궁색해지는 건 사실이다.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에서 범죄 소설의 대가들, 그리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롤 오츠까지. 골탕먹일 생각으로 날린 강서브에 그들은 날카로운 서브 리턴으로 응수한다. 그들이 날린 공은 유유히 코트 위를 날아 날카롭게 코너를 찌른다.


솔직히 모든 소설들이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띄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마이클 코넬리, <11월 10일의 사건>의 제프리 디버, <음악의 방>의 스티븐 킹, <사건의 전말>의 리 차일드. 마이클 코넬리와 제프리 디버, 리 차일드는 설명이 불필요한 '범죄 카르텔의 수장'들이고 스티븐 킹은 인간 세계에 현현한 사탄의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공포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호퍼의 그림이 가진 기괴한 우울과 어둠을 이들보다 더 잘 표현해낼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종이 위를 쏜살같이 헤엄쳐 나간다.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써내려간 듯 경쾌한 단편들은 그들이 왜 대가인지를 증명하는 징표와도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짧은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들의 대표작보다 더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핵심인지도 모른다. 특히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을 보면, 평소 그의 중장편에서 보이는 쓸데 없는 군더더기가 모조리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언젠가 그의 글을 통해 나는 스티븐 킹이 단편 소설을 일종의 미숙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단편은 자신이 원하는 걸 모조리 쏟아 넣기엔 불완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애를 써 적어 넣은 소중한 것들이 사실은 다 불필요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음악의 방>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제프리 디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본 콜렉터>로 잘 알려진 유명한 불구 형사 링컨 라임 시리즈의 주인이 바로 제프리 디버다. 하지만 그의 장편들은 어딘가 유치한 구석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현실감 없는 범인들, 예측 가능한 반전, 너무나 천재적이라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형사까지.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서 링컨 라임을 지우고 나니 오히려 긴장감 넘치는 소품 하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 차일드는 영화 <잭 리처>가 그의 커리어를 모조리 파괴할 정도로 엉망이라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을 들기 쉽지 않은 작가였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읽고 나니 잭 리처에게도 한번쯤 온정의 손길을 내밀어 줄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머리 속에서 톰 크루즈를 지우고,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 잭 리처를 펼쳐든다. 실패할 확률은 높아보이지만, 어쨌든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 단편선에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켄 브루언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건 모두 그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 같은 미국놈들. 진정한 대가 없이 마스터 피스를 만들려 하다니. 그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딱 1,000자만 들어가 있었어도 난 별 다섯개를 줬을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골웨이의 뒷골목. 회색 구름 뒤에 가려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빛. 그 그림자의 왕국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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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범람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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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범람>은 일본 미스테리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기괴, 환상, 공포 뿐만이 아니라 실생활 곳곳에 스며든 미스테리까지. 미스테리의 주인공이 평범한 백수에서 프리랜서 탐정까지 될 수 있는 나라. 이것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의 미스테리다.


파리 남자가 가슴을 밀어 끈적 끈적 부풀어 오른 시체 위로 탐정을 쓰러뜨렸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단한 야심도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야한다는 사명감을 비웃듯 쿨하고 멋졌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작가는 언제나 믿을만하다. 과잉은 늘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까.


나는 이런 류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상 망측한 트릭을 혐오해왔다. 범죄를 위한 루브 골드버그 기계.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나 복잡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안다. 좋은 해결책일수록 간결한 법이다. 범죄를 위해 온갖 요란한 트릭을 끼워맞춰 MBC의 <서프라이즈>보다 더 서프라이즈 같은 짓을 벌이면 민망하기만 하다. 이런걸 가지고 천재적이니, 대단한 반전이니 하는 평가가 사라져야 진짜 리얼한 추리, 미스테리 장르가 탄생할 것이다.


알라딘의 소설MD 최원호님은 <어두운 범람>을 '악에게 정서적으로 침범당할 여지가 없는 깔끔한 세계'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대단한 악도, 대단한 탐정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책장을 연 순간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타 목적지에 내려 화창한 가을 낮의 거리를 걷듯 자연스럽게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정황 묘사는 간결하고 악인의 동기와 심리를 깊숙히 파헤치지 않는다. 그러니 조커에 빠진 히스 레저가 될 위험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를 피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 가볍달까? 매니아들은 이런건 미스테리가 아냐 진짜는 이 쪽이지, 하며 어둠의 오오라가 가득한 숨막히는 검정색 책장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고. 하지만 계속 읽어나가다보면 그런건 시시해져, 결국엔 이리로 올 수 밖에 없다니까.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경험해본 나로서는 이것을 취향의 문제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본격' 미스테리 장르가 내려주는 어둠의 세례를 받기엔 내 마음이 아직도 순수한걸지도.


