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자 출신 소설가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난 책이다. 한때는 기자였으나 이제는 문학계의 내부자, 그것도 대단히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된 탓에 그의 르포는 별다른 견제나 경계없이 핵심을 파고든다. 그의 소설에 실망한 사람이라도 이 르포만큼은 눈여겨볼만하다.


장강명은 이 책에서 등단 제도가(신춘문예 및 장/단편소설 공모) 갖는 장점과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존재하는 이 제도는끼리끼리 주고받는 안방잔치라든가 공평하지 못한 심사제도, 심사위원단이 원로들로 구성돼 참신하고 젊은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구조라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사실은 이 제도가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공모가 없던 시절엔 등단하려는 사람은 유명한 소설가 또는 시인의 문하생이 되어 열심히 글을 갈고 닦다가 스승의 추천에 의해 등단해야만 했다. 일종의 도제 시스템이자 길드인 셈인데, 참나, 현대의 등단 제도를 혐오하는 골수 비판자라 하더라도 이런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장강명은 이 등단 제도를 공채 채용과(이 역시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 연결한다. 현대의 공채 제도가 지연, 학연을 이용한 알음알음 취업, 그로인한 파벌 형성을 막기 위해, 또 나이가 어리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고안된 제도라는 점은 등단을 위한 공모 제도와 상당히 흡사하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과거 시험과도 연결된다.


이들 제도의 문제점은 첫째, 사회적 낭비가 심하다는 점이다. 소설가가 되려면, 회사원이 되려면, 관료가 되려면 이 시험을 통과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보니 경우에 따라 아주 오랜 시간(이제는 사라진 사법 시험을 떠올려보자) 여기에만 매달리는 낭인들이 생겨난다. 등단이나 과거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일반 기업의 공채 채용 또한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취업이 안돼 휴학을하거나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 다른 회사에서 몇년을 일하다 다시 공채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 등등. 그래서 요즘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나이도 많고 '경력'이 있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해야하니 진짜 신입들은 결국 고배를 마셔야하고 그 고배가 후배들에게 전달되는 속도는 가속화된다.


둘째, 이런 제도가 정말로 혁신적인 인재를 뽑는데는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핏'을 갖춰야만한다. 사실 이런 제도는 한쪽으로 특출나게 뛰어난 천재(또는 괴인, 또는 괴물)를 뽑는다기 보다는 그 집단과 맞지 않는 사람을 걸러낸다는 성격이 더 강하다. 대단한 창의력과 개성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계와 영화계에서도 '공모전용 작품'이라는 말은 이미 널리 통용된지 오래다. 제도는 최대한 많은 고기를 잡겠다고 그물코를 조이고 더 넓게 펼치고 더 빠르게 달려보지만 배보다도 빠르고 그물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는 똑똑한 고기는 모두 놓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은 필연적으로 역동성이 떨어지고 그 안에서 파괴적 혁신을 일으키는 인재가 나오기는 요원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왜 유지하는걸까? 단점만 보면 마치 지옥의 대마왕처럼 보이는 이 제도들에는 사실 꽤 많은 장점이 있다. 앞서 말했지만, 우선 누구나 도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꽤나 공평하다. 고시 낭인을 없애겠다고 도입한 로스쿨 제도가 실제론 엄청난 등록금으로 인해 있는 집 자제만 갈 수 있다는, 그래서 현대판 음서제도가 됐다는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두번째는 이런 제도를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렇게 뽑은 인재들을 데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성장을 이뤄왔다. 장편소설공모전이 한때 문학계에 르네상스를 몰고온 적도 있었다. 이런 제도들이 극소수의 아주 훌륭한 인재를 뽑는데는 미숙할지 몰라도 상당수의 우수 인재를 걸러내는데는 꽤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장강명은 결국 '입단 제도'의 개선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제도를 전부 없앤다고 각계각층에서 진정한 인재들이 발굴될까? 문제는 들어가기는 어려우나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신변의 안전과 미래가 '영원히' 보장되는 그 집단 자체에 있는 것이다. 문예지나 칼럼, 책을 소개하는 TV쇼의 패널엔 오로지 등단 작가만이 참여 가능하다. 등단 이후 단 한 편의 작품도,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못한 작가더라도 말이다. 등단과 사법, 의사 고시 등은 한번만 합격하면 평생 그 자격이 유지된다. 한번 등단한 작가는 등단 작품이 표절이 아닌 이상 영원히 그 자격이 유지된다.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질른 저지른 변호사나 성추행으로 징역을 받은 의사라 할지라도 변호사 협회나 의사 협회에서 제명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시험 방법을 바꾸는 건 이 집단으로 들어가는 문을 고작 동쪽에 낼 것이냐, 서쪽에 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단들의 속성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장강명의 주장은 간단하다. 그들의 능력을 투명하게 알 수 있는 조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문학의 경우 질 좋고 방대한 리뷰들)예컨대 심장병 수술을 가장 잘 하는 의사가 누구인지, 어떤 변호사가 명예훼손과 관련된 재판 승률이 가장 높은지, 어떤 작가가 추리 소설을 가장 재미있게 쓰는지 명명백백하게 알아볼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이 의사나 변호사의 출신 학교, 그들이 현재 어떤 병원과 로펌에 속해있는지, 그들이 거기서 어떤 직급을 갖는지, 그 작가가 어디서 등단을 했는지, 그가 어떤 문학상을 받았는지를 따지겠는가? 정말로 이런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시험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험은 그저 자격을 검증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모든 건 자격을 얻은 뒤 그 바닥에서 발휘하는 실력을 토대로 결정된다. 이게 안되니 각 단체는 자신의 성벽을 높이는데만 집중하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 사고를 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기고(그래야만 성벽의 공신력이 인정되니까) 사람들은 '아 저렇게 높은 기준을 통과했으니 그들을 믿어도 되겠구나'하는 근거없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장강명이 제시하는 대안이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분석 능력과 취지에 대해선 대단히 공감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
대니얼 코일 지음, 박지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소수의 천재가 세계를 이끌어나간다는 신화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의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하는 천재가 나타나길 기대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번트 증후군이라든가 최연소 나사 연구원이 된 천재 소년, 셜록같은 초천재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열광시킨다최근에는 이런 천재들을 한데 모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을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한 이야기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나도 광팬 중 하나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천재들을 한 팀으로 묶으면 우주를 파괴하려는 신의 손에서 세상을 구하는 일도 가능할까?


팀의 능력은 결코 개개인 능력의 합이 아니다. 팀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저마다의 능력과 개성을 갖는다. 어떤 팀은 개개인의 능력에 마이너스를 가하는가 하면 어떤 팀은 각자의 능력을 곱하기도 하고 또 어떤 팀은 구성원들이 어떠한 결과물을 창조해도 거기에 0을 곱해 결국엔 모든 것을 꽝으로 만들기도 한다(한 명의 또라이가 어떻게 팀을 망치는지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최고의 팀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이 책은 그 방법이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을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느냐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래와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생각해보라. 식물이고 동물이고 사람이고 결국은 앉을 자리가 있어야 다리를 뻗는 법이다. 이곳이 내가 속할만한 곳인가? 이곳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인가? 사람들은 집단에 속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다. 그런 판단에 Yes라는 신호를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소통이다. 소개팅을 떠올려보자. 비록 첫인상은 나빴지만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말이 통한다. 말이 통하니 두번, 세번 만나게 되고 어느덧 나빴던 첫인상은 편견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소속감이란 구성원간의 신뢰에서 나오고 신뢰는 지속 가능한 관계에서 형성되며 지속 가능한 관계는 결국 말이 통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명심하자.