<어두운 범람>을 심야의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부담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노곤노곤 잠이 오는 몸을 소파에 눕히고 TV를 튼다. 지금은 금요일 밤. 이 기쁜 밤이 감은 눈 뒤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잠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튼 TV엔 따뜻한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가 나온다. 프리랜서 탐정 시리즈다.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뭐였더라? 에피소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이걸 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두어번 하품을 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끝났고 잔잔한 엔딩 타이틀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주도 수고했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찬 다음주를 기약하려는데, 나는 이미 고요한 밤 공기를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읽고 이처럼 꿈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이 책과 비슷한 느낌의 책을 꼽자면 단연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선들이 떠오른다. <음의 방정식>이나 <맏물 이야기>. 두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어두운 범람>을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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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잡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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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당연히 <빅 픽처>를 읽지 않았다. 뻔할테니까. 그런데 우연히 <더 잡>을 읽고 나니 뻔한 것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반전 스릴러라고 소개는 하지만 모든 사건과 행동에 딱 떨어지는 개연성이 있는 건 아니다. 반전 소설에선 이 개연성이 핵심이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래서, 꽤 재밌다.


미국에서 출간되는 이런 장르 소설들을 읽다보면 어마어마한 클리셰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인종과 문화 지리적 특성, 산업 등이 다양하다보니 그 배경과 인물을 적절히 변주하는 것으로도 클리셰들은 각인된 문화적 편견 속으로 은근슬쩍 스며든다. 미국은 저런가 보구나. 역시 미국이군! 헐리웃과 미국 출판계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거대할 수 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소설은 딱 헐리웃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실 클리셰라는 건 독창적 작품을 생산해 내려는 모든 작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수식이 아니다. 대개 그것은 모욕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산업과, 고객의 입장은 좀 다르다. 산업은 생산과 유통에 불리한 마스터 피스 보다는 그럴듯한 웰메이드를 원하고 대중들도 여러번 눈여겨봐야 알아챌 수 있는 섬세한 디테일이 가득한 복잡한 제품보다는 바로 사서 바로 쓰고 바로 버리는 제품들을 원한다. 클리셰는 그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어쩌면, 팔리는 작가의 조건은 이 클리셰들을 조합하고, 너무 노골적이진 않게, 얇은 벨벳 천을 덮어 놓은 듯 은밀하게 드러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이런데 능숙해지면 1년에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한 권씩 써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메인 작가는 트리트먼트만 쓰고 보조 작가들이 실제 문장을 적는, 집단 창작도 가능할 것 같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에 새길만한 교훈을 배운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기의 기술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기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나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든 뒤 행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믿는 사람이 나에게 행하는 범죄다. 범죄자들은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지 영업 이익 200조의 초일류 기업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특히 범죄 대상을 선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은 눈 앞의 지푸라기도 황금 밧줄로 보이기 때문에 절박한 대상을 찾아낼 수록 사기의 성공 확률은 높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곤란에 처해있고 누군가 그 곤란을 해결할 좋은 기회를 제안해 왔다면 그게 사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은 아주 쉽다. 그 기회가 당신이 가진 것에 비해 훨씬 큰 보상을 제안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100% 사기다. 별 볼일 없이 수년간 같은 회사에서 B, C, B를 오락가락하며 평범하게 일해온 사람에게 전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협력사 사장이 유망한 스타트업의 팀장 자리를 제안한다면?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왔다며 주먹을 꼭 쥔 채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고심은 하겠지만,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다. 하지만 냉정해지자. 당신은 그런 제안을 받을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네드 앨런은 그런 기회를 받아들인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거기서 빠져나오기까지는? 내가 제시한 예시와 달랐던 건 네드 앨런이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사기에 더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 첫째는 그런 기회와 보상이 자신의 능력에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가 그 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은행장과 주식맨들이 대규모 금융 사기에 휘말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가? 사기는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는 사람이다. 고로 그는 죽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이 삼단논법에는 사기가 가진 중요한 전략이 숨어 있다. 당연하게 내린 전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조건. 사기에 당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판 자체를 뒤집는 기술이 바로 사기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사기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테이블에 앉히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테이블에 앉는 순간 이미 게임 끝이다. 당신이 무능하든 유능하든, 사기는 모든 인간을 포용할 수 있는 완벽한 플랫폼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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