한편 좋은 말만 하는것, 서로의 비위를 맞추는 게 소통은 아니다. 소통은 한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진행됐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당신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내부 사정에 의해 이번 채용은 어렵게 됐다는 채용 거절 메일의 문구를 보자. WTF!! 내가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 솔직하게 밝히는 거절 메일이 온다면 어떨까? 나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까발리는 그 메일이 원망스러울까? 나라면 엄청 고마울 것 같다.


물론 비판을 다루는 데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건, 무엇보다 상호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들이 자주 하는 말,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말해보세요. 이때 정말로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자유롭게 말해봐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 팀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른바 피드백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지는 리더들의 일방적 비판은 소통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만약 당신이 리더라면 이거 한가지만 기억하자. 당신의 역할은 듣는 것이다. 당신은 듣고 듣고 또 듣고 들은 내용을 분석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말을 끌어낼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설령 당신을 비판하는 말이 나온다하더라도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 한다.


소속감을 키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커다란 재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사람들은 고통을 공유했을 때 커다란 소속감을 맛본다. 재난의 생존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이 끈끈한 연대를 이뤄 살아나가는 걸 본적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UDT나 네이비씰같은 특수부대는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다. 신입사원 교육도 종종 이런 과정을 벤치마킹하곤 한다.


그렇다면 일반 업무 상황에선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싸이코같은 팀장이 하나 있으면 아주 좋다. 구성원들이 팀장 뒷담화에 똘똘 뭉치곤 하니까. 응? 팀이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정한 뒤 몇 년 동안 정진해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본 구성원들은 설령 그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팀웍을 유지할 확률이 높다. 목표는 일의 성공이 아니라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이다. 역사상 최강의 MLB나 NBA 팀도 전승으로 리그를 우승한 적은 없다.


소속감을 키우는 마지막 방법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들 끼리는 의외로 끈끈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혹여나 실패가 약점이 될까봐 성공할 일들만 골라 한다거나 실수를 숨기기 위해 위험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특히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팀장,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받는 팀장 밑에선 의외로 구성원들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기보단 팀장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역시 세상은 소수의 천재가 이끌어 나가는 거라고? 자신의 약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는 건 대단한 용기고 그 과정에서 명백한 신호가 생긴다. 너도, 나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대화와 협동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우리는 팀으로 일하고, 팀으로 성공한다.


자, 이제 팀을 만들었으니 그 팀을 굴릴 방향을 정해야 한다. 어떻게? 다 뻔한 말이지 뭐. 모두를 자극하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잘게 쪼개 우선순위를 만들고, 그 목표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든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 이중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직접 우리의 목표를 설정했다는 믿음이다. 누군가가 만든 목표라면, 특히 그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만든 거라면, 토론과 협력보다는 명령과 지시가 앞설 수 밖에 없다. 명심하자. 위대한 도전과 혁신은 모두 자발적이었다. 그런건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 위대한 결과물은 모두의 마음 속에서 시작해 모두의 손끝에서 끝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쓰인 장르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곤욕이다. 그 당시에 이런 이야기라니,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의 시작이다, 라며 그 가치를 상기시키는데 솔직히 나는 셰익스피어나 호메로스 등 이른바 전설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책에서조차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나에겐 고전적 가치를 판별하는 심미안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전설이다>는 두 번이나 영화화가 됐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번 다 엉망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영화는 나도 직접 봤다. 윌 스미스 주연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 <콘스탄틴>의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좀비 영화 매니아라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좀비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만 빼면.


감정을 가진 좀비라...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좀비에 대한 모독이었다. 웨스턴 컬쳐를 대표하는 두 괴물은 뱀파이어와 좀비라고 생각한다.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지만 사실 한 쌍으로 읽을 수 있는데, 그건 뱀파이어가 몸은 죽었지만 정신이 살아 있는 존재고 좀비는 몸은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들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반면 좀비는 그저 식욕에만 충실한 괴물로 그려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좀비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쌩뚱맞다는 말이 딱 이 때를 위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원작 <나는 전설이다>를 읽으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은 '좀비'가 아니었다. 그들은 뱀파이어였다. 낮에는 어두운 건물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 해가지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마늘과 십자가, 거울을 무서워하고 사람과 대화도 나누며 도구를 사용하기 까지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온 몸에 썬크림을 바른채 낮의 거리를 활보한다. 이 이야기를 계승한건 영화 <나는 전설이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블레이드>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영화는 원작의 뱀파이어를 좀비로 바꿨지만 감성과 지능 등 일부 설정은 그대로 옮겨왔다. 나는 그게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면 그래도 역시 영화쪽이 아닐까? 감정을 가진 좀비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이상한 좀비 정도로는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배경도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음침한 세상보다는 좀비 아포칼립스에 더 가깝다. 황량한 도시. 텅빈 거리. Nobody else? 라고 소리쳐도 바람에 나뒹구는 신문지만이 답하는 세계. 그런면에서 원작 소설의 주인공에겐 그닥 절망적인 고립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 밤 그의 집 앞을 찾아와 그를 감염시키려 안달이 난 뱀파이어는 인간이던 시절 주인공의 절친이고, 둘 모두 그 시절의 기억을 여전히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밤마다 주인공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에게서 끔찍함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로버트 네빌의 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라 네빌!


이거 참, "알았어 금방 나갈게"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끔찍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약간 거친 매너를 지닌 야만인 정도로 느껴지는 뱀파이어들에게 둘러쌓여 로버트 네빌은 오늘도 세상을 파괴한 원인을 찾아 낮의 거리를 질주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홀로 남은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나는 전설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그가 왜 전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생각없이, 문자와 그 밑에 숨은 심오한 의미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면, 마치 흐르는 물을 즐기듯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손에 든다. 이 남자의 수필은 독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어떠한 야망도 갖고 있지 않다. 한 봄, 벚꽃이 휘날리는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느낀다. 솔솔 잠이 오는 과정에 귓 속에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길을 지나는 오토바이, 조곤조곤 벽을 때리는 강물, 마치 유체이탈을 한 듯 멀리 또 가깝게 들리는 이 소리들이 하루키의 수필이다.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지만 꿀잠을 자고 깼을 때 몰려오는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책을 덮고 힘껏 기지개를 켜면 온 몸에 힘이 넘친다. 어쩐지 오늘 저녁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한때 하루키 에세이의 강력한 악플러였던 나지만 이제서야 그 용도를 안 것 같다. 문득 내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는 하루키의 책들이 눈에 띈다. 오랜 만남은 결국 오해를 녹이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갔다. 남과 북이 두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듯, 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아무튼 지금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만.


하루키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번만 더 얘기하면, 이 남자는 어느날 저녁 야쿠르트 스왈로즈(맞나?)의 외야석 잔디밭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다 딱, 하며 날아오는 타구를 봤고 그 순간 바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에피파니의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첫 소설부터 어마어마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핵심은 이 남자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것. 매년 빠짐없이 노벨상 후보로 오르는 인물이?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독일의 유명한 책 관련 TV쇼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준다. TV쇼에는 당연히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고 대중적 인기도 상당했던 것 같다. 그 중 십수년간 고정 패널로 활약한 문예평론가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그녀인가?)가 하루키의 소설은 껍데기이며 이런 껍데기들은 문학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사회자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의견은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평론가는 결국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했다는 얘기.


무표정에, 유유히 자기 삶의 파도를 타고 넘는 쿨가이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때면 그의 마음도 썩 유쾌하지는 않음을, 하루키는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하루키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는다.


데뷔때부터 수십년간 그런 비난에 시달려왔지만 이 남자는 하루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와 양, 질에 있어서도 독보적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던가? 하루키는 자신이 갓 데뷔를 했을 때 자신의 소설을 읽은 옛 친구들이 그런 것도 소설이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실제로 소설을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그걸 필연성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반드시 소설을 써야한다는 필연성.


결국 소설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그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야기를 쏟아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하루키에게 있어 글쓰기는 숙명이고 숙명이란 자기 자신조차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숙명을 망토처럼 두르고 문자로 빽빽한 이야기의 정글을 헤쳐나갔다. 무려 40년동안 말이다.


하루키의 40년에는 그 누구도 쉽게 매도할 수 없는 작가의 위엄이 담겨 있다. 숱한 비난과 악평을 뚫고 넘어온 40년.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내는 법인데, 자기 자신의 달리기를 이토록 꾸준히 해나가는 남자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 한 장에 그림 한 장. 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고는 하나 63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이다. 그림 빼고, 줄간, 여백을 고려했을 땐 1만 6천자가 겨우될까 싶은 단편 하나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거 상술이 너무한데,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실례는 아니다. 그러니 하루키의 단편에 어지간히 굶주려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책을 손에 들기 전 한번쯤 생각해보기 바란다. 책값도 1만 3천원이나 된다고.


카트 멘시크와의 콜라보가 처음은 아니다. <잠>이라는 책이 처음이었는데 그 쪽은 분량도 단편 이상은 됐고 이야기의 밀도가 상당히 짙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글이 나오지 않았던) 하루키의 불안이 잠, 꿈, 불면을 매개로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뒤섞어 놓은 이야기. 마치 처음부터 한 장의 비단이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경계를 지우는 작가의 솜씨가 압권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버스데이 걸>은, 글쎄 뭐랄까, 냄새는 나지만 그 편린이 너무 작아 충분히 즐길 수 없었달까?


스무 살 생일날,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p.9).


이 레스토랑의 주인은 같은 건물 육층에 살고 그는 매일 저녁 8시, 가게가 가장 붐빌 때 자신의 집으로 배달을 시켜 먹는다. 배달은 늘 홀 매니저의 몫이었지만 그날따라 우연이 겹쳐 그가 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배달 업무는 오늘 바로 20세가 된 그녀에게 할당된다.


괴물을 만나는 건 아니다. 레스토랑의 사장일 뿐이다. 노인이라고는 들었지만 어떤 외모인지, 어떤 성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달을 시키는 이유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레스토랑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으니까). 그녀는 시간이 되자 카트를 끌고 사장이 사는 604호로 향한다. 홀 매니저는 그녀에게 "벨을 누르고 식사입니다, 라고 말하고 놓고 오기만 하면 되"(p. 22)라고 말했는데 사장을 마주한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식사를 안으로 들여가도 될까요?"(p.26)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장의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말해줄 수도 있지만, 역시 그건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


나는 이 짧은 단편 소설이 인생의 메타포 혹은 인생에 대한 한줄 요약 같은 건 아닌가 싶다. 20세의 생일. 한 인간에게 20세는 충분히 이정표가 될만한 나이다. 이제 그녀는 사회가 제시해온 길을 떠나 '스스로'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과연 나의 선택만으로 움직이는걸까? 감히 말하건대, 인생은 우연과 선택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저마다 고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카펫짜기 같은 것이다. 완성된 패턴은 내가 의도한 것도 세상이 의도한 것도 아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두개가 반반쯤 섞인 문양을 얻게 되겠지.


그녀가 20세 생일날 레스토랑 근무를 하게 된 것도 애초에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친구의 대타였으니까. 하필 그날 매니저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에게 배달 임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인건 그녀 자신이었다. "식사입니다, 라고 말하고 놓고 오기만 하면 되" 라는 말에 "식사를 안으로 들여가도 될까요?" 라고 답한 것도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 우연과 선택이 604호실 안에서 인생에 느낌표를 찍을만한 사건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건,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얻어낸 문양일지도 모른다. 최초의 무늬. 아마 그녀의 인생은 이 문양을 토대로 점점 더 커다란 그림을 짜 나갈 것이다. 


버스데이 걸.


그날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이 태어났을까? 책을 다 읽는